검향 189화
심의경에 도달한 이래 만들어 낸 가장 강력한 초식.
감히 하늘 아래 가장 강력한 일격이라 자부하는 회심의 일격.
팔대섬멸기(八大殲滅技).
합일(合一).
심의경에 도달하고 오랜 세월이 지났다.
인간이 이를 수 있는 것의 정점을 넘어선 그였지만 힘에 대한 갈망, 무공에 대한 갈망은 변하지 않았다.
그를 심의경으로 끌어올려 주고, 심의경에 이르러 얻은 것을 두고 사람들은 흔히들 바람[風]이라 생각한다.
그의 별호가 풍마인 것도 바로 그래서였다.
하지만 그를 심의경에 들게 해준 것, 심의경에 들고 얻은 것은 바람이 아니었다.
그가 얻은 것은 바로 힘[力].
그리고 힘을 추구한 끝에 내린 결론은 절대 피할 수 없는 파괴(破壞)였다.
그때부터 그는 파괴를 갈망했다.
피와 땀을 쏟아 만들어낸 것이 바로 팔대섬멸기.
그러나 그의 갈망은 멈추지 않았다. 팔대섬멸기를 완성해 놓고도 뭔가 부족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뜬구름 같았다.
그렇게 또 세월이 흘렀고, 이윽고 그는 결론은 내릴 수 있었다.
눈을 감고 팔대섬멸기를 차례차례 떠올려 보던 그가 씩 웃으며 중얼거렸다.
‘여덟은 너무 많다. 진정한 필살기라면…….’
그가 눈을 번쩍 뜨며 외쳤다.
“단 일격으로 족한 법!”
극대섬멸기(極大殲滅技).
천지붕굉(天地崩轟)!!
팔대섬멸기를 하나로 모았다.
정확히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지워 나갔다는 편이 옳았다.
그렇게 얻은 것이 극대섬멸기.
그의 봉 전체에 맺힌 것은 바람의 기운이 아니었다. 오로지 모든 것을 파괴하는 그 어떤 것.
천지자연에서 파괴에 해당하는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콰콰콰콰---!
풍마의 일격은 느렸다. 하지만 그 거대하고도 장엄하기까지 한 기운에 닿은 것은 모두 파괴되고 있었다.
땅이 이십 장 깊이로 파였고, 기운이 닿는 범위만 해도 백여 장에 달했다.
기운이 지나가는 자리는 가뭄 때의 강줄기처럼 길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거대한 기운이 마치 해일처럼 초운을 향해 밀려오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초운은 미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저 눈을 반개하고 부러진 반검을 일(一)자로 들어 올렸을 뿐이다.
이는 풍마조차 고개를 갸웃거릴 만한 일이었다.
“피하면 거래는 없다!”
당연히 피할 거라 생각하고 외쳤다.
숨겨 둔 힘을 보고 싶어 거래에 응했건만, 맞상대해 주지 않고 피해 버리면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의 우려와 달리 초운은 피하지 않았다.
초운의 몸 위로 극대섬멸기의 기운이 덮쳤다.
“대체…….”
혹 자살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떠올렸던 풍마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랬다면 여태까지 자신과 겨룰 필요도 없었고, 마지막이라며 조건을 내걸 이유도 없었다.
그때 그를 경악하게 할 만한 일이 벌어졌다.
초운은 바람을 잊었다.
그러자 바람이 그에게 속삭였다. 바람의 흐름이 눈에 잡힐 듯 선명하고, 발끝에선 땅의 기운이 맥동한다.
절대경에 이르고 나서도 상당히 어려웠던 것들이 이젠 편해졌다.
그렇다고 숨 쉬듯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나, 이젠 의지에 따라 행할 수 있었다.
광포한 강물과도 같던 거대한 기운이 초운의 몸을 덮쳤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강대한 기운 안에서 초운은 파괴되지 않았다. 죽지도 않았다. 그저 편하게 힘에 몸을 맡겼다.
파괴의 기운을 지배하여 비켜 가게 하는 것은 아니었다. 기운 그 자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모든 변화의 중심, 변화의 근원에 이르러 얻은 힘, 그가 얻은 환검의 뿌리였다.
넓은 평야에 물이 흐르지 않는 강줄기가 생겼다.
강줄기를 만들어 낸 노인 풍마는 허탈한 웃음을 내보였다.
“허허허…….”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의 끝에는 초운이 있었다.
자신의 평생 정화를 아무렇지도 않게 몸으로 받아 내 버린 청년.
극대섬멸기의 경우 풍마 자신조차 큰 힘을 쏟아부어야 하건만, 상대는 그런 것을 몸으로 받고도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은 듯하니 허탈할 수밖에 없었다.
힘이야 금세 회복할 테니 무승부라고 우길 수도 있겠으나 마음은 그게 아니었다. 어느 모로 봐도 이는 자신의 패배였다.
“무엇이었냐?”
“아직 이름 붙이지 못했습니다.”
초운이 엷은 미소와 함께 답했다.
풍마는 잠시 눈알을 굴려 뭔가 생각하는가 싶더니 곧 입을 열었다.
“무극(無極)…….”
“네?”
“네가 검을 쓰니 무극검(無極劍)이 좋겠군…….”
초운은 그가 자신의 힘에 이름을 지어 준 것을 깨닫고 포권했다.
“감사합니다.”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닐 테지?”
“……네.”
초운은 완성된 것이라 말할까 했으나, 사실대로 말했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무(武)를 나눈 이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나도 그랬다. 팔대섬멸기를 만들어 놓고도 뭔가 허전했었지. 그래서 완성한 것이 극대섬멸기…… 천지붕굉이었건만…… 처음 선보이는 날 너에게 깨지고 말았구나.”
“……죄송합니다.”
초운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사과했다. 그가 사과할 일은 아니었지만,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푸하하하하!”
풍마는 크게 웃었다. 그리곤 초운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정말 이상한 놈이로구나.”
“네?”
“명색이 심검지경에 든 녀석이 어수룩하기 이를 데 없어 하는 말이다.”
“……많이 듣는 소립니다.”
그는 초운의 어깨를 몇 번 더 두드려 준 후 등을 돌렸다.
“어디 가십니까……? 진천군은 그쪽이 아닌데…….”
“내 천왕을 볼 면목이 없어 그런다. 어린놈에게 패배한 꼴로 돌아가서 나랑 한판 붙어보자고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애초에 그가 진천군에 몸을 담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천왕과의 대결을 위해서였다.
천왕 송산 또한 그의 조건을 들어주기로 약조했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어린 초운에게 패한 상태로 그에게 도전한다는 것은 체면상 할 수 없는 일이다.
등을 보이며 떠나던 풍마가 초운을 향해 읊조리듯 말했다.
“천왕을 조심하거라. 그는 하늘의 선택을 받지 못하였으나, 그가 익힌 천왕류는 하늘의 선택을 받았으니까.”
“예?”
“하하하하, 그자는 나처럼 쉽지 않을 거라는 얘기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의 신형은 평원 너머로 사라졌다.
초운은 그에게서 시선을 뗀 후 한순간에 경치가 바뀌어버린 주변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당신도 쉽지는 않았습니다만…….”
八章
혈월은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맹세컨대 이렇게 긴장해본 건 난생처음이었다.
백월성주인 사부와 처음 독대할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아니, 적어도 그땐 죽지 않을 거란 확신이라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계속해서 떠오르고 있었다. 다행인 점은 그가 익힌 무공의 특성상 죽음의 공포는 거의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지…… 진정해라!”
애써 긴장감을 떨쳐낸 그는 자신의 눈앞에서 가공할 만한 살기를 흘려 내는 청년을 향해 말했다.
그러자 청년이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사형을 죽였습니까?”
“아니다. 아니, 그놈 아직 죽지도 않았어! 그러니 기운을 좀…….”
“하긴, 당신 같은 자는 사형을 죽일 수 없겠지요.”
청년이 혈월을 향해 쏘아붙였다. 자존심이 상하는 말이었지만 혈월은 자존심 상해 할 겨를도 없었다.
호신강기조차 찢어발길 무시무시한 광풍이 청년을 중심으로 세차게 휘몰아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사들을 미리 대피시켜 놓지 않았다면 죽은 자도 나왔을 게 분명했다.
혈월은 모략과 귀계가 난무하는 백월성에서 자란 덕에 눈치 하나는 빨랐다.
풍마와 함께 간 초운이 홀로, 그것도 멀쩡히 돌아왔다는 것은 그가 육왕칠사급의 고수임을 증명한다.
게다가 악휘구가 사라져서 분노한 상태, 자존심 상한다고 대들었다간 살해당하고 말 것이다.
그는 가슴속에서 자존심을 억누르고 전후 사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게…… 어찌 된 거냐 하면…….”
* * *
“안 돼에에에!!”
황현의 왼손에서 뻗어 나온 전격(電激)의 창(槍)이 추혼탈명대의 무사들을 재로 만들어버린 것은 그야말로 한순간이었다.
악휘구의 절규가 이어졌다. 십여 년간의 지옥 같은 수행을 함께 이겨 낸 동료들이었다.
비록 상하관계이긴 했으나 어쩌면 친형제만큼이나, 아니 친형제보다 더 가까운 이들이었다.
그런 이들을 모두 잃었으니 악휘구는 미칠 것만 같았다.
그는 악귀같이 일그러진 얼굴로 황현을 노려보았다. 애병인 철창은 이미 황현의 손에 넘어간 후였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는 절대고수, 맨손으로 사람을 찢어 죽일 수 있는 자다.
그가 온 힘을 다해 몸을 던졌다.
순식간에 황현의 코앞까지 도달한 그가 오른발을 크게 구르며 커다란 주먹을 내뻗었다.
화산의 복호권에 악가창법의 진수를 가미한 악가복호권이었다.
펑---!
그러나 아쉽게도 그의 주먹은 황현의 가슴에 닿기도 전에 멈추었다.
그가 펼친 강력한 호신강기에 막히고 만 것이다.
전격으로 이루어진 황현의 호신강기가 그물처럼 넓게 펴지며 악휘구를 감쌌다.
악휘구는 본능적으로 호신강기를 펼쳤다.
“쿨럭!”
하지만 호신강기는 펼쳐지지 않았고, 대신 피를 한 사발이나 토해 냈다. 무리한 나머지 진기가 역류하고 만 것이다.
때를 맞춰 황현의 호신강기가 그의 전신을 옭아맸다.
“죽여…… 버리겠다…….”
악휘구의 독기 어린 목소리에 황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 꼴이 되어서도 입은 살았구나. 좀 더 사형을 공경하거라.”
전망뢰경파(電網雷勁破).
체외가 아닌 체내에 전격을 주입하는 기술이 시전되자 악휘구의 전신이 들썩였다.
파지지직---!
“크으아아아!”
무려 일각여나 계속된 뇌격에 결국 악휘구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사실 이 정도면 죽었어야 정상이건만, 절대경에 이른 그의 육신은 죽음도 비켜 가게 했다.
그의 육신을 마인들에게 던져 준 황현은 얼굴에서 미소를 지웠다.
그리고 멀리 떨어져 사태를 지켜보던 혈월을 바라보았다.
혈월이 그의 시선을 느꼈다고 여긴 순간, 황현의 신형은 제자리에서 꺼지듯 사라져 혈월의 코앞에 나타났다.
황현이 사라진 자리에는 번쩍이는 전격의 여운만이 남았을 뿐이다.
혈월의 몸이 순간 굳었다. 검을 빼 들 생각조차 못할 만큼 빠른 움직임에 반응조차 못한 것이 경악스러웠던 것이다.
황현은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은 허무한 눈빛으로 혈월을 관찰하듯 바라보았다.
코와 코가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에서 텅 빈 눈동자가 자신의 얼굴을 훑어내릴 때마다 혈월은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세상의 온갖 죄인들과 악당들이 모인다는 백월성의 어느 누구도 이런 눈빛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초운은 어디 있지?”
“풍마와 대결하러…….”
“죽었겠군.”
초운의 운명을 쉽게 단정해 버린 황현은 흥미를 잃었는지 조금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는 혈월의 주위를 돌며 뭔가 고심하는 듯했다.
“널 죽여야 될지 말아야 될지 고민 중이었는데…… 가만 생각해 보니 초운이 놈이 워낙 끈질겨서 말이야.”
“…….”
“그래서 널 살려 주는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다.”
“……뭐냐.”
굴욕적이었으나 혈월은 꾹 참았다. 상대는 강환을 일으키는 절대고수마저 손쉽게 제압한 괴물. 그는 승산 없는 싸움은 절대 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그놈이 무사히 돌아오거든, 사형이 화산에서 기다리겠다고 전해라.”
“화산으로 돌아갈 생각인가? 우리 진천군이 가만있지 않을 텐데…….”
“진천군에게 쫓기는 것보단 요새에 틀어박히는 게 낫다. 그리고…….”
그는 잠시 시선을 돌려 마인들 쪽을 바라보다 다시 말을 이었다.
“악휘구를 구하고 싶다면 진천군을 막는 게 좋을 거라고도 전해라. 만약 그들이 먼저 화산에 오르는 불상사가 생긴다면…….”
혈월은 그의 다음 말이 궁금해 물었다.
“……생긴다면?”
“악휘구는 마인들의 한 끼 식사가 될 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