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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향-187화 (187/217)

검향 187화

지금도 마찬가지다.

어디서 저런 놈이 나타났단 말인가. 나이라도 많은 자였다면 인정하기 편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자신과 비슷한 연배로 보였다.

“절대고수도 흔해 빠졌군.”

이를 갈며 중얼거리던 그는, 자존심 때문에 결코 시도하지 않으려 했던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추혼탈명대의 열한 번째 혈룡포가 끝이 났을 무렵, 악휘구는 긴 숨을 한 번 몰아쉬었다.

제아무리 절대고수라 하나 그 역시 지치고 있던 것이다.

뒤를 돌아보니 수하들 또한 안색이 좋지 않았다.

아마 개중엔 내상을 입은 녀석도 있을 것이다.

상황이 나빴다.

이대로 가다간 진천군보다 이쪽이 먼저 쓰러질 것이 분명했다. 그 후에 남는 것은 분명 죽음뿐이다.

“한 명이 없는 게 너무 치명적인데그래.”

추혼탈명대는 본래 열둘.

한 명은 얼마 전에 구한 소녀를 산동악가로 데려갔다.

혈룡포라는 합격진 자체가 열두 명이 펼치는 것이다.

그들은 공력의 배합을 열두 명에 맞춰 훈련해 왔다.

이는 합격진의 기본이다.

무당의 칠성검진이니, 소림의 십팔나한진이니 하는 이름이 괜히 생겨난 게 아니다.

한 명이 빠지면 다른 자들이 그 자리를 메워주어야 하기 때문에 구멍이 생긴다.

혈룡포의 경우 내공이 차지하는 비율이 굉장히 컸기에 더 치명적이라 할 수 있었다.

한 명이 사라진 만큼 다른 이들에게 가해지는 부담이 늘어나니 당연한 결과였다.

마음 같아서는 도망이라도 치고 싶었지만, 초운이 돌아오지도 않았는데 그럴 수는 없었다.

그는 초운을 지키기로 맹세했고, 진천군과 사투를 벌이는 이유는 그 맹세를 지키기 위해서다.

그러나 수하들의 목숨을 등한시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여차하면 수하들을 모두 대피시킬 것이다.

그저 자신만은 끝까지 남아 초운을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가 육왕칠사급의 고수가 아닌 이상 홀로 저 많은 무사를 상대할 수는 없다.

결국 자신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절망적이지는 않았다. 상대방도 힘든 것은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때였다.

“대장, 저거 뭡니까?”

나름 마음속 각오를 다지던 악휘구의 귀에 수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수하가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움직였다.

그의 시선이 진천군의 무사들 사이에서 펄럭이던 백기로 향했다.

“엥?”

* * *

초운을 찢어발길 것 같던 풍옥이 사라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애초에 그런 회오리바람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풍옥이 사라진 곳에서는 초운이 눈을 감은 채로 조용히 서 있었다.

풍마가 그런 그를 바라보며 감탄했다.

“오호, 역회전으로 상쇄해? 신선한 대처로구나.”

그의 말에 눈을 번쩍 뜬 초운이 말했다.

“강하군요, 노선배의 바람[風]은.”

“그래. 하지만 너처럼 바람을 이해하고 얻은 것은 아니다. 힘을 얻기 위해 바람을 이용했을 뿐이지…….”

그리 말하는 풍마의 목소리는 왠지 쓸쓸해 보였다.

초운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노선배님의 바람[風]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틀렸다면 심의경에 이르지 못하셨겠지요.”

그의 말에 풍마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좀 더 진심을 담아 웃었다.

“허허허, 그런가? 그렇다면 탐색전은 그만하고 서로 밑천을 꺼내 보이는 게 어떠냐?”

그의 말에 초운은 주변을 둘러보며 답했다.

사방 이십여 장이 뒤집어져 있었다.

좀 전에 풍마가 펼친 팔대섬멸기 때문이리라.

“……이게 탐색전이란 말씀입니까?”

“그럼? 설마 노부의 힘이 겨우 이걸로 끝이라 생각하느냐? 나는 풍마(風魔)다.”

나는 풍마다.

그 한마디가 많은 것을 얘기해 주었다.

왕년에 그와 창왕의 비무는 거의 자연재해 수준이었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 대지에 남은 상처는 긁힌 것에 불과했다.

게다가 강한 것에 대한 그의 욕구는 이 정도에서 끝날 것이 아니었다.

그가 힘을 추구하는 것은 이상을 위한 것도, 욕망을 위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인정한 강한 상대와 모든 것을 던져 겨루는 것. 어떤 불손한 목적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투쟁심뿐이었다.

그가 바라는 것은 오직 자신의 힘을 증명하는 것. 그 증명 또한 남이 아닌 스스로에게 하는 것이다.

때문에 그는 싸우는 것을 너무도 좋아했다. 싸우는 동안에는 스스로를 증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초운은 그에게서 선기(仙氣)를 느꼈다.

어쩌면 풍마는 무인으로서는 드물게 선경에 들지도 모른다. 아마 그 힘에 대한 순수함이 선도(仙道)의 길로 이끄는 것이리라.

선도와 관련 없는 자가 선도를 걷는다. 어떤 의미에선 천재라 부를 수 있는 부류였다.

“자, 그럼 다시 가마.”

풍마가 봉을 휘두르며 말했다. 그의 눈은 여전히 기대감으로 빛나고 있었다.

초운은 그의 기대에 부응해 주기로 하였다.

초운의 반검에서 유형화된 기운이 솟아올라 온전한 검의 형상을 띠었다.

강기가 아닌 바람의 기운이었다.

그의 신형이 퍼석 하고 사라지며 풍마의 등 뒤에서 나타났다. 풍마는 이미 짐작하였다는 듯 봉을 한 호흡에 아흔 번이나 휘둘렀다.

강력한 바람을 머금은 봉이 수백 개로 불어나며 초운의 전신 요혈을 노렸다.

초운은 당황하지 않고 검을 들어 그것들을 모조리 쳐 냈다.

극쾌의 검은 풍마봉의 잔영을 뛰어넘어 이번엔 풍마의 목을 직접 노렸다.

“좋구나!”

추임새를 넣듯 외치던 풍마가 풍백신공이 불러온 바람의 기운을 목에 집중했다.

그의 기운에 검이 막히자 초운은 다시 암향표를 시전했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그의 몸이 풍마의 좌우 사방에서 수시로 나타나 잔상을 남겼다.

암향표(暗香飄)

십절보(十切步)

암향표의 경지가 극에 이르자 자연스레 깨우친 축지의 비의였다.

신선이 사용한다는 완전한 축지와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움직임인 것만은 확실했다.

허공의 빈 공간에서 무작위로 나타나 순식간에 십검을 떨치고 사라지고, 그것이 수십 개의 방위에서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다.

심검지경에 이르러 바람으로 검의 형상을 만들어 낸다.

이는 존재 자체를 가르는 절대검. 육신을 조각내는 강기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그러나 풍마의 얼굴은 불만으로 가득했다.

“뭐냐! 이게 다는 아니겠지?”

그의 풍마봉이 벼락처럼 튀어나가자 모든 방위가 봉의 잔영으로 가득 찼다.

콰콰콰콰---!!

검극과 봉의 끝이 만나 울부짖는다.

충격파가 백 장 밖의 작은 바위산 중턱에 집채만 한 구멍을 뚫었다.

주변에 인가가 없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심의경에 도달한 절대고수들의 싸움이란 이런 것이다.

이제 갓 마음을 다루게 된 자조차 자연을 농락할 만한 괴물이 된다.

풍마와 약 십여 장 떨어진 곳에 착지한 초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상한 대로 풀리지가 않아서였다.

그런 그를 향해 풍마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상하지? 분명 완벽하다 생각한 초식이 모조리 격파당했으니.”

“네, 마치 제 생각이 읽히는 듯했습니다.”

“그야 당연하지. 넌 절대고수가 되고 얼마나 많이 싸워 보았느냐?”

검귀라 불리던 시절엔 실전 경험이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쫓겼고, 수천의 무인을 베었다.

그러나 절대고수가 되고 검성이라 불린 이후부터는 실전 경험이 그리 많지 않았다.

“절대경에 든 이후부터는 싸움의 양상이 달라진다. 공력의 배분부터 속도, 힘…… 모든 게 절정경 때의 수십 배에 달하지. 기어 다니던 지렁이가 하루아침에 매가 되었는데 날기가 쉬울 것 같더냐? 적어도 같은 수준의 무인들 간의 싸움에선 고전하게 마련이다.”

초운은 수긍하였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심의경이라 해서 다르진 않으리라. 절대경의 끝이라는 심의경.

천운이 따라 줘야 얻을 수 있다는 이 마음의 경지는 다행이도 그 경험을 메울 만한 통찰력이 함께한다.

그것은 보통의 무인 입장에선 거의 예지나 마찬가지인 사기에 가까운 능력이지만, 같은 수준의 무인 입장에선 지루한 수 싸움의 일부일 뿐이다.

이 경우는 당연히 그 수 싸움에 익숙한 자가 더 유리할 수밖에 없다.

풍마는 육왕칠사 중에서 절대고수 간의 생사투 경험이 가장 많았다.

그것도 창왕이라는 숙적과 평생에 걸쳐 수많은 대결을 펼쳤다.

당연히 절대고수 간의 결투에 대해서 그만큼 통달한 자는 드물었다. 초운의 공격이 모조리 차단되는 것도 당연했다.

풍마가 내력을 잔뜩 끌어 올리자 다시 바람이 불어닥쳤다.

“화산의 매화검류와는 손을 나눠 보고 싶었지. 어서 꺼내 보거라.”

“지금까지 펼친 것들도 모두 매화검류였는데…….”

“제대로 된 게 보고 싶다.”

그의 말에 한숨을 내쉰 초운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원하신다면…….”

초운을 중심으로 날카로운 바람이 터져 나왔다. 그 기세는 풍마를 기쁘게 했다.

“아주 좋아!”

* * *

삼천여 무사와 열한 명의 기마무사가 약 삼십 장의 거리를 두고 대치 중이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두 명의 무인이 만나 서로를 노려보며 눈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한참을 이어진 눈싸움 끝에 먼저 입을 연 것은 차가운 인상의 사내였다.

“다시 말하지만 백기를 들었다고 해서 항복은 아니다.”

그러자 거구의 사내가 피식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항복까지는 아니어도 꼬리를 내린 것은 사실이지, 꼴뚜기.”

으드득---!

꼴뚜기라 불린 사내, 혈월이 살기를 일으켰다.

그러나 출수하지는 않았다.

눈앞의 사내가 이끄는 기마대를 상대하느라 너무 지쳐 공력이 쉽사리 회복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절대경에 이른 것은 얼마 되지 않기에 아직 공력 낭비가 심했다.

흔히들 절대고수는 마르지 않는 공력을 지녔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은 일정 부분 사실이다.

다만 회복 속도가 문제였다.

그릇을 비우고 다시 채우는 횟수가 잦을수록 그릇이 차는 속도가 느려진다.

혈월이 지금 그런 상태로, 운기조식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다시 원래의 회복력을 되찾기란 힘들었다.

그래서 그는 눈앞의 거구의 사내에게 백기를 들고 협상을 제안할 수밖에 없었다.

다소 수치스러운 상황이었으나 백월성에서 자라며 온갖 음모와 귀계에 목숨을 위협받아 온 그는 생존 본능만큼은 탁월했다.

잠깐의 수치를 참으면 명줄이 길어지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때 거구의 사내 악휘구가 그에게 말했다.

“그쪽의 조건은 제법 괜찮아. 합리적이야. 그런데…… 네가 약속을 지킬 거라는 걸 어떻게 믿지?”

“……덩치에 걸맞게 바보로군.”

“왜?”

“검귀가 풍마 선배에게서 살아 돌아온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몰라서 묻는 건가?”

“아…… 역시 그거였나?”

악휘구가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댔다.

늘 초운이 나약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다.

풍마와 싸우고도 살아 돌아온다는 것은 삼천 명 정도 남아 있는 무사로는 건드리지도 못한다는 뜻이다.

즉, 그리되면 혈월 측에서 도리어 목숨을 구걸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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