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향 182화
화르르르…….
탁…… 타탁…….
잣나무를 태운 불꽃이 하늘 위로 올랐다.
무당의 제자들은 그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진언을 외우고, 운현 진인의 시신은 불길 안에서 점점 그 형상을 잃어 가는 중이었다.
진언을 외우는 무당 제자들의 눈에서는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운현 진인은 무당의 마지막 어른이자 장문인.
무당이 멸문하고 살아남은 제자들을 이끌어 준 정신적인 지주였다.
그의 존재는 정의회 안에서도 거대했기에 이번 일은 단순히 무당 제자들만의 슬픔이 아닌, 정의회 모두의 아픔이었다.
그의 육신을 태우는 불길 앞에는 정의회 무사들도 모여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초운 일행 또한 씁쓸한 눈빛으로 불길을 바라보았다.
악휘구가 초운을 향해 물었다.
“바로 화산으로 갈 거냐?”
“아뇨.”
“어째서? 그토록 가고 싶어 하더니…….”
초운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저는 저의 증오 때문에…… 인간을 저버리고 있었어요. 힘이 없어서…… 라는 합리화로 덕 쌓기를 거부했죠.”
“뭐, 그래도 애 하나는 구했잖아.”
“그 아이 같은 이들이 한두 명일까요? 그 아이에게 돌을 던진 마을 사람들도 잘못됐지만, 그들을 그렇게까지 하게 만든 자들이 문제예요.”
“진천군을 말하는 거지?”
악휘구의 말에 초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는 그들을 막고 싶어졌어요.”
“화산은 어떡하고? 네가 가기도 전에 진천군에 의해 짓밟히면 약속이고 뭐고 다 깨지는 거야.”
“그게 황현 사형의 운명이라면 어쩔 수 없겠죠.”
“마음을 정했나 보군.”
“네. 도와주시겠어요?”
악휘구가 자신의 철창을 어깨에 올리며 말했다.
“별일도 다 있구나, 네가 먼저 도와 달라고 손을 내밀다니.”
화산에서 수학하던 시절, 악휘구가 먼저 도움을 준 적은 있어도 초운이 먼저 요구해 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 그의 말을 듣고 빙그레 미소 짓던 초운이 입을 열었다.
“사형이니까요.”
“하긴, 그거면 이유로는 충분하지.”
악휘구도 피식 웃으며 답했다.
* * *
진천군의 일만 무사들은 여러 집단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당연했다. 서로 출신 문파가 다르고 성향도 달랐으니까.
지역색도 있었다.
가령 해남검문과 북해의 빙궁은 그 성향이 너무도 달랐다.
해남검문은 기본적으로 무사들 모두가 바닷사람들답게 혈기가 흘러넘쳤고, 북해빙궁은 북해에서 온 귀신들이란 별명답게 지극히 차가웠다.
수백 개 방파의 최고 정예들이 송산이란 절대자 하나만을 위해 뭉쳤다.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님에도 그들이 함께하는 이유는, 바로 천하일통이란 꿈같은 목적 때문이었다.
그런 무사 집단 중에서도 가장 까다롭고 무서운 자들은 바로 이백 인의 생강시들이었다.
본래는 수백 년 전, 국가를 전복하고 무림을 일통하였던 천마신교가 탄생시킨 괴물이었으나 성천궁이 오랜 세월 동안 노력하여 복원하였다.
이들은 절대고수의 시체들로 만들어졌으며, 검기로는 흠집도 내지 못하는 육신과 살아생전의 기술과 공력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다만 그것을 제대로 펼칠 지능과 경험이 부족하기에 절대고수와는 일대일로 겨루어 이길 수 없었다.
하지만 이들은 진천군의 무사들 중 가장 위험한 존재로 통했다.
이백 인의 생강시란 수치상으로만 볼 때 절대고수가 일백 명과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현재 백랑전 무사들의 지휘를 받으며 섬서 각지에서 마인 토벌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초운이 노리는 자들은 바로 저 위험한 생강시들이 포함된 마인 토벌대였다.
“네놈들이 마인이건 아니건 상관없다. 그저 운이 나빴다고 생각하거라. 마인이 이 마을에 숨어 있던 것과 섬서성에서 태어난 것을…….”
우가촌이라 불리는 마을의 주민들은 마을 한복판에 모조리 끌려 나와 목숨을 구걸하고 있었다.
그런 주민들을 향해 비릿한 미소로 죽음의 선고를 내린 이는 백랑전의 무사였다.
그가 손을 흔들자 여섯 명의 생강시들이 앞으로 나섰다.
이미 그들에 의해 마을 한복판에 거대한 구덩이가 파여져 있었다.
구덩이는 주민들의 시체를 묻기 위한 것이었다.
주민들을 죽이는 것은 백랑전 무사들이 아니었다. 바로 여섯 명의 생강시들이었다.
그들은 인간을 죽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강시로서 활동할 수 있는 근원적인 힘인 선천지기를 빼앗는다.
그걸로도 모자라 죽은 시신에서 생성되는 음기마저 흡입한다.
마인이나 다름없는 짓이지만, 이를 두고 나무라거나 꺼려하는 이는 없었다.
백랑전의 무사들은 그들의 습성을 다 알면서도 가만히 보고만 있는 것이다.
그들은 마인 토벌이라는 명분으로 생강시들에게 먹이를 주고 있었다, 인간이라는 먹이를.
생강시들은 구덩이 앞에 여섯 명을 무릎 꿇렸다.
대부분이 아이들이었는데, 그 이유는 선천지기의 흐름이 가장 맑기 때문이었다.
“으아앙!! 살려 주세요!”
“엄마!!”
아이들이 울어 댔지만 도와줄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생강시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검을 내리쳤다.
아니, 내리치려 했다.
하지만 검날이 아이들의 목에 닿으려던 순간, 그들은 벼락 맞은 것처럼 뻣뻣하게 굳은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봐, 뭣들 하는 거야. 어서 움직이지 못해?”
백랑전의 무사 하나가 그들에게 다가가 발로 툭툭 치며 말했다.
그런데도 생강시들은 단 한 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단지 고개를 살짝 틀어 누군가를 응시하는 듯한 행위를 할 뿐이었다.
그때였다.
“강시들도 느끼는 살기를 못 느끼다니, 너희들은 무공 헛배웠구나.”
그리 큰 소리도 아니었다.
그저 작게 중얼거리는 듯한 데도 목소리는 모두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누구냐!”
“웬 놈이냐!”
백랑전의 무사들이 버럭 외쳤다.
잠시 후 생강시들의 시선이 향해 있는 곳에서 거구의 사내가 괴물과 같은 크기의 말을 타고 다가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내의 뒤편에는 열 명의 무사가 철갑을 몸에 두른 말을 타고 뒤따르는 중이었는데, 신기한 것은 그들이나 그 무사들이나 모두 창을 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누구냐 물으니 답하지. 죽일 놈은 지옥 끝까지 쫓아가 그 혼백까지 찢어발기는 귀신(鬼神)이다.”
“그게 뭡니까, 대주. 안 멋있어요.”
“우~ 우~”
뒤를 따르던 무사들이 놀리자, 거구의 사내는 미간에 주름을 만들며 말했다.
“시끄러워.”
그러자 무사들이 다시 핀잔을 늘어놓았다.
“유치하기는.”
“전쟁놀이하는 애들도 아니고…….”
거구의 사내 악휘구는 자신의 대원들을 향해 소리쳤다.
“닥치고 정리나 해!”
“생강시는 어쩌고 말입니까?”
“그건 나랑 초운이 해결할 거니까 걱정 마.”
악휘구가 턱짓으로 백랑전 무사들의 뒤편에 있던 생강시들을 가리켰다.
백랑전의 무사들이 흠칫하여 고개를 돌리니, 그곳엔 한 청년이 아이들을 풀어주고 있는 중이었다.
“너는 또 뭐냐!”
청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굳은 얼굴로 검집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특이하게도 그의 검은 부러져 반밖에 없었다.
하나 잠시 후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그저 한 걸음만으로 무사들의 코앞에 나타난 청년이 검을 슬쩍 휘두르더니 백랑전 무사들의 팔다리를 하나씩을 잘라 버린 것이다.
“어…… 어?…… 크…… 크아아아아악!”
“파, 팔이…… 내 팔이!! 크악!”
그들은 팔다리가 잘렸음에도 잠시 동안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찰나라 불릴 만큼 엄청난 속도가 동반되었기 때문이었다.
백랑전에서 생강시를 관리하고 마인을 토벌하기 위해 지원한 열 명의 무사.
이들은 모두가 절정의 고수였다. 개중엔 초절정도 있었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반격 한 번 못해본 채 청년이 펼친 단 한 초식에 불구가 되고 말았다.
“뭐하고 있어! 이 새끼들아! 죽여! 죽이라고!”
팔을 잃은 한 무사가 멍하니 서 있는 생강시들을 향해 외쳤다.
그러나 생강시들은 이미 전투태세를 갖춘 뒤였다.
여섯 중 셋은 청년에게, 나머지 셋은 악휘구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동료라 할 수 있는 백랑전의 무사들이 당하는 데도 가만히 있던 이들이 이토록 갑작스레 전투태세를 갖출 수 있었던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들은 오직 절대고수를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괴물. 수많은 적들과 상대하다가도 가까운 곳에 절대고수가 나타나고, 그것이 아군이 아닌 적으로 인식된다면 그들은 상대하던 이를 내팽개치고 절대고수를 노리게 되어 있는 것이다.
백랑전의 무사들이 당하는 동안에도 가만히 있었던 것은 반검을 든 청년이나 악휘구가 적인지 아군인지 판단하기 위해서였다.
아니, 판단이라기보다는 본능적으로 구분한다는 게 옳다.
그들에겐 전투 행위 이외의 지능이라 할 만한 것이 거의 없었으니까.
말에서 내린 악휘구가 커다란 철창을 붕붕 돌리며 이빨을 드러냈다.
“저승길 선물로 특별히 보여 주마.”
약식(略式). 용아혈영창(龍牙血影槍).
통천극(通天戟)!!
용권풍이 창에 깃든 것처럼 강렬히 회전하던 창대가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그러자 창끝이 채 닿기도 전에 강시 한 구의 상체에서 폭음과 함께 육편이 터져 나왔다.
상체의 절반을 잃은 생강시는 결국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악휘구가 남은 두 강시를 향해 손가락을 까닥대며 도발하였다.
“둘이 모이면 절대고수를 살해할 수 있다고?”
생강시들은 동료가 박살났음에도 불구하고 동요치 않았다.
영혼이 없는 괴물이기에 그들은 어떤 안타까움도 느낄 수 없었다.
그들은 잘 짜인 한 편의 경극처럼 악휘구를 공격해 왔다.
스치기만 해도 절명할, 무서운 강기가 악휘구를 덮쳤으나 악휘구는 코웃음을 치며 그것들을 모조리 피했다. 그리고…….
“통천극!”
파각!
또 하나의 생강시가 안식에 들었다. 이번엔 머리통이 사라져 있었다.
잘려 나가거나 한 것이 아니라 박살 나 조각이 난 것이다.
“둘이 모이면 한 명의 절대고수를 죽인다? 풋~ 싸움은 숫자 놀음이 아니건만……. 너희처럼 지혜 없는 괴물에겐 일격필살(一擊必殺)이 답이지. 한 놈씩 확실히 지워 나가면 합격술 따위 소용없다.”
말은 쉽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악휘구가 싸움 경험이 많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상대를 깔보지 않고 초장부터 공력을 잔뜩 끌어 올려 일격필살의 절기를 날렸으니, 어찌 보면 기습이라고 할 만했다.
생강시 둘이 절대고수 하나를 살해한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다.
만약 악휘구의 싸움 경험이 부족하고 속전속결의 병법이 성공하지 못했더라면 강시들의 승리로 끝났을 것이다.
하나 남은 생강시는 굳이 통천극을 사용할 필요도 없었다.
창극으로 강시의 머리와 몸통을 이별시킨 악휘구가 초운 쪽을 바라보았다.
“역시…… 따라잡았나 싶으면 또 멀리 가 버리는군.”
사내가 자신보다 강한 자를 인정하기란 쉽지 않다. 절대고수일수록 그러한 경향은 심하다.
평생을 쌓아 온 것에 대한 자부심과 자존심 때문에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악휘구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는 화산에 있을 적부터 초운보다 모자람을 알고 노력해 왔기에 인정하는 것이 조금은 빨랐다.
게다가 지금 그가 보고 있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초월한 것이었다.
세 구의 생강시는 초운을 보지 못했다. 아니, 근처에도 이르지 못하였다는 것이 올바른 설명일 것이다.
어디선가 불어온 미풍이 초운의 머리카락을 흔드는가 싶더니, 그의 몸은 강시들 뒤편에 가 서 있었다.
자리에 남은 것은 오직 초운의 잔상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