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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향-181화 (181/217)

검향 181화

주위를 둘러보니 땅에서 시체의 손이 수천, 아니 수만 개가 튀어나와 초운을 잡으려 했다.

초운은 당황하지 않고 경공을 펼쳐 자신을 쫓아오는 손들을 피했다.

그러나 많아도 너무 많았다.

곧 초운의 몸은 붙잡히고 말았다.

손들은 그대로 초운을 끌고 땅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세상이 다시 한 번 바뀌었다.

이번엔 황야가 아니었다. 사방이 얼음과 눈으로 이루어진 차가운 세상이었다.

드넓은 얼음 평원 한가운데 거대한 빙벽이 서 있는 게 보였다.

초운은 그곳이 자신의 목적지임을 알았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몸은 빙벽 앞에 서 있었다.

빙벽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절대 녹은 적이 없을 것 같은 만년빙 속에 검(劍)이 한 자루 갇혀 있었다.

“안녕?”

익숙한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이번엔 마음이 아니라 직접 귀에 대고 울린 것이다.

초운이 조금 놀라 고개를 돌리니, 그곳엔 한 소년이 서 있었다.

소매에 매화가 새겨진 도포를 입은 소년.

그 소년이 누구인지는 금세 알았다.

다름 아닌 초운, 자신의 어릴 적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어린 시절과 다른 점이 있다면 개구쟁이 같은 분위기랄까?

그 외에는 모든 것이 흡사했다.

초운은 목소리가 나오지 않으니 손을 흔들며 인사를 받았다.

“궁금한 게 많지?”

소년의 물음에 초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소년이 싱긋 웃으며 혀를 내밀었다.

“너는 이미 알고 있어.”

초운이 이번엔 고개를 저었다. 소년은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나는 네가 만들어 가는 양신(陽神)이야.”

소년은 검이 갇혀 있는 빙벽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본체는 이것이지만…….”

양신이라 함은 여러 설이 있지만, 주로 신선이 선계에서 활동할 육신을 뜻한다.

혹은 신선이 이룬 궁극의 육체를 말하기도 하였다.

초운은 양신이라는 소리에 자신의 마음에 불과한 검이 어찌하여 목소리를 내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소년은 자신의 다른 인격처럼 보이나, 사실은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이자 가능성일 뿐, 실제론 나누어진 게 아니었다.

실제로 소년의 기분이나 기억은 곧바로 자신에게 전이되는 중이었다.

자신이 자신을 보는 기억, 그것이 공유되는 건 묘한 일이다. 그러나 그조차도 아무런 위화감이 없어서, 소년이 자신이 만든 양신임을 한 번 더 확신하게 해주었다.

소년이 빙벽 안의 검을 바라보다 다시 초운을 보았다.

“아직 넌 준비가 되지 않았어. 네 안의 검은…… 나는 아직 덜 자랐거든. 하지만 넌 힘이 필요하지?”

초운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청명자가 운현 진인을 통해 남긴 안배를 따라가는 것뿐이었지만 마음속 어딘가에선 세상을 바로잡을 힘을, 무도한 자들의 전쟁에 눈물 흘리는 자들을 구할 힘을 원하고 있었다.

소년이 빙긋 웃었다.

“그럴 줄 알았어.”

소년의 몸이 빙벽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절대 부서지지 않을 것 같던 거대한 빙벽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소년의 목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들려왔다.

-잊지 마. 덕(德)을 쌓는 건, 남을 위한 게 아니라 너 자신을 위한 거야. 그 의미를 이해한 순간 나는 다 자랄 것이고, 너는 나라는 검(劍)을 얻게 돼…….

빙벽이 완전히 부서지며 그 파편이 눈처럼 쏟아져 내렸다. 하나 그것은 실체가 없는 것.

초운이 눈을 한 번 길게 감았다 뜨니 모두 사라져 있었다.

빙벽이 사라지자 그 자리에 남은 것은 한 자루의 검뿐이었다.

처로와도 닮은 듯했으나 아니었다.

검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강대하고도 상서로운 기운, 그리고 친근함이었다.

초운은 감히 검에 손을 댈 수 없어 열 걸음 정도 뒤로 물러나 지켜보기만 하였다.

지금은 도사가 아니지만 그 역시 한때 도적에 이름을 올린 도사였다.

그리고 단순히 검만을 배운 것도 아니었다.

양신이 잉태되고 자란다는 것은 갓난아기를 다루는 것과 같아서, 아직 덜 자란 양신을 섣불리 건드렸다간 모든 공이 허사가 됨을 알고 있었다.

지금은 그저 인사만으로 충분했다. 이젠 현실에서도 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테니까.

아니, 검의 형상을 한 자신의 양신이 원하는 바를 알 수 있을 테니까.

갑자기 찾아온 만족감 때문일까? 심상 세계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초운의 정신이 현실로 튕겨져 나가며 생기는 현상이었다.

곧바로 눈을 뜬 초운은 멈추었던 자신의 시간이 다시 흐르는 것을 느꼈다.

새의 지저귐도, 바람에 흩날리는 매화 꽃잎도 다시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앞엔 운현 진인이 수인을 맺은 모습 그대로 서 있었다.

초운이 눈을 뜨자 운현 진인이 수인을 풀며 쓰러졌다. 하지만 다행이도 초운이 그를 받았다.

운현 진인의 몸은 너무도 가벼웠다.

몸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초운은 자신을 위해 남은 기력을 모두 소모해 버린 그에게 깊은 미안함을 느꼈다.

“진인…….”

“괜찮다…… 괜찮아……. 그보다…… 보고 왔구나.”

“네.”

초운은 늘 애매하기만 하던 것의 정체를 확실히 알게 된 터라 기도가 달라져 있었다.

그가 심상 세계에 다녀온 것은 현실에선 그야말로 찰나의 순간.

그러나 그 찰나를 경계로 초운의 경지는 절대경을 넘어 심검의 초입에 들어서는 중이었다.

“나는 계기를 열어주었을 뿐…… 모든 것은 네게 달렸느니라……. 그러나 흐르는 물은 제 스스로 길을 찾아 강으로 향하는 법……. 너는 오늘 길을 보았으니…… 강으로 가는 것은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부디…… 조급히 여기지 말거라. 모든 것을 섭리에 맡겨…… 넓고…… 깊은…… 강이 되어야 하느니…….”

운현 진인의 호흡은 점점 줄어드는 중이었다.

화광반조로 인해 잠시나마 정광이 돌던 눈빛도 이제는 흐릿했다.

그는 거의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말을 잇고 있었다.

“양신이 다 자라거든…… 천상련주를 찾아야 한다……. 그를 찾아…… 매화검의 마지막 오의를 얻어야 해……. 그럼 넌 청명자 어르신을 다시 뵐 수 있을 게야…….”

마지막 힘을 짜낸 운현 진인은 과거 인세에 현신한 청명자에게 들은 것들에 대해 말했다.

하지만 듣고 있던 초운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운현 진인의 입에서 정말 의외의 존재가 거론되었기 때문이다.

현 시점에서 가장 확실한 적들 중 하나인 천상련주를 만나라니.

그리고 그에게서 매화검의 마지막 오의를 얻으라니.

평상시라면 놀라움을 넘어 경악할 만한 일이었을 것이다.

초운은 좀 더 묻고 싶었지만 운현 진인은 마지막 호흡을 내뱉는 중이었다.

“부디…… 덕을 쌓거라…….”

안타까운 얼굴을 한 초운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진인…… 감사합니다.”

무당의 마지막 장문인, 운현 진인은 사문의 부활을 보지도 못하고 운명하였다.

그러나 모든 것을 내려 둔 그의 얼굴은 지극히 평안해 보였다.

* * *

“음…….”

수하에게 보고를 듣던 송산은 잠시 머리를 매만졌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아닐세, 심영. 계속하게.”

심영이란 노인은 들고 있던 서책을 다시 읽었다. 책에는 섬서 각 지역의 마인 토벌 상황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그러나 지금 송산의 귀에는 어떠한 말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좀 전에 느낀 통증을 다시 한 번 되새기고 있었다. 그것은 통증이라기보다 감각의 반응이었다.

아니, 이해할 수 없는 운명을 느꼈다.

육왕칠사만이 도달했다는 마음의 경지.

그들 중 가장 앞서 있는 이가 바로 송산이었다.

도사였다면 우화등선 직전이었거나 반선지경에 들어선 것과도 같다.

그런 존재가 천기의 흐름을 느끼지 못할 리 없었다.

그는 천기의 요동을 느끼고 만 것이다.

송산은 마음이 심란해져 심영을 내보냈다.

분명 세상 어딘가에 천기가 요동칠 만한 존재가 나타났다. 아니, 태어났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그것이 어린 아기의 모습이라면 차라리 낫다.

적어도 그가 활동하는 당대에는 마주칠 일이 없을 테니까.

아기가 성장해 어른이 될 때쯤이면 그는 이미 땅에 묻혀 흙이 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성인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하늘이 또 한 번 변덕을 부렸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이만 물러서란 말씀이오? 아니…… 싫소. 이 살 날 얼마 남지 않은 늙은이는 발버둥 쳐보기라도 해야겠소.”

송산이 의지를 불태우며 중얼거렸다. 스스로 중심을 잃지 않기 위한 다짐이기도 했다.

* * *

귀면호리는 하루의 절반 이상을 자는 데 투자한다.

얼마나 잠자는 걸 좋아하는지, 그는 졸리기 시작하면 장소를 가리지 않고 드러누울 정도였다.

함께 다니는 추연희는 대경실색하여 말렸지만 그것도 그때뿐이었다.

좋은 피부를 위해선 많이 자야 한다는 헛소리를 늘어놓는 그의 이빨을 털어버린 일도 있었지만, 그는 어차피 불사자인 반선.

초절한 재생력으로 순식간에 회복했다.

그쯤 되니 추연희는 그가 대로변에서 자지 않도록 직접 거처를 마련하러 다녀야 했다.

한데 그런 그가 낮잠을 자다 말고 일어나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래층의 식당에서 밥을 먹이기 위해 깨우러 왔던 추연희는 그의 일변한 분위기에 얼떨떨했다.

평소 봐 왔던 푼수기는 씻은 듯 사라져 있었고, 보이는 것은 분위기 있는 남자의 표상이랄까?

‘그러고 보니 쓸데없는 말만 안 하면 참 괜찮은 사람인데 말이야…….’

추연희의 그런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귀면호리는 심각한 얼굴로 창밖의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기의 흐름이 달라졌다. 뭔가 거물이 태어났어.’

그는 다른 데 신경 쓰느라 추연희의 기척을 파악하지 못하고 창밖을 바라보던 그대로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안 보이는군.”

앞날을 예측할 수 없게 되어 해본 말이었다. 그러나 추연희가 그의 말에 의문을 표했다.

“뭐가 없어요?”

“…….”

추연희가 듣고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그가 엄지와 검지로 미간을 꼬집더니 슬픈 목소리로 답했다.

“오늘은 예쁜 소저들이 보이지 않아.”

“이 인간이!”

퍽!!

추연희의 발바닥이 귀면호리의 뒤통수에 처박혔다.

* * *

사천의 모처.

병자처럼 낯빛이 창백한 사내는 하늘의 흐름에 유난히 관심이 많은 자였다.

그는 흑마라는 별호로 세상에게 지탄받는 마인. 그러나 그 실체는 옛 등천마교의 후예로 마도를 걷는 자인 곽호였다.

“그래…… 천기는 계획대로 흘러가는구나.”

그가 증오로 가득한 눈빛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 흐름…… 반드시 부숴 주마. 후후후후.”

정해진 등선(登仙)을 거부한 그의 몸은 속부터 썩어 가는 중이었다. 때문에 매 순간순간 지옥과 같은 고통에 시달릴 텐데도 그는 웃을 수 있었다.

그의 오랜 갈망과 증오에 비하면 육신의 고통은 달콤하기까지 했다.

* * *

백발의 청년은 깊은 눈빛으로 수면을 응시했다.

언뜻 볼 때 낚시를 즐기는 듯하지만, 그는 지금껏 단 한 마리의 물고기도 낚지 못했다. 아니, 운 좋게 낚싯줄을 문 물고기조차 미끼만 훔쳐 달아나기 일쑤였다.

그는 낚시를 즐기지 않는 듯 그저 수면 위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결국 도달하고 말았는가.”

한참 멍하니 앉아 있던 청년의 입에서 알 수 없는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그 벽을 보아버린 이상…… 나를 찾을 테니 내가 널 찾을 필요는 없겠구나, 초운.”

정의회주 유기.

그는 짧은 중얼거림을 끝으로 다시 수면을 응시했다.

그러자 그가 낚싯줄을 기울인 작은 호수 위에 수천 마리의 물고기 떼들이 배를 내민 채 둥둥 떠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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