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향 180화
“사백님!”
“괜찮다, 괜찮아.”
노인은 자신을 부축하고 있는 중년인의 손을 토닥이며 말했다.
중년인은 붉어진 눈으로 초운들을 바라보다 곧 자리를 떠났다. 명운 또한 그 뒤를 따랐다.
“사형.”
초운이 악휘구를 불렀다. 악휘구는 그 의미를 알고 물었다.
“괜찮겠어?”
그의 염려에 초운이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한숨과 함께 자리를 피해 주었다. 그 뒤를 그의 수하들이 따랐다.
그렇게 마당에는 노인과 초운, 둘만이 남게 되었다.
악휘구는 멀리 가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집 근처에 자리를 잡고 창을 손질했다.
마치 전투를 앞둔 병사처럼 그의 몸에 흐르는 살기는 주변을 압도했다.
그리고 그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창의 귀신.
추혼탈명대.
그들의 투기 또한 만만치 않았다. 단지 악휘구 개인이열 명의 투기를 능가하고 있어 묻혔을 뿐이다.
이에 명운이 긴장한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너무 경계하지 않으셔도…….”
“초운이란 녀석은 말이다.”
악휘구는 그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살면서 뒤통수를 아주 많이 맞았어.”
“…….”
“처음엔 이 엿 같은 세상으로부터, 그다음엔 곽 씨 아저씨, 그리고 그다음엔 황현…… 그 밖에도 아주 많을 거야. 아마 저 순한 놈, 앞으로도 많이 당하겠지…….”
창날을 매만지며 중얼거리듯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아주 차분하였다.
“녀석이 검귀라 지탄받으며 쫓기던 때 나는 내 귀를 의심해야 했어. 내가 아는 초운이와는…… 그 착한 순딩이와는 다른 모습이었으니까. 그러다 깨달았지. 그 착하고 순한 놈이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으면 검귀가 되었겠느냐고.”
명운은 속으로 그건 좀 아닌 것 같다고 여겼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지금은 그저 조용히 그의 말을 듣는 것이 신상에 좋음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중요한 게 뭔지 알아? 녀석이 검귀라 불리며 쫓길 땐 내가 없었다는 거야. 이젠 초운이 외롭게 홀로 세상과 싸울 일은 없을 거란 뜻이지.”
쿵---!
말끝에 그는 창대로 바닥을 내리쳤다. 그러자 그의 몸 전체에서 어마어마한 투기가 솟구쳐 올랐다. 그의 존재력이 작은 마을 전체를 순식간에 뒤덮었다.
“크…… 윽!”
명운의 몸이 자기도 모르게 숙여졌다. 악휘구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앞으로 초운이, 아니 내 동생 건드리면 아주 좆 되는 거야.”
“큭…… 저, 절대고…… 수?”
명운은 그의 존재력이 개방된 순간 바로 알 수 있었다.
본래 절대고수란 자신의 존재력을 낭비라 할 만큼 뿌리고 다닌다.
그러나 그것은 싸우고자 하는 의지, 즉 투기가 동반되어야만 개방된다.
마음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육왕칠사급의 고수가 아닌 이상, 이 같은 낭비는 대부분의 절대고수들이 동일했다.
명운이 며칠간 그와 함께하면서도 그의 경지에 대해 몰랐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명운의 코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대비 없이 코앞에서 강력한 투기와 살기에 노출된 터라 내상을 입은 것이다.
그러나 악휘구는 투기를 내리누를 생각이 없는 듯했다. 아니, 오히려 존재력을 점점 더 확장하는 중이었다.
이는 어떤 함정이든지 간에 즉시 분쇄할 수 있다는 의지의 표현.
그의 강대한 힘은 마을 전체에 배치된 정의회 무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허허허…… 네 친구는 좀 거친 것 같구나.”
병색이 완연한 노인, 운현 진인이 너털웃음과 함께 입을 열었다.
초운은 조금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악휘구 때문에 얼굴이 굳은 것은 아니었다.
좀 전, 아주 잠깐 동안 그와 나눈 대화 때문이었다.
“청명자 어른께선 청연자 어른과 함께 아주 잘 계시지.”
그의 입에서 청연자의 이름이 나오자 초운의 심장은 덜컥 멈추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청연자는 나락으로 떨어져 가는 자신의 폭주를 막고 죽었다.
그의 시신을 두고 오열하던 과거의 기억 때문인지 초운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졌다.
“그럴 리가 없어요. 할아버진 분명 돌아가셨는데…….”
“물론…… 잘 계시다는 것이 인세를 뜻하는 건 아니란다.”
초운은 그를 향해 하마터면 화를 낼 뻔했다. 인세가 아니라면 결국 죽었다는 뜻 아닌가.
그때 운현 진인이 검지를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뒤돌아서 나가려던 초운은 영문을 몰라 걸음을 멈추었다.
“인세가 아니라 함은 하늘을 말한다.”
“네?”
“도사였으니 잘 알게 아니냐. 콜록…… 도사에게 있어서 하늘이란 곧…… 콜록콜록…….”
그는 웃고 있었지만 몸이 힘든지 한참 동안 기침을 하였다.
얼마 후 간신히 기침을 멈춘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하늘이란 곧…… 섭리를 뜻하며, 인간이 섭리에 융화하는 것은 곧 선계에 듦을 의미하지.”
“그렇다면…….”
운현 진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화등선하신 게다.”
“아!”
초운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그리고 물었다.
“청명 할아버지는 그럴 수 있어요. 한데 청연 할아버지는…….”
“그분은 타고난 천명대로 행하셨고, 그 덕분에 마지막 순간 선계에 들 만한 깨달음을 얻으셨다. 그분 역시 등선하셨어…….”
초운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믿을 만한 이야기인지 알 수는 없었다.
심지어 눈앞의 노인이 명운의 말처럼 정말 무당의 장문인인지도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런데도 그는 기뻤다. 설사 진실이 아닐지라도 어딘가에 할아버지가 계신다는 생각에 마냥 기뻐했다.
운현 진인은 힘든지 다시 기침을 하기 시작했고, 곧이어 피를 한 사발이나 토해 냈다.
깜짝 놀란 초운이 급히 그를 부축했으나 그는 그것을 거부했다.
“가야 할 때 가지 않아 생긴 속병이지……. 더 만져 봐야 소용없을 게야.”
그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초운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환검의 극점을 엿보고 얻은 그는 변화에 민감했다.
이는 오랜 시간 수련한 도사가 선인이 되어 자연스레 천기를 읽는 것과도 비슷했다.
그의 경지는 어느덧 절대경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운현 진인의 눈에 정광이 솟아올랐다.
“화산 제자 초운!”
“네.”
초운은 저 눈빛을 알고 있었다. 생의 마지막 순간 태우는 생명의 불꽃, 화광반조라 불리는 현상.
그는 저 눈빛을 청연자에게서 본 적이 있었다.
운현 진인은 더 이상 기침을 하지도, 비틀거리지도 않았다. 꼿꼿이 서서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말했다.
“지금부터 청명 어르신께서 내게 남긴 마지막 안배를 시행하겠다. 허락하겠느냐?”
“……네.”
초운의 대답이 끝나자 운현 진인의 주름 가득한 노안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가 자신의 양손을 모아 수인을 맺었다.
“하늘의 율령(律令)에 따라 나 운현이 심연법을 시전하노라.”
그의 주문과도 같은 말이 끝나는 순간, 초운은 세상의 시간이 멈추었음을 알았다.
아니, 멈추어졌다고 느껴졌다는 말이 정확했다.
그리고 이는 분명히 한 번 겪어보았던 현상이었다.
바로 어린 사제들의 죽음 앞에서 처음 검의 목소리를 들었던 바로 그때…….
五章
멈춰 버린 시간.
정확히는 찰나의 한순간 속에서만 느끼고 볼 수 있는 자신의 심상 세계다.
오직 자신만이 존재할 수 있는 마음속.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이곳엔 자신 외에 다른 한 명이 존재하고 있었다.
바로 운현 진인이었다.
“화산이 멸문하자 청명 진인께선 인세에 잠시 강림하셨었지.”
“…….”
“그분께선 너를 많이 걱정하셨단다.”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 버린 신선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산다.
때문에 그들은 인간이었던 존재일 뿐, 더 이상 인간이라 부를 수 없다.
섭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가 누군가를 걱정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초운은 이상히 여기지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그런 청명자를 이해하고 있었다.
운현 진인은 주변을 여기저기 둘러보며 말했다.
“이곳은 심상 세계, 세상이 멈춰 보이는 이유는 이곳이 아직은 초입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기억하는 것이 그대로 형상화되는 곳이지……. 아직은 자기 심상 속으로 완전히 들어왔다 볼 수 없고, 반쯤은 현실과 맞닿아 있단다.”
초운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웬일인지 심상 세계에 들어온 후부터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뜻은 전음보다도 더 빨리 운현 진인에게 전달되었다.
운현 진인이 빙그레 웃으며 검지를 들었다. 그러자 허공에 작은 문이 생겨났다.
“내가 견딜 수 있는 것은 찰나. 그러나 너에겐 영원이 될 수도 있을 터. 들어가 보고 오거라, 너의 검을…….”
초운이 문으로 향했다. 그가 문고리를 잡아 갈 무렵 운현 진인이 읊조리듯 말했다.
“너는 이미 알고 있느니라, 너는 이미 보았느니라…….검의 목소리를 듣는 자, 하늘의 목소리도 듣게 될 것이다.”
초운이 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눈부신 빛이 초운의 몸을 감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초운은 지독한 혈향에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은 검붉은 하늘 아래 펼쳐진 거대한 황무지였다.
동서남북 어디를 둘러보아도 보이는 것은 널따란 황야.
하지만 초운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 모습이 오히려 너무 익숙했다.
그러다 문득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었다. 아니, 들었다고 느꼈을 뿐 정말 귀에 들리는 것은 아니었다.
황야는 고요했고 알 수 없는 목소리는 그의 마음을 울리고 있었다.
초운은 목소리의 정체를 깨달았다.
검의 목소리.
바로 자신의 마음이 빚은 검의 목소리였다.
그것이 또 하나의 자신이 부르는 목소리임을 알게 되자 황야엔 큰 변화가 생겼다.
거대한, 아니 거대하다는 말로는 채 표현이 불가능할 만큼 무지막지한 문이 황야에 나타난 것이다.
하늘의 구름에 닿을 정도로 높고 오악을 다 담을 수 있을 만큼 넓은 문(門).
그런 문이 갑자기 나타나니 이번만큼은 초운도 놀랐다. 하지만 초운은 이내 그 문조차 친근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리 느끼자 그의 몸은 곧 수백 리나 떨어져 있던 문 앞에 도달해 있었다.
초운은 무표정한 얼굴로 문에 손을 대려 했다.
그때였다.
-아직이야.
들려오는, 아니 가슴에 그대로 담기는 목소리에 초운의 손이 멈추었다.
그것은 목소리가 아니었다. 스스로의 판단일 뿐이었다. 다만 그 판단이 인격을 가진 듯 목소리를 내었다.
-아직 그 문을 열어선 안 돼.
초운은 눈을 감고 문에서 물러났다. 눈을 감은 이유는 그 문이 보내오는 유혹 때문이었다.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천상의 악기들이 내는 음색, 코끝을 찌르는 상서로운 향기.
욕심이 없는 초운조차 거부하기 괴로울 정도였다.
겨우 문에서 멀어진 그에게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너는 날 찾아야 하잖아……. 그러니 날 찾아.
초운은 원래의 목적을 상기했다.
거대한 문이 수천 리 밖으로 다시 멀어졌다. 그러나 그 크기가 워낙 거대해 아직도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팍-!
파파팍!!
갑자기 이상한 괴음이 초운의 귀를 건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