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향 179화
노인이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그 아이는…… 오고 있나?”
“마지막 전서구의 내용은 긍정적이었습니다. 심려 마십시오, 사백님.”
“그렇구만…… 콜록, 콜록!”
“사백님!”
그가 고통이 섞인 기침을 토하자 허름한 도포의 중년인이 재빨리 그의 등에 손을 대고 진기를 주입했다.
잠시 후 중년인이 손을 떼었고, 겨우 진정이 되었는지 노인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네가 고생이 많구나…….”
“아닙니다, 사백. 오래 사셔야지요.”
중년인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노인은 고개를 저으며 다시 말했다.
“아니…… 나는 이미 하늘이 정한 수명을 어겼느니라……. 더 시간을 지체해서는 안 돼.”
“그깟 하늘이 무엇이기에…… 사백께서 이 고생을 해야 하시는 겁니까.”
중년인의 목소리는 젖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노인은 사문의 마지막 어른이었다.
그마저 가고 나면 중년인은 더 이상 기댈 곳이 없었다. 살아남은 제자들을 데리고 정의회에 자리를 잡은 것은 중년인의 능력이었으나, 그가 세찬 풍파에도 견딜 수 있게끔 힘을 준 것은 바로 노인이었다.
노인이 자애로운 미소와 함께 중년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는 네 스승과 정말 닮았어. 알고 있느냐?”
“…….”
중년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슬픔 때문이었다.
노인이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다시 말했다.
“모든 것은 섭리대로 흘러야 하느니……. 너는 슬퍼할지 말거라. 윤회가 계속되는 한 인연은 계속되지 않겠느냐.”
“……예, 사백…… 님.”
중년인은 애써 울음을 삼키고 노인을 침상에 눕혔다.
노인은 이후 몇 번 더 기침을 하였으나 심하진 않았다.
* * *
퍽---!
퍽--!
이제 갓 열한 살의 아이에겐 가혹하다 할 수 있는 돌팔매질이었다.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니라 마을 사람 전체가 살기를 담아 던지는 것이다.
“죽어! 이 마인 놈!”
“우리 마을에 왜 온 거냐!”
“당장 죽여! 마인 토벌대에게 걸리면 우리 마을은 다 죽는다!”
아이는 혼자가 아니었다. 아비로 보이는 사내의 시신이 아이의 몸 일부를 감싸고 있었던 것이다.
그 덕분에 아이는 돌팔매질에서 좀 더 견딜 수 있었지만, 그것도 시간문제였다.
“제발…… 그냥 사라질 테니…… 그만…….”
아이는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애처롭게 말했다. 그러나 마을 사람 중 어느 누구도 그 목소리를 듣지 못하였다. 아니, 설사 들었다손 치더라도 아이를 살려 둘 마음은 어느 누구에게도 없었다.
하지만 아이의 목소리는 다른 이의 귀에 도달하였다.
“그만두세요!”
푸른 무복의 청년 하나가 아이의 앞을 가로막았다.
마을 사람들은 잠시 흠칫하는 듯하였지만 돌팔매를 멈추지는 않았다.
수십, 아니 수백 개의 돌들이 청년과 아이를 향해 날아들었다.
청년은 가볍게 손을 한 번 휘저었다. 그러자 수백 개의 돌들이 청년의 주위를 배회하듯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고, 얼마 안 있어 모두 땅에 떨어졌다.
“으, 으아…… 진천군의…… 토, 토벌대가 온 건가!”
“도, 도망쳐! 도망쳐라!!”
마을 사람들은 청년의 기묘한 한 수에 충격을 받았는지 공포에 질린 얼굴로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청년은 씁쓸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볼 뿐 뒤쫓지는 않았다.
그가 뒤를 돌아보니 자신의 일행이 아이의 몸을 돌보고 있었다. 두껍고 긴 철창을 든 거구의 남자와 호리호리한 까까머리 사내였는데, 까까머리 사내는 아이의 상세를 살피고 거구의 남자는 지켜보는 쪽이었다.
푸른 무복의 청년, 초운이 다가오자 까까머리의 사내 명운이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이의 아비는 이미 절명하였군요. 하지만 아이는 살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행이네요.”
그때 잠시 정신을 잃었던 아이가 깨어나 아빠를 찾기 시작했다.
“아…… 아빠…….”
때마침 아이의 시선엔 거구의 사내 악휘구가 있었고, 그는 아이와 눈이 마주치자 어쩔 줄 몰라 했다.
“……이런.”
주변 눈치를 보던 그는 하는 수 없다는 듯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아이의 손을 잡아 주었다.
“아빠…… 아빠…….”
“허…….”
악휘구는 뭔가에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가 곧 명운을 바라보았다.
명운이 곤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초운이 그런 그를 향해 물었다.
“왜 그래요, 사형.”
“이 아이…… 여자아인데?”
“아, 네…… 근데 그게 왜요?”
초운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되묻자, 악휘구는 입맛을 다시며 답했다.
“난 애들이랑 별로 안 친해서 말이야. 게다가 여자아이잖아.”
초운은 아이가 꽉 잡고 있는 악휘구의 손가락을 바라보며 말했다.
“……별로 그리 보이지도 않는걸요, 뭐.”
“아, 몰라몰라! 이런 건 네 전문이니 네가 알아서 해라.”
얼굴이 벌게진 악휘구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그러나 급히 일어나면서도 아이의 손을 조심스레 푸는 것은 잊지 않았다.
“사형, 무슨 소리를…….”
“몰라! 난 애들은 어려워. 차라리 생강시들이랑 맞장을 뜨고 말지.”
악휘구가 멀리 망을 보던 자신의 대원들을 향해 가 버리자, 초운은 한숨을 내쉬며 아이를 바라보았다.
소매로 아의 얼굴에 묻은 피를 대충 닦아 주고 머리카락을 정돈하니 제법 소녀다웠다. 소녀는 이전보다 좀 더 정신을 차렸는지 초운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 빠…… 는요…….”
“…….”
초운은 슬픈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소녀는 그 의미를 바로 알아채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초운은 소녀에게서 과거의 자신을 보고 있었다. 측은한 마음이 든 초운은 소녀의 손을 살포시 잡아 주는 것으로 위로를 대신했다.
다음 날 어느 이름 없는 산자락 아래 작은 봉분이 세워졌다.
명운은 한시가 급하다며 길을 재촉하였지만, 초운은 하루를 더 소비하면서까지 양지바른 곳을 찾았다. 과거 그를 구해준 화산파의 청연자가 그랬듯 초운은 최선을 다해 묏자리를 찾았다.
“흐흑…… 흑.”
아비의 묘 앞에서 지전을 태우는 어린 소녀는 눈물을 멈추지 않았다.
악휘구와 추혼탈명대, 그리고 명운 등은 그저 착잡한 얼굴로 지켜보기만 하였다.
하지만 초운은 이럴 때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았다. 아니, 알았다기보다 자신이 청연자에게 받은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초운은 소녀의 곁에 함께 앉아 지전을 태우며 입을 열었다.
“슬프지?”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버니가 옛날엔 도사였어.”
“정…… 말요?”
소녀는 울다 말고 초운에게 되물었다. 초운이 씩 웃으며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응, 정말이야. 그것도 화산파의 도사였지.”
소녀는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다시 물었다.
“그럼 우리 아빠, 좋은 곳 가실 수 있게 도와주실 수 있어요?”
“음…… 나도 잘 모르지만, 이 오라버니를 키워 주신 도사 할아버지들 말씀으로는, 인간이 진실 된 마음으로 기원하면 뭐든 가능하대. 하늘도 날고 땅도 쪼개고 바람을 부르고…….”
“마음…….”
뜬구름 잡는 소리였지만 소녀에겐 먹힌 듯했다. 울음이 그쳤기 때문이다.
초운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너를 혼자 남겨 두어서 네 아버지는 무척 슬퍼하시는 중일 거야. 그럼 좋은 곳에 가시게 되더라도 행복할까?”
“……그럼 저, 이제 울면 안 돼요?”
“아니, 울어도 돼. 실컷. 다만 앞으로 넌 행복해져야 해.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소녀는 잠시 눈을 굴리며 생각하는 가 싶더니, 고개를 저으며 되물어왔다.
“어떻게 해야 해요?”
“살아.”
“예?”
“열심히 잘사는 모습을 보여 주는 거야. 언젠가 네가 아빠를 다시 만났을 때, 자랑할 수 있을 만큼 열심히. 그리고 행복하게.”
그의 말을 이해했는지 소녀가 살며시 미소 지었다.
소녀의 미소 속에서 초운은 어린 시절 자신을 구해준 청연자를 떠올렸다.
자신 또한 청연자에게 저런 미소를 보여 주었을까? 청연자 또한 지금의 자신과 똑같은 감정을 느꼈던 걸까? 하는 여러 생각들이 떠올랐다.
그러자 소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어 왔다.
“오라버니…… 울어요?”
초운은 촉촉해진 눈가를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나서.”
소녀 또한 눈물을 흘리는 얼굴 그대로 미소를 지으며 어색하게 절을 하였다.
“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초운의 미소가 진해졌다.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그러자 청연자의 얼굴이 아련히 떠올랐다.
가슴은 알 수 없는 감정으로 가득 찼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초운의 눈가를 식혀 주었다.
* * *
소녀에 대한 후속 조치는 다행이도 악휘구가 해주었다. 그는 추혼탈명대원 하나를 시켜 소녀를 산동악가로 보낸 것이다.
가까운 패도맹으로 보내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진천군으로 인해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일행은 소녀와 헤어졌고, 이튿날이 되어서야 정의회의 진영에 도착할 수 있었다.
화산과 가까워서인지, 아니면 원래부터 그랬던 것인지 주변엔 매화 꽃잎이 흩날리고 있었다.
좀 더 주변을 둘러보니 과연 매화나무가 꽤 많이 서 있었다.
초운은 오랜만에 보는 매화 때문인지, 아니면 청명자를 다시 보게 된다는 생각 때문인지 기분이 약간 들떠 있었다.
하나 명운의 인도로 작은 마을에 들어선 일행들은 찌를 것처럼 느껴지는 살기에 얼굴을 찌푸려야 했다.
“경계하는 것뿐입니다.”
명운이 안심하라는 듯 말했지만 악휘구는 기분이 나빴는지 인상을 풀지 않았다.
일행이 들어선 마을은 사람이 살지 않은 지 꽤 오래된 화전민촌이었다. 그런 곳에 정의회의 무사들이 임시로 들어와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화전민촌이나 마찬가지이듯 집들이 모두 허름하기 그지없었다.
명운은 그중에 그나마 가장 깨끗해 보이는 집으로 일행을 안내했다.
짚단으로 대충 엮은 듯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넓은 마당 한가운데 서 있는 노인이 보였다.
한 이레는 굶은 듯 빼빼 말라 병약해 보이는 노인은 서 있는 것도 힘들다는 듯 한 중년인의 부축을 받고 있었는데, 초운을 바라보던 그의 얼굴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처음 초운의 얼굴에는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노인의 얼굴을 확인한 후에는 얼굴에 아쉬움만이 남았다.
초운의 얼굴을 보지 못한 악휘구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중얼거렸다.
“저 사람이 청명 사숙조신가? 듣던 것과는 다른데…….”
“저분은 청명 할아버지가 아니에요.”
“잉? 그럼 누구야?”
그리 되물은 악휘구는 재빨리 철창을 쥐었다. 함정인 것을 배제하지 않았기에 나오는 반응이었다.
그런 그를 만류하는 것은 명운이었다.
“참아 주십시오, 악 대협. 저분은 무당의 장문인이십니다.”
“뭐?!!”
깜짝 놀란 악휘구가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명운이 계속해서 말했다.
“속인 것은 죄송합니다. 하지만 청명자 어르신의 일이 아주 거짓은 아니었습니다.”
“이러지 않을까…… 하고 예상은 했었어요.”
초운의 덤덤한 목소리가 그의 귀를 파고들었다.
“……예?”
명운이 놀라 되묻자 초운이 말을 이었다.
“청명 할아버지는 화산이 멸문하는 데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어요. 그런 분이 갑자기 제 앞에 나타날 리가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때 마당 안의 노인이 초운을 향해 말했다.
“허허허, 영특한 아이로구나. 그러나 그분에 대해 넌 모르는 게 있다.”
“모르는 것…….”
“명운의 말처럼 청명자 어르신에 한해선 아주 관련이 없지도 않지……. 이 노부는 그분의 마지막 행적에 대해 알고 있으니까.”
“어디 계시죠?”
“허허, 성급하구나. 자세히 듣고 싶다면…… 사람들을 물리지 않겠느냐?”
그의 말에 발끈한 것은 초운을 지켜야 할 악휘구가 아닌 노인을 부축하고 있던 중년 사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