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향 178화
오 리 정도 말을 몰다 보니 과연 정찰을 다녀온 이의 말대로 누군가 있었다.
약 서른 명 정도의 무사들이 길을 막고 있었는데 적대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초운을 확인한 후 자기들끼리 뭔가 중얼거리는 중이었다.
그때 악휘구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길을 막았으면 용건이 있을 텐데, 뭐냐.”
그러자 까까머리의 무사 하나가 한 발 나섰다. 그는 스스로 소개하기를, 멸문한 소림의 제자로 정의회의 사자라 하였다.
“과연…… 듣던 대로의 모습이군요.”
초운이 말에서 내리며 되물었다.
“듣던…… 대로? 저를 아시나요?”
“워낙 유명하신 분이니, 자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정의회라……. 분명 저를 쫓던 이들 중에 검풍대가 그곳 출신이었던 걸로 아는데요.”
검풍대는 얼마 전 남궁도와 결탁하여 당철에게 붙었다.
이후 그들과 함께 면양에서 수많은 인명 피해를 낳기도 했다.
비록 검풍대주 육평을 제외하고 모두 죽었으나, 그 죄가 적지는 않았다.
당철의 경우 패도맹에서 백의종군하며 죄를 대신하는 중인지라 육평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당철은 살리고 육평을 죽이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집법부의 판단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현재 단전을 봉인당한 채로 패도맹 산하의 노역장을 전전하는 중이었다.
초운은 눈앞의 이들이 동료인 육평의 구명을 위해 길을 막았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검성께 한 가지 제의를 드리고 싶어 찾아뵙습니다.”
“저요? 검풍대주를 원한 게 아니라?”
“검풍대주의 처결은 패도맹에서 잘하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하나도 아쉽지 않다는 얼굴로 답하는 그를 보며 초운은 불쾌해졌다.
육평이란 자는 분명 동료일 텐데 저들은 마치 남 이야기하듯 담담해 보였고, 그것이 거슬렸던 것이다.
자신을 소림의 제자로 소개한 사내, 명운이 다시 말했다.
“저희가 모시는 부회주께서 검성을 한 번 뵙고자 하십니다.”
“부회주…… 라면 정의회의 부회주 말인가요?”
“네, 맞습니다.”
“그분이 어찌하여 저를 보시려 하는 거죠?”
“만나 보면 알게 되리라 하셨습니다.”
“가지 않는다면?”
초운의 물음에 명운이 살며시 미소 지으며 답했다.
“그땐 한 가지 말씀을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게 뭔가요?”
“이십사수매화검이 얼마나 늘었는지 보자고 하셨습니다.”
초운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설마…….”
그의 놀란 얼굴을 바라보던 명운의 미소가 더욱더 진해졌다. 그때 악휘구가 물었다.
“왜 그래?”
“할아버지…….”
“응?”
“할아버지가 살아 계세요! 청명 할아버지가!”
청명자라면 육왕칠사 중 반선검왕이라 불리는 존재. 천왕 송산에 견줄 수 있는 인물이나 화산파가 멸문당하기 한참 전 실종되었다. 죽었을 거라 여겨지던 그가 살아 있었다니.
악휘구로선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경계심이 먼저 떠올랐다.
시기가 너무 절묘했기 때문이다.
초운이 길을 나서기 전이었다면, 초운의 이동 경로가 노출되기 전이었다면 모를까 왜 지금에야 나타난단 말인가.
악휘구가 명운을 향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자가…… 청명자인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질문을 바꾸지. 그는 우리의 적인가?”
“아닙니다.”
“그래? 적이 아니라면 검풍대가 초운을 노리도록 가만 놔둔 이유는 뭐지?”
명운은 즉답하지 못했다. 무림 공적을 죽여 정의회의 위상을 높이려 했다는 사실을 어찌 말하겠는가. 그나마도 그것은 장로회의 결정, 자신이 모시는 부회주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대답을 못하다니…… 수상하군.”
철창을 쥔 손에 힘을 주기 시작한 악휘구가 앞으로 나서려 하자 초운이 그를 막았다.
“사형, 그러지 마세요.”
“그러지 마세요는 뭘 그러지 마세요냐! 저놈들은 분명 꿍꿍이가 있다. 그러니 속지 마라. 널 잡기 위해 화산제일검의 이름을 들먹인 것뿐이야.”
“그럴 리가 없어요.”
“뭣이?”
“이십사수매화검을 가르쳐준 건 청연자 할아버지지만, 경지에 이르도록 도와주신 분은 청명 할아버지세요.”
“…….”
“청명 할아버지는 늘 말하셨어요. ‘오늘은 얼마나 늘었는지 볼까?’하고. 그건…… 저와 그분밖에 모르는 거예요.”
악휘구가 철창을 내리며 물었다.
“정말이냐?”
“네, 정말이에요.”
초운이 답하자 악휘구는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 대상은 초운이 아닌 명운이었다.
“만약 거짓이라면 네가 책임져야 할 것이다, 땡중아.”
“알겠습니다.”
악휘구가 으름장을 놓으며 뒤로 물러서자 초운이 그를 향해 말했다.
“어디로 가면 되지요?”
“말을 타고 나흘 거리이기는 하나, 대협의 본래 목적지인 화산과도 그리 멀지 않습니다.”
초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앞장서세요.”
이렇게 화산으로 향하는 초운의 여정은 조금 틀어지고 말았다. 하나 이러한 변수조차 적제가 의도한 것임을 악휘구를 제외한 어느 누구도 깨닫지 못했다.
四章
송산.
천하를 뒤엎으려 하는 거인은 차가운 얼굴로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늘에는 핏빛으로 물든 불길한 달이 빛을 발하는 중이었다.
“잔당쯤이야 천하를 얻은 뒤에 처리하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누군가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송산은 달을 바라보다 말고 그 누군가에게 고개를 돌렸다.
“힘이 있을 때 모두 처리해야 한다네.”
“그 힘이 천하를 얻고 나서 어디 가겠습니까?”
“사람들은 흔히 천하가 일통되면 안정될 거라 생각하지. 하나 그때야말로 가장 혼란스러울 시기네. 심영(沁榮), 자네 또한 마인 사냥의 시대를 겪어 보지 않았는가. 혼란스러운 시기야말로 마인들이 숨기 아주 좋은 때일세. 나는…… 마인이란 것들을 단 한 놈도 놓칠 생각이 없다네.”
“…….”
심영이라 불린 자는 주름 가득한 얼굴로 주군인 송산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죄 없는 양민들이 너무 많이 희생되고 있습니다.”
“……대의를 위해선 희생이 필요하지. 희생이 두려워 정오의 말을 듣지 않은 게 한일세. 내 좀 더 일찍 일어났더라면 희생은 크지 않았을 터. 모든 것은 내가 짊어지고 갈 테니 자넨 심려치 말게나.”
심영은 더 이상 그를 설득할 수 없음을 깨닫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홀로 남은 송산은 다시 달을 바라보았다.
“잘 있느냐? 네 원대로 천하를 도모하게 되었건만, 정작 내 곁에는 네가 없구나.”
누구에게 말하는 것일까, 송산의 목소리에는 그리움이 가득했다.
* * *
초운 일행이 정의회 무사들을 따르기 시작한 지 사흘째.
섬서에 들어선 초운은 진천군과 화산의 마인들에 의해 벌어진 참상에 치를 떨었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고, 애꿎은 양민들이 죽어 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초 진천군은 화산의 마인들을 가볍게 짓밟으려 했지만 마인들의 반항은 예상보다 거셌다.
병력의 차이를 메우기 위해 양민들을 잡아들여 마인으로 급조하였고, 이렇게 급조된 마인들은 불완전하기 그지없어서 화산의 요새에선 그들을 제어할 방법이 없자 그냥 풀어주었다.
불완전한 마인들은 풀려나자마자 인간을 무차별적으로 잡아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희생자의 대부분이 자신의 가족이나 이웃이었다.
불과 한 달 사이에 수천여 명이 마인이 되거나 죽었다.
이러한 발악 때문인지 진천군 또한 섬서에서 걸음을 멈춘 상태였다.
하나 그것은 화산의 요새를 무너뜨리지 못해서인 것이 아니라 서서히, 그리고 확실하게 풀 한 포기 남기지 않고 멸망시키기 위해서였다.
지나가는 개미를 짓밟는 것에서 매미나 풍뎅이 정도로 격상되었다고나 할까?
그들은 마인이 되어버린 양민들을 가만두지 않았다.
마인의 특징을 지닌 이가 마을에 단 한 명이라도 존재한다면 그 마을을 가차 없이 도륙했다.
도망치던 마인이 숨어 있던 것뿐이던 마을조차 그냥 두지 않았다.
마인이건 마인이 아니건 상관하지 않았다. 그저 조금만 의심이 들면 살처분하듯 다 죽였다.
마인은 돌림병 취급당했고, 그들과 접촉한 수많은 양민들은 학살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진짜 돌림병은 진천군이 퍼뜨리는 공포였다.
천상련이나 마인과 관련된 것은 하나도 남기지 않겠다는 듯 진천군은 결코 서두르는 법이 없었다.
진천군은 화산의 마인들이 양민들을 납치해 마인화시키는 것을 막기 위해 화산 사방 오십여 리 안을 꼼꼼하게 틀어막았다.
이후 특별히 뽑은 무사들과 생강시들을 이용해 섬서성 각지를 돌며 마인들을 토벌하기 시작했다.
이에 송산이 내민 명분은 바로 대정화(大淨化)였다. 중원에서 마인의 흔적을 없애 버리겠다는 의지의 표현.
그리고 그 제물로 선택된 것이 바로 섬서성이었다.
정의회는 진천군을 구성하고 있는 수백 개의 방파 중 한 곳으로 화산의 동쪽에 진을 치고 있었다.
* * *
으드득--
좀처럼 화를 내는 법이 없는 초운이 이를 갈고 있었다. 그것은 곁에서 말을 몰던 악휘구도, 추혼탈명대의 다른 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눈앞의 참상은 그만큼 심각했다.
목이 잘려 나간 시체들로 가득한 커다란 구덩이, 그리고 그 앞에선 힘없는 양민들이 개처럼 끌려와 목이 베이고 구덩이에 던져지는 중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도 분노하지 않는다면 제대로 된 인간이라 할 수 없다.
당장에라도 뛰쳐나갈 것 같던 일행을 막은 것은 명운이라는 이름의 중이었다.
“참으시지요.”
“참아? 저 인두겁을 쓴 짐승들을 보고 참으라고?”
악휘구가 살기를 가득 피워 올리며 되물었다. 명운의 얼굴에 식은땀이 흘렀다. 살기만으로 심장이 멈춰 버릴 것 같은 압력을 느끼고 있었다.
“이곳에서 사고를 치시면 그냥 끝나지 않습니다. 장담컨대 일각도 안 되어 천라지망이 펼쳐지겠지요. 그것을 어찌어찌 뚫더라도 진천군의 본대가 들이닥치는 건 막지 못합니다. 수천의 절정고수와 이백 구의 생강시들 틈에서 살아남을 수 있습니까?”
그의 말에 악휘구의 살기가 조금씩 줄어들었다.
명운의 말은 계속되었다.
“저도 불제자입니다. 저라고 저 모습이 보기 편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참고 있을 뿐이지요.”
“정의회라는 곳도…… 저들의 일에 가담하고 있나요?”
초운이 물었다. 그러자 명운이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말했다.
“그럴 리가요. 마인 토벌은 백월성의 무사들과 성천궁의 생강시들이 도맡아 하고 있습니다. 백월성은 주로 잡아 오는 쪽이고, 죽이는 쪽은 생강시들입니다.”
백월성의 무사들이라 하면 분명 백랑전과 벽월인들일 것이다.
그들이 음흉하기로 소문난 백월성 출신이라고는 하나 그래도 명분은 중히 여긴다.
때문에 그들은 양민을 도륙하는 일을 생강시들에게 모두 떠넘겼다.
과연 초운이 보니 양민들의 목을 베는 자들은 하나같이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다. 뭐랄까, 오랑산에서 보았던 실혼인들과 비슷했지만 조금 더 강인해 보였다.
자신들에게 할당된 양민들을 모두 처리한 생강시들은 구덩이를 파묻기 시작했다.
절대고수의 시신을 이용해 만들어 낸 괴물들인지라 구덩이를 메우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초운 일행은 그 모습을 지켜봐야만 하는 것에 자괴감을 느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