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향 177화
천상련의 심처에 위치한 련주부.
지금 련주부엔 천상련의 모든 수장들이 모여 있었다.
다만 련주부의 주인인 천상련주만이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을 뿐이었다.
그동안은 그 없이도 잘 굴러갔으나 지금은 달랐다.
화산이 무너지게 된다면 진천군을 등에 업은 반천련의 위세를 꺾을 가능성이 희박해지기 때문이다.
때문에 현재 련주부를 제외한 사부육당의 수장들은 부련주 오일상을 타박하는 중이었다.
“대체 련주께선 어찌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신단 말이오.”
“지금 상황은 풍전등화나 다름없소! 이대로 밀리면 망한단 말이오!”
여러 부주와 당주들이 오일상을 압박했지만 그는 눈을 감은 채 묵묵부답, 말이 없었다.
“그분의 방랑벽은 알고 있소만, 너무 심하지 않소이까. 벌써 이십여 년 가까이…….”
이 밖에도 여러 불만이 튀어나왔다. 묵묵히 그들의 이야기를 듣던 오일상의 입이 열린 것은 일다경이 지난 후였다.
그는 좌중을 돌아보며 한마디 했다.
“이중에…… 련주를 찾아보신 분은 있소?”
“무슨 소리요?”
“련주께서 세상을 떠도신 게 벌써 이십 년이 다 되어 가오. 그동안 단 한 번이라도 련주님의 생사를 궁금해 하거나, 행적을 찾아보신 분이 있냐는 말이오.”
오일상의 대답에 사부육당의 수장들은 꿀 먹은 벙어리마냥 서로 눈치 보기 바빴다.
오일상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련주께서 안 계시다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양반들이 이제 와 련주를 찾다니, 어처구니가 없구려.”
“어험…… 험.”
그의 말에 다들 헛기침하기 바빴다. 오일상의 얘기가 사실이기에 그들은 반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십여 년 전 천상련주가 특유의 방랑벽으로 자리를 비웠다.
일 년, 혹은 이 년에 한 번씩 기별은 보내오지만 어느 누구도 그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는 이들도 있을 정도였다.
그랬던 주제에 정작 아쉬워지자 련주를 어서 찾아내라고 큰소리니, 오일상으로선 기분이 상할 수밖에 없다.
그가 비록 부련주의 직위라고는 하나, 련주가 없는 동안 천상련을 이끌어 왔다. 수년 전 무림맹의 침공도 잘 막아 내었고, 곽호를 도와 구대문파를 박살내고 천상련의 전력 또한 상승시켰다.
그런 그를 앞에 두고 련주를 찾는 것도 서운했지만, 이런 자들을 믿고 련을 맡긴 련주가…… 자신의 하나뿐인 사형이 불쌍했다.
사부가 죽고 나서 얼마 남지 않은 사형제들을 끌어모아 천상련을 장악하고 세를 키운 것은 사형 자신의 영광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사형제들을 위해서였다.
자신의 사제들이 남에게 짓밟히지는 않을 기반을 마련해 주기 위해 그는 온 힘을 다해 세를 키웠다.
련주부를 중심으로 삼십 년이 넘게 고생만 한 그는, 천상련이 어느 정도 커지자 모든 권력을 련주부의 사제들과 나머지 사부육당에 나눠 주었다.
그 후로 그는 아무 미련도 없다는 듯 천상련을 떠나 방랑을 시작했던 것이다.
오일상은 그런 사형의 은혜에 보답하여야만 했다.
사형이 남겨준 천상련을 짓밟힐 수는 없었다.
그는 몇 마디 말로 사부육당의 수장들을 제압한 뒤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든 호법신장을 소환하겠소.”
“다른 이들은 모르겠으나 곽호나 귀면호리가 과연 오겠소?”
누군가 부정적으로 답하자 오일상이 의자의 팔걸이를 박살내며 외쳤다.
“그들 또한 천상련에 속해 있소. 그들이 그리 날뛸 수 있는 것도 우리가 있기 때문이니 올 것이오. 아니, 와야 하오!”
결국 오일상의 명에 의해 호법신장과 그 휘하의 방파에 소집령이 떨어졌다.
작금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선 어떻게든 진천군이 화산을 부수는 것을 막아야 했고, 그러기 위해선 모든 힘을 동원해야 했다.
길목을 막아버린 반천련을 뚫기 위해선 그 방법뿐이었으니까.
그러나 하늘은 천상련의 편이 아니었다.
* * *
“크웩…….”
거구의 노인이 피를 토하며 무릎을 꿇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가슴은 커다란 손바닥 자국이 찍힌 채로 함몰되어 있었다. 가슴뼈가 으스러지고 심장이 터졌으니 천하제일의 의원일지라도 그를 살리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네…… 네놈은 무어냐.”
그러자 그의 가슴에 장법을 날린 청년이 살며시 웃으며 말했다.
“소생은 ‘죽음을 부르는 자’입니다.”
“흥! 이름도 길구나. 그런데 왜 나를 노린 거지? 쿨럭쿨럭.”
노인이 기침을 할 때마다 입에선 내장 조각이 튀어나왔다.
청년은 그런 노인을 향해 천천히 다가가기 시작했다. 걸음을 옮길수록 그의 몸에선 짙은 어둠이 안개처럼 흘러나왔다.
청년이 답했다.
“당신을 노린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단전 안에 있는 마정을 노린 것이지요.”
“무어라? 그런 쓸모없는 짓을 왜…….”
거구의 노인, 역마(力魔) 웅쾌는 어이가 없었다. 마정은 단전과 같으면서도 달랐다. 보통의 무인들처럼 단전에 진기를 모으는 것이 아니라서, 흡정마공으로 기운을 훔칠 수도 없는 것이다.
마공에 의해 생성된 마기의 종류는 천차만별이고, 각각이 보여줄 수 있는 이능 또한 다르다. 때문에 이것을 설사 흡수할 수 있다 치더라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란 불가능이라 할 수 있었다.
마정을 빼앗을 바엔 차라리 마공을 여러 가지 익히는 게 더 완벽한 방법이었다.
“쓸모없진 않습니다. 그러고 보니 당신에겐 보여드려도 될 것 같군요.”
그렇게 중얼거린 청년의 손이 휘둘러졌다.
그러자 결코 움직여질 리 없는 웅쾌의 몸이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그것은 웅쾌의 의지가 아니었다.
“어찌…… 네놈! 무슨 짓을 하는 게냐!”
“별거 아닙니다. 얼마 전에 얻은 새로운 힘을 써 보는 중이지요.”
“새로운…… 힘?”
“네, 조롱의 현술이라고 합니다.”
“헉!”
웅쾌의 동공이 커졌다. 조롱의 현술이 누구의 기술이었는지를 떠올린 것이다.
“그것은…… 인형사의 것인데…… 설마…….”
청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이건 그의 기술이지요.”
“어찌…… 어찌…….”
“말했지 않습니까, 마정이 필요하다고.”
푸확!
웅쾌가 또 한 번 피를 토했다. 하지만 피와 함께 튀어나온 것은 내장 조각이 아니었다. 검붉은색의 구슬이었다.
“어…… 어…… 어억…….”
웅쾌는 입을 벌린 채 고통에 찬 신음을 흘렸다. 그럴 만도 했다. 청년이 조롱의 현술로 일으킨 마기의 실. 그 실이 그의 단전을 헤집고 마정을 휘감아 목구멍으로 빼내었기 때문이었다.
그 과정에서 그의 내장은 완전히 박살이 났다. 그런데도 그가 살아 있는 이유는 청년이 펼친 조롱의 현술 덕분이었다.
이토록 잔인한 짓을 저지른 장본인인 청년은 마정의 씨앗을 검지와 엄지로 잡고 한쪽 눈을 찡그린 채 품평 중이었다.
“깨끗하군요. 아주 정심해요. 이전에 만났던 영마(影魔)라는 분의 마정은 혼탁하던데.”
영마 또한 웅쾌와 같은 호법신장이었다. 웅쾌는 그가 영마를 만났다는 소리에, 영마 또한 마정을 빼앗기고 살해당했음을 확신했다.
“크…… 으윽.”
그러나 이제 와 웅쾌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저 고통 어린 눈빛으로 청년을 바라보는 것이 다였다.
마정에서 눈을 뗀 청년이 그에게 물었다.
“어때요? 이대로 제 조롱의 현술에 몸을 맡기는 게. 그리되면 목숨은 건질 수 있을 겁니다.”
“우…… 흐…… 흐…… 지랄 말고…… 그냥 죽여라.”
웅쾌의 말에 청년은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원하신다면.”
이미 만신창이가 된 그의 숨통을 끊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저 그의 몸에 걸어 놓은 조롱의 현술을 풀어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웅쾌의 몸이 허물어지듯 쓰러지자 청년은 서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
그저 이 한마디만을 남기고 청년의 몸은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넓은 벌판에는 웅쾌의 처참한 시신과 그가 이끌던 패력당 당원들의 시체들로 가득했다.
* * *
초운이 길을 나설 수 있게 된 것은 귀천패를 얻고 사흘이 더 지난 후였다.
그로선 하루라도 빨리 움직이고 싶었지만, 마치 처음 강호 출도를 하는 애송이에게 하는 마냥 이런저런 조언을 아끼지 않는 인물들이 많아 어쩔 수 없었다.
장왕과 살왕은 물론이고 당위룡에다 사부인 적제까지 그를 염려해 수차례 불러들였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살왕의 손녀인 이청린은 몸도 약하면서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그를 따라가겠다며 떼를 썼다. 그런 청린을 말리느라 초운은 진땀을 빼야 했다.
서평도 함께하려 했지만 천검각주인 적운도 못 따라가는 마당에 그라고 해서 별수단이 있을 리 없었다.
이렇듯 귀찮을 정도의 관심이 계속되었지만 싫지는 않았다. 과거 화산에서 자신을 걱정해 주던 장로들과 사형들에게서 느꼈던 것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가족애였다.
언제부턴가 패도맹은 그 시절의 화산을 떠올리게 하였다. 사부도 사부였지만 장로원의 장로들은 친손자처럼 대해 주었고, 한때 불편했던 서평이나 장왕의 제자인 엽성과는 이제 형제처럼 친했다.
검귀라 불리던 시절엔 외롭게 떠도는 시간이 많았다.
사람을 좋아하는 그로선 무척이나 괴로운 일이었지만 자신으로 인해 주변인들이 불행해진다고 여기던 때라 그는 사람을 가까이 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과거의 적도 현재의 벗도 모두 그를 좋아해준다. 이보다 더 행복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길을 나서는 것이 아쉬울 정도였다.
그리고 이제 그는 검귀가 아니었다. 패도맹의 본거지인 사천은 물론이요, 전 중원의 후기지수들이 열광하는 검성(劍星)이었다. 게다가 패도맹의 차기 후계자로 소문난 그가 홀몸으로 길을 나설 수는 없는 법.
그의 사부인 패도맹주 적제는 확실한 호위를 붙여 주었다.
지금 그의 곁에는 산동의 전설이자 흉견들이라 불리는 추혼탈명대(追魂奪命隊)가 함께하고 있었다.
저마다 몸 한구석에 귀(鬼) 자 문신을 새겨 서로를 증명하는 이 창의 귀신들은, 창왕(槍王)의 제자들로 모두가 초절정 이상의 고수들이었다.
그들은 제각기 거대한 말을 타고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말의 전신은 은빛으로 빛나는 철갑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들 추혼탈명대의 대주는 창왕의 손자답게 엄청난 거구를 자랑하는 사내로, 이름은 악휘구였다.
그는 과거 화산에서 초운과 동문수학하던 사이였으나, 도적에는 이름을 올리지 못한 채 속가의 신분으로 산동악가에 돌아가 창왕의 오의를 이어받고 추혼탈명대의 대주가 되었다.
개인보다는 전체를 위하는 추혼탈명대의 특성상 악휘구의 이름은 강호에 알려지지 않았으나 추혼탈명대의 역대 대주들이 그러하듯 절세의 무공을 지닌 것은 분명했다.
그 증거로 절대고수인 초운조차 악휘구에게서 빈틈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화산까진 엿새 거리로군. 우리 산동악가가 자랑하는 흑로(黑勞)의 속도라면 사흘이면 가능할 테지만, 너의 말[馬]이 워낙에 허약한 놈이라…….”
“죄송해요, 사형.”
사실 초운이 미안해 할 필요는 없었다. 그의 말 또한 건강하고 빠른 명마였기 때문이다.
단지 추혼탈명대가 타고 있는 전마(戰馬) 흑로들이 너무 뛰어난 것뿐이다.
산동악가가 수백 년 동안 교배를 거듭하여 개량에 성공한 흑로는 전신에 무거운 현철 중갑을 두르고도 하룻밤 사이에 오백여 리를 주파할 수 있는 명마 중의 명마였다.
그런 명마만을 타고 다닌 악휘구에게 초운의 말이 눈에 찰 리가 없었다.
“네가 죄송할 것까지야. 말 값을 아끼는 사숙님 때문이지.”
사부인 적제를 욕하는 악휘구를 보며 초운은 쓴웃음을 삼켰다. 세월이 많이 흘렀건만 그의 사형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뭐, 외양이야 칠 척 거구의 산적 두목처럼 변해 버렸지만, 그렇다 해도 본질까지 변하지는 않았다.
그는 여전히 털털했고, 농담을 좋아하며 승부욕이 강했다. 다만 초운 앞에서만큼은 그 승부욕을 누르고 있을 뿐이다.
담소를 나누며 걷던 그들을 향해 추혼탈명대원 중 하나가 다가왔다. 그는 십 리를 앞서 가 정찰을 하고 오는 중이었다.
“대주, 오 리 앞에 이상한 놈들이 있습니다.”
“이상한 놈들?”
“예, 초운 대협을 기다리고 있는 듯 보입니다.”
“이동 경로가 노출됐나 보군.”
이동 경로의 노출은 아주 심각한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악휘구는 피식 웃었다. 그 어떤 적도 분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출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지금의 노출이 의도된 것임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사숙의 계획대로로군, 날파리들이 모이기 시작했어.’
자신의 사제 초운은 바깥에만 나가면 사건 사고를 불러일으키고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 그게 좋든 나쁘든 초운은 움직이는 사고뭉치인 것이다.
“사형, 저를 노리는 걸까요? 사부께서 저에 대해선 극비에 붙이신다고 하셨는데…….”
악휘구는 대답 대신 초운의 곁으로 말을 몰아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게 다 사숙의 계획이란다, 순진한 놈아.’
그가 초운에게 물었다.
“어쩌겠느냐, 상대하겠다면 말리지는 않으마.”
“떠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피를 보겠어요. 일단 대화부터 나눠 보지요.”
악휘구는 초운을 호위하기로 약속했을 뿐이다. 그래서 그의 결정을 존중하기로 하였다. 이는 초운이 어떤 위기에 닥친다 해도 구해줄 자신이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선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