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향 175화
송산이 오랜 세월 쌓아 온 인맥, 그 가공할 만한 인맥들이 진천군에 합류하니 가히 무적이라 할 만한 군단이 탄생한 것이다.
반천련 측에선 기쁨의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일 수밖에 없었다.
이제 그들의 고민은 천상련을 견제할 것인가, 아니면 진천군을 뒤따라 패도맹을 완벽하게 박살내는 데 도움을 줄 것인가였다.
전략적으로 봤을 땐 전자의 경우가 옳았다. 훗날 천하를 도모하기 위해선 천상련을 견제해야 하는 게 맞다. 그리되면 화산의 요새와 패도맹을 깨부순 진천군과 합류하여 천상련을 칠 수 있으니까.
그러나 반천련은 후자를 택하기 위해 논의 중이었다.
천왕 송산에게 더 주도권을 빼앗겨선 안 된다는 계산 때문이다.
송산이 이대로 화산의 요새를 짓밟고 패도맹마저 부순다면, 반천련은 그의 꼭두각시 신세를 면치 못한다.
천하삼세를 천하이세로 만들어버린 그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공을 조금이라도 갖기 위해선 그들 또한 패도맹을 치러 가야 했다.
먼저 도착한다면 더욱 좋았다.
그러나 간부들의 의견은 반반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우선 성천궁과 백월성 계열은 오랜 숙적인 천상련을 견제하길 원했고, 무림맹 계열은 패도맹을 치길 원했다.
성천궁과 백월성 측이 합심하였음에도 반천련 간부들의 의견이 반반인 이유는, 무림맹 쪽이 세력 면에선 더 컸고, 그만큼 간부들의 숫자도 많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서두르지 않았다.
논의 중이라고는 하지만 전자, 후자 중 무얼 선택하더라도 천하패권을 쥔 거나 마찬가지라 여겼기 때문이다.
“패도맹을 친다면 일 년 안에 천하일통도 꿈이 아닙니다.”
“우리가 자리를 비운 사이, 천상련이 우리 구역을 다 장악해 버리면 어찌하오.”
“그래 봤자 잠깐입니다. 패도맹을 부수고 진천군과 합류한 뒤 천상련을 향해 곧바로 진격한다면…….”
대충 이런 식의 논의였다. 그리고 명분은 패도맹을 치자는 쪽에 더 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반대요.”
“허어, 당신은…….”
“그대는…….”
그는 백월성이나 성천궁의 인물이 아니었다. 심지어 무림맹 측의 인물도 아니었다. 그러나 반천련의 인물이었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세 개의 세력이 힘을 합쳐 반천련으로 새롭게 태어난 뒤에서야 초빙되어 온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반천련의 모든 재정을 담당하는 직위, 재부사(財部士) 관홍(貫弘)이었다.
관홍은 청렴결백의 화신이라 할 만큼 꼼꼼하기 그지없는 자로, 대총사인 제갈정오조차 살아생전엔 그의 재무 보고만큼은 듣지도 않고 넘겼을 정도로 믿음이 대단했다.
그런 대총사의 믿음에 비해 그의 권력은 대단치 않았지만, 무공 하나 없는 자가 성품만큼은 대쪽과도 같아서 무시하는 이가 없었다.
천왕 송산마저도 진천군의 군자금을 마련해 달라고 요청할 땐 자세를 낮추어야 했을 정도였다.
공식적으로 그는 반천련의 정식 간부다. 직위만을 보았을 땐 총사 바로 다음의 직위였다.
그저 반천련의 재정을 담당하는 것 빼곤 아무런 권한이 없을 뿐이다. 무시는 당하지 않는 정도랄까?
하지만 그는 무인들은 무인들의 일이, 문사에겐 문사의 일이 있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전통적인 간부 회의에 그가 참석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한데 중요한 회의가 벌어지는 오늘 같은 날, 그가 참석하더니 난데없이 자기 의견을 편 것이다. 그러니 다들 놀랄 수밖에.
“재부사께서 어인 일로…….”
“저 역시 반천련의 간부입니다.”
“음…… 그렇기야 하지만.”
무림맹 측 인사들은 그의 난입에 불쾌한 기색을 내보였다. 그러나 무시하지는 않았다.
관홍이 딱히 큰 권력은 없으나 예산에 관해선 꽉 쥐고 있는 터라, 기분을 상하게 해선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예산을 제때 지급해 주지 않으면 휘하 무사들에게 월봉을 주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리되면 죄 없는 간부는 월봉이 제대로 지급될 때까지 무사들의 불만을 고스란히 들어야 한다.
이렇듯 여러모로 피곤한 인사였기 때문에 간부들은 그에게 예를 다했다.
“재부사께서 의견이 있으시면 말씀하시지오.”
“감사합니다.”
회의를 주최한 백월성의 총사 현룡을 향해 냉철한 인상의 노인은 짧게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그는 짧게 호흡을 들이쉬며 간부들을 돌아보았다.
“여러분은 이 반천련의 한 해 예산이 어느 정도인 줄 아십니까?”
그의 물음에 어느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천삼백만 냥입니다. 천삼백만 냥.”
“그, 그렇구려.”
“그중 칠백만 냥이 반천련을 유지하는 데 들어갑니다. 대충 나열해 봐도 무사들의 밥값, 옷값, 병기, 병기 유지비, 건물 증축비, 수리비, 각 부대의 유지비, 그리고 각 부서의 유지비, 천하 도처에 널린 지부의 유지비, 지부에 딸린 분타의 유지비, 전장에 보급될 보급품 비용 등등등! 그나마 이게 겨우 가장 기초적인, 그리고 가장 우선적인 예산 집행일 뿐, 이 밖에도 무척이나 많습니다. 다 합치면 천삼백만 냥이 훌쩍 넘지요. 못해도 이삼백만 냥쯤은 더 나갈 겁니다. 당연히 적자!”
적자라는 단어에서 관홍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사람들이 그의 말에 놀라고 있을 때, 그가 말을 이었다.
“여러분은 대체 이게 다 어디서 나오는 돈이라고 보시는 겁니까.”
간부들은 알고 있었지만 답하지 못했다. 어느샌가 관홍의 기세에 눌려 버렸기 때문이었다.
“모르시는 듯하니 말씀드리지요. 우선 우리가 직접 관리하는 상가와 상단, 그리고 우리에게 돈을 빌려 주는 상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우리와의 사업을 통해 어느 정도 수익을 보고 그 수익을 우리에게 빌려 주는 것으로 투자를 합니다. 그러니 그들은 딱히 손해를 보진 않습니다. 이게 약 사 할 정도이지요. 그렇다면 나머지 육 할의 예산은 누가 보내오겠습니까? 예, 바로 반천련에 가입된 일천 개가 넘는 방파들과 그 보호 아래 있는 양민들이 십시일반 모아 보내 주는 겁니다!”
“허험, 재부사의 말씀은 잘 알아듣겠소. 한데 이번 패도맹 정벌 건과 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모르겠소이다.”
“허. 정말 답이 안 나오는 양반들이구려.”
그가 어이없었는지 독설을 내뱉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비난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뭣이? 말이 너무 심하구만!”
“돈 놀이나 하는 인간이 천하에 대해 뭘 안다고!”
“내 재부사를 잘못 보았소!”
이러한 비난을 멈추어 준 것은 두 총사, 배환과 현룡이었다.
“일단 재부사 어른의 말씀을 들어 보는 게 좋겠습니다.”
“뭔가 이유라도 있습니까, 재부사 어른?”
관홍은 배환과 현룡을 향해 감사의 표시로 포권을 취하며 입을 열었다.
“여러분이 진천군에 묻어 가기 위해 군을 꾸려 패도맹으로 향한다면 그 피해는 누가 받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간부들은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듯 말이 없었다. 천하일통이라는 단어로 인해 외면하고 있긴 했으나, 천상련의 침공을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관홍이 다시 말했다.
“물론, 이대로 진천군의 뒤를 따라 패도맹을 칠 수도 있겠지요. 천하일통도 꿈이 아닐 겁니다. 그러나 그사이 천상련은 우리 영역 내의 돈이 될 만한 것들은 모두 먹어 치우고 소화까지 시킬 겁니다.”
“힘이 있으니 다시 되찾으면 되지 않겠소?”
누군가 묻자 관홍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반박했다.
“천상련이 바보입니까? 당연히 제대로 남겨 두지 않겠지요. 우리 영역의 방파나 지부, 분타 등은 모두 박살날 것이고, 상단이나 상가의 재산 또한 모조리 빼앗길 것입니다. 천상련에 좀 더 똑똑한 자가 있다면 양민들의 재산까지 털어갈 거요.”
“으음…….”
“영역이야 다시 되찾을 수 있지만 그 복구에 드는 시간과 돈은 기존의 수십 배에 달할 것이고, 게다가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모든 간부들의 눈과 귀는 이제 관홍의 입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설사 진천군과 합류하여 패도맹, 천상련 등을 박살낸다 해도 거기에 남은 게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들이 결사항전이라도 한다면 우리도 피해가 클 테고, 결국 그들을 잡아먹고 천하일통을 해 봤자 우린 빚더미에 빠져 허덕이게 될 겁니다.”
성천궁의 총사인 배환이 나서 물었다.
“그러니까 재부사 어른의 말씀은, 지금 시점에서 우리가 천상련을 견제만 하더라도 손실을 막을 수 있다는 뜻이지요?”
관홍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을 겁니다. 아니, 확실합니다. 뭐…… 천하의 주인이 된다면 빚 따윈 무시할 수도 있을 테지요. 그러나 그만큼 신뢰를 잃을 테고……. 그러고 보니 신뢰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혹시 점령지를 안정화시키는 데 드는 돈이 얼마인지 아는 분 계십니까?”
그가 한쪽 손을 들어 보이며 간부들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를 따라 손을 드는 이는 없었다.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을 이었다.
“적어도 우리 일 년 예산의 두 배는 생각하셔야 합니다. 하나 그때가 되면 우린 이미 신뢰를 잃었을 텐데 누가 돈을 내줄까요? 혹, 빼앗기라도 하실 생각입니까?”
천하를 일통하는 덴 크나큰 명분이 뒤따른다. 그렇기 때문에 극악한 실험으로 마인들을 양산해 내는 천상련조차 갈취는 하지 않는다.
명분을 잃음과 동시에 그들은 그들이 끌어안아야 할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고, 반역의 씨앗을 키우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어도 자신의 영역 안에선 갈취를 하지 않는다. 천하일통이 되어도 마찬가지다.
천상련에 가입한 방파나 상인이라 해서 모두 죽일 수는 없는 노릇.
결국엔 일부를 끌어안아야 한다는 소린데, 힘으로 압박해 금전적인 이득을 취한다면 반골 성향을 키워 주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회의장 안이 조용해졌다.
어느 누구 하나 관홍에게 반론을 제기하는 이가 없었다. 공에 눈이 어두워 크나큰 그림을 보지 못한 것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진천군을 뒤따라 패도맹으로 향한다면 훗날 천하일통을 하더라도 돈 때문에 허리가 휠 테고, 그로 인해 반천련이 다시 쪼개지기라도 한다면 천하일통 따위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일이 되고 만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간부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어느 순간 침묵이 깨지고 회의는 다시 시작되었다.
“음, 그렇다면 역시 천상련을…….”
“재부사의 말도 일리가 있소…….”
“그리되면 그 책임을 누가…….”
패도맹을 치러 가자던 무림맹 측 간부들마저 관홍의 의견에 동조할 정도였다.
회의가 다시 시작되자 재부사 관홍은 한 고비 넘겼다는 듯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한숨을 푹 내쉬며 회의장을 벗어났다.
관홍 덕분에 그날 회의장에선 천상련의 견제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결국 반천련은 진천군을 쫓지 않고 천상련의 움직임을 견제하는 데 전력을 다하기로 뜻을 세운 것이다.
그날 이후 반천련은 천상련의 움직임을 철저히 봉쇄했다. 특히 화산의 요새를 지키기 위해 정예 부대를 파견하려던 그들은 반천련의 천중팔성과 그들이 이끄는 팔천 무사들에 의해 뜻을 이룰 수 없었다.
밀고 밀리는 접전 중인 전장이 여럿 생겨났지만 관홍의 예견대로 경제적 손실은 크지 않았다.
* * *
“천왕의 군대는 화산의 코앞에 도달하였고, 반천련은 천상련을 막고 있답니다.”
마영의 정기 보고에 적제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아깝게 되었군. 바보짓을 해주었으면 우리가 편했을 텐데.”
“어쩔 수 없지요. 그건 그렇고, 역시 그 계책을 사용하시는 겁니까?”
적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큰 도박이긴 하지만, 성공만 한다면 우리의 승률은 생강시가 있다 해도 오 할 이상은 될 테니까.”
“정말이지…… 주사위에 목숨 거는 도박사도 하지 않을 짓을 터무니없이 하시는군요.”
“그럼 어떡하겠나? 잘못하면 다 망할 판인데, 발버둥치기라도 해 봐야지. 그리고…… 그쪽은 우리의 특성을 모르니 성공할 확률이 높아.”
마영이 입맛을 다시며 수긍했다. 확실히 패도맹은 천하삼세라 부를 만한 거대 방파치고는 굉장히 이상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 같은 특성은 아직까지 남들에게 알려진 적이 없었다.
적제가 즐거운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했다.
“자, 이제 시작해볼까? 천하제패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