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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향-174화 (174/217)

검향 174화

사백 년, 아니 반선이 되기 전의 인생까지 더하면 오백 년이 넘는 인생 동안 이런 여자는 처음이었다.

어떠한 도사도, 아니 심검지경에 달한 고수도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축지였다.

무공이나 기문둔갑과 같은 인간의 비술이 선술(仙術)이라 부를 만한 경지에 도달해야 얻을 수 있는 축지이건만, 그런 것을 너무 많이 봐서 질렸다고 하니 황당할 수밖에.

“그, 그럼 비라도 내리게 할까?”

그의 말에 그녀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농담도 잘하셔. 이렇게 마른하늘에 무슨 수로? 기우제라도 지내게요?”

“정말이야! 할 수 있다구! 호풍환우(呼風喚雨) 몰라? 호풍환우! 축지보다 더 쉬워.”

“아, 예에~ 그러시겠지요. 예에~ 예.”

정말 얄밉다. 여자만 아니었으면 한 대 팼을지도……. 그러나 여자를 직접 패는 건 그의 신념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에잉!”

빈정 상했는지 귀면호리는 고개를 홱 하고 돌려 버렸다.

“엇? 삐쳤다!”

“무, 무슨! 본좌를 뭘로 보고!”

“에이, 삐친 거 같은데요.”

“안 삐쳤다, 안 삐쳤어!”

추연희는 그런 귀면호리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알았어요, 믿어줄게요. 근데 우리 언제까지 가야 해요? 그냥 천상련에 가면 련주를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더니…….”

그녀의 물음에 귀면호리는 볼을 긁적이며 답했다.

“그게…… 전에도 말했지만 그놈은 너무 오래 살아서 약간 이상해져 버렸다고……. 너무 외로움을 많이 탄 나머지 한~ 이십 년쯤 남의 제자로 살아가며 사부와 제자 간의, 사형제들 간의 유대감을 느끼는 걸 좋아하게 됐거든……. 지금은 누구의 제자인지 알 수가 없군. 그래서 녀석의 기운을 쫓아가느라 오래 걸리는 거야.”

“무슨 그런 사람이 다 있어요?”

추연희가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리자, 귀면호리는 씁쓸한 미소로 말을 이었다.

“어쩔 수 없어, 그와 나처럼 불사(不死)하는 반선지경의 인간은 신선이 되지 못하는 이상 세월의 힘 앞에 무력해. 몸은 그대론데 정신은 자꾸 늙어 가거든. 수많은 정인들의 죽음도 지켜봐야 하고……. 그러니 그렇게라도 유희를 통해 자기 정신을 보호하는 거야.”

“반선지경이면 반은 신선이란 거 아닌가요? 그런 위대한 존재가 미칠 수도 있어요?”

그녀의 말에 귀면호리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반선지경은 이름 붙이기 좋아하는 자들이 붙여 놓은 허울 좋은 껍데기 같은 거야. 그저 인간이라면 노력 여하에 따라 도달할 수 있는 경지 중 하나일 뿐인데, 불사하니까 반선이라고 이름 붙여 준 거지. 나만 해도 오랜 세월 동안 나쁜 짓을 많이 했지만 인간에 의해 번번이 실패했어. 반선이라 해도 인간 입장에선 충분히 퇴치 가능한 괴물 정도랄까? 불사라든가 축지라든가, 신선을 흉내 낸 강력한 비술들이 있긴 하지만 순수하게 무력만을 따진다면 육왕칠사급이지. 그중에 천왕 송산처럼 최강의 고수를 만나기라도 하면 끔찍하게 살해당하고 한 십 년쯤 뒤에 부활할 테고.”

그의 설명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반선이라 해서 대단한 건 아니라 이거군요.”

“그, 그리 섭섭한 소리를……. 무인들에게 심검지경이 궁극의 경지라면 도사나 불자 같은 수행자들에겐 반선지경이 궁극의 경지라고!”

“궁극의 경지라면…… 신선이 아닌가요?”

그녀가 또 묻자 귀면호리는 살짝 지치는 걸 느꼈다. 정말 호기심이 많은 여인이군,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는 그녀가 가진 편견을 없애 줘야 한다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게다가 그녀가 여행이 지겹다고 징징대는 소리를 듣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렇게 질문이 많은 것이 더 나았다.

“진짜 신선은 상상도 못 할 만큼 대단한 존재지. 하나 그게 궁극의 경지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답할 수밖에 없어. 그곳에 도달하려면 노력도 노력이지만…… 운이 더 중요하거든.”

“운이요?”

“그래, 그야말로 하늘의 선택을 받았다고 해도 좋은…… 그런 운. 때문에 운이 없으면 선체를 이룬다 해도 신선이 될 수 없어.”

“선체는 또 뭐예요…….”

“음, 도사의 예를 들어, 도사가 신선이 되기 위해선 선근이나 선골이 필요하지. 둘 중 하나만 있으면 선체라고 해. 한데 선체를 타고나는 자들이 많지 않아. 전생과 현생에 쌓인 업이 선체를 이루는 걸 방해하니까. 그래서 도사의 수행은 어떻게든 업을 씻어내고 선체를 얻기 위한 수행이라고 봐야 해. 때문에 어떤 이는 평생 선근을 얻지 못하고 죽을 때도 있고, 어떤 이는…….”

귀면호리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자신의 과거를 떠올린 탓이다, 수행에 열중하고 절망하기를 반복하던 그때를…….

“왜 말을 멈춰요?”

“아, 그래. 어떤 이는 선근이나 선골을 노력 끝에 얻지만…… 그게 다야, 우화등선에는 이르지 못해.”

“왜요? 애써 선체를 얻어 놓고서…….”

귀면호리가 한숨을 쉬었다. 그는 평소의 장난기 넘치던 얼굴과 달리 무거운 표정이었다.

“지쳐 버린 거지.”

“지쳐요?”

“그래. 보통 사람이 선체를 얻으려면 엄청난 노력과 깨달음이 필요한데, 그게 가히 살을 깎는 노력이야. 태생적으로 선근이나 선골을 지닌 자가 그만큼 노력했다면 대신선이 될 정도로. 근데 보통의 수행자가 선체를 얻고 나면 그 노력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해. 지치지 않겠어?”

“시작점이 다르다 이거군요.”

“그래, 게다가 모두 신선이 되는 것도 아니야. 보통 사람이 선체가 아니라는 건 업이 깊이 쌓였다는 것이니까. 애써 업을 씻고 선체을 얻고, 다시 노력해서 우화등선하려 해도…… 정작 하늘에선 자격이 아니라며 받아 주지 않는 경우도 있어. 수행을 통해 씻었다 해도 그 업이 어디 가는 건 아니니, 그냥 이번 생은 뒈져 주시고 다음 생에 도전하라는 거야.”

“우와! 쪼잔하다!”

그녀의 한마디에 귀면호리는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한때 기회를 주지 않은 하늘을 원망하여 타락했다.

뭐, 반선지경에 이르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겪는 과정이었다.

개개인마다 각성의 원인은 다르지만 그의 경우, 죽음을 앞둔 상태에서 느낀 하늘에 대한 절망감과 분노가 불사의 저주라는 반선지경에 이르게 한 것이다.

선체를 얻었으나 신선이 되지 못한 이가 반선지경에 도달하는 경우, 생살이 수십만 마리의 개미에게 물어뜯기는 고통을 몇 달 동안 감내해야 한다.

대부분의 수행자는 이 각성의 과정에서 죽고 만다. 그러나 귀면호리는 하늘과 세상에 대한 증오를 원동력으로 삼아 그 고통을 견뎌내고 반선이 될 수 있었다.

한데 눈앞의 여인은 귀면호리 자신이 평생 원망하고 증오했던 것들을 단 한마디 말로써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렸다.

“쪼잔하다니…….”

보통 사람에게야 하늘은 그저 하늘일 뿐이나, 세상의 이치를 공부한 수행자들에겐 눈에는 보이지만 갈 수 없는 달과 같은 존재였다.

그러한 것을 그저 쪼잔하다는 한마디로 정의하다니……. 이에 황당해 하면서도 수긍하는 자기 자신에게 또 한 번 놀라는 중이었다.

수백 년간 하늘에 대해 고민해 왔던 것이 단 한마디로 명쾌히 해결되어버리다니.

그렇다고 무슨 거창한 깨달음이 찾아와 우화등선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저 하늘에 대한 증오가 조금은 풀렸다고나 할까?

이는 철딱서니 없고 변덕이 심한 어린애에게 계속 화를 낼 수 없는 노릇과 마찬가지였다.

“허…… 허허허허허허…….”

“뭐예요, 할아버지처럼 웃다니.”

그녀의 물음에 순간 흠칫한 귀면호리는 웃음소리를 바꾸며 해명했다.

“하하하하하하. 아니, 아니야. 그냥 모든 게 우스워져 버려서 말이야.”

“참 실없네요. 하여튼 빨리 가자구요. 배고프니까.”

“에? 좀 전에 멧돼지 구워 먹었잖아.”

“몰라요. 자꾸 배가 고프네요. 다음 마을에 들르면 상다리 휘어지게 시켜 먹어요, 우리.”

“……돈은 누가 내고?”

“당연히 아저씨죠!”

“아저…….”

세기의 초절정 미남인 자신을 아저씨라고 하다니, 조금 기분 나빠지는 귀면호리였다.

‘그래, 마공에 인격이 침식당하고 있으니 머리에 꽃 단 광년이가 되는 것도 시간문제지. 그래서 눈깔이 삔 걸 거야.’

이런 생각이 들자 화가 자연스레 풀렸다. 그가 말했다.

“그래도 액면가는 추 소저랑 동갑으로 보이는데 아저씨라 부르면 안 되지.”

“왜 안 돼요. 자기가 수백 년을 살아온 반선이고 호풍환우할 줄 안다고 자랑한 게 누군데. 아님 그냥 영감님이라 부를까요?”

영감님이란 단어에 귀면호리가 정색하며 말했다.

“편하신 대로 부르십시오.”

* * *

진천군의 진격은 무거웠다.

일만에 달하는 최정예 고수들이 경공도 펼치지 않고 아주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혈월의 백랑전과 북해빙궁의 선발대가 종종 앞서 나가 동향을 살피긴 했으나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 세력은 없었다.

아니, 있기는 했다. 천상련의 세력권인 화산이 가까워지면서 그들의 마인들이 정탐을 해 오고, 간혹 습격도 해 왔다. 그러나 어떤 귀계와 음모도 그들의 상대는 될 수 없었다.

모든 것을 찍어 누르는 압도적인 힘 앞에 전략과 전술과 같은 지혜는 쓸모없었다.

그들의 진격은 그야말로 파격.

패도무쌍(覇道無雙)이란 말의 진의를 세상에 널리 알릴 만큼 막강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그들의 진격은 무거웠고 또 느렸다. 평범한 양민들에 비하면야 빨랐으나, 문제는 구성원들 중 고수가 아닌 이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 집단이 이리도 느린 이유는 아주 천천히, 그러나 편집적이라 할 만큼 꼼꼼하게 탐색을 거듭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탐색이란 바로 천상련이나 패도맹에 조금이라도 협력한 자들을 놓치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

이미 진천군이 시작될 무렵부터 살생부는 존재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들이 지나는 곳 주변 사방 일백 리 인근의 무림 방파와 상가 중 천상련과 패도맹에 한 번이라도 발을 걸친 자들을 모조리 징벌했다.

말이 징벌이지 그것은 학살이었다.

살생부에 오른 이는 어느 누구도 살아남지 못하였다.

무거운 추가 깊은 수면 아래로 천천히 가라앉듯, 그들은 멈추지도 느슨해지지도 않았다.

그저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며 끊임없이 죽이고 또 죽일 뿐이었다.

* * *

반천련 내부, 성천궁의 성역.

그 성역에는 성천궁의 세 마리 요귀라 불리는 삼기(三記)가 살고 있었다.

셋 모두 뼈에 살점만 발라 놓은 듯한 앙상한 몸으로 좌선을 하고 있었는데, 한 명은 눈꺼풀을 꿰매고 또 하나는 귀를, 다른 하나는 입술을 꿰맨 형상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앉아서 천 리를 본다는 이 요귀들은 셋이 하나인 듯 기억을 공유했고, 생각 역시 나눌 수 있었다.

-드디어 패도와 패도가 부딪치는가.

귀를 막은 자, 이부(二不)가 생각했다. 그러자 입을 막은 자, 삼로(三老)가 동의했다.

-천명을 부여받은 자와 천명에 가까운 자의 대결.

-송산, 그자는 천명에 가장 가까웠지. 적제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천하를 얻은 자는 그였을 터.

다시 귀를 막은 자였다. 하나 눈을 막은 자, 일모(一母)가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하나 적제는 패도의 운명을 부여받은 자. 송산이 제아무리 강한 패도를 지니고 있다고는 하나 운명을 얻지는 못했다. 하늘은 적제를 택했다.

-비록 천명을 얻지 못했으나 송산은 타고난 패기를 갈고닦아 하늘을 감복시킨 위대한 별. 때문에 운명이 어떻게 흐를지는 알 수 없다. 우리의 예지력이 발휘되지 않는 것이 그 증거.

입을 막은 자의 의견이었다.

얼마 안 있어 세 요귀는 의견을 하나로 모을 수 있었다.

언제나 그래 왔듯 그저 지켜보자는 것이었다. 운명이 절대적이지만은 않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시각.

반천련의 수뇌부는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아니, 고민이라기보다는 너무 기쁜 나머지 잔치라도 벌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조용히 살던 거인, 이름만 빌려 준 련주라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련의 일엔 거의 신경 쓰지 않던 천왕 송산 때문이었다.

그 한 명 나섰을 뿐인데 천하삼세에 버금가는 강력한 군단이 하나 탄생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서 반천련의 힘이 줄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백월성의 백랑전과 벽월인이야 본래 잘 나서지 않는 집단이라 전력 외의 존재였고, 성천궁의 생강시 2백 구는 존재조차 확신하지 못하고 있던 이들이다.

반천련 소속 방파들에서 차출된 이들도 그리 많은 수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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