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향 173화
하지만 그들 중에는 평생 소집령을 받지 못하다가 제자나 자식의 대에서 소집령이 떨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정보를 수집하는 요원들도, 각 방파에 침투한 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번 대의 검주인 적운은 이 같은 구조에 대해 변화의 필요성을 느꼈다. 자신의 대에서 천검 무사들의 희생이 너무도 컸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사들의 실력이 모자라거나 적운이 모자라서가 아니었다. 그저 악(惡)이 더 강해진 것뿐이다.
적운이 느끼기에 악은 점점 더 강성해져만 가는데 천검단은 제자리걸음이었다.
때문에 차라리 힘을 제대로 끌어모아 뭉치는 것이 헛된 희생을 막는 길이라 여겼다.
그런 의미에서 패도맹은 아주 좋은 울타리가 되어주었으며, 힘을 키우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여건을 제공해 주고 있었다.
게다가 진천군의 침공은 모든 천검 무사들을 끌어모으는 명분을 제공해 주기까지 하였다.
그 덕분에 패도맹 내부의 조직, 그리고 가입된 방파를 통틀어 단번에 최대의 세력으로 떠오를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정보를 모으는 데는 신안보다 뛰어났고, 숨어 살던 무사들까지 합류하니 그 숫자만도 일천이 훌쩍 넘었다.
이는 패도맹 총 전력의 1할에 해당했다.
패도맹의 일개 조직이 이런 거대한 힘을 품고 있음에 여러 간부들은 우려를 표명했지만, 웬일인지 적제는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
패도맹의 맹주가 기거하며 집무를 보는 맹주전.
집무실에서 자신의 주군을 올려다보는 중이던 천검각주 적운의 얼굴은 아쉬움으로 가득했다.
그런 그를 향해 적제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상당히 아쉬운 표정이로군. 마치 정인을 멀리 떠나보내는 사람 같아.”
“휴. 농담 마십시오, 주군. 마음 여린 소공께서 혹시나 다치지나 않을까 걱정되어서 그렇습니다.”
적운은 천검각주가 된 후에 초운의 과거를 모두 알아내고 말았다.
더군다나 마인이 되어버린 동문 사형을 죽이기 위해 용담호혈이나 매한가지인 화산으로 떠나야 할 상황이니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너무 걱정 말게, 저놈이 함께 가 준다고 하니.”
적제가 턱짓으로 집무실 한편에 서서 창밖을 바라보던 거구의 사내를 가리켰다.
적운은 적대감 가득한 얼굴로 거구의 사내를 한 번 쏘아보더니 다시 적제를 향해 말했다.
“저자는 맹의 인물이 아닙니다. 게다가 육대세가 출신이 아닙니까, 소공을 사냥하던…….”
“저 녀석의 산동악가는 거기 연루되지 않았다네. 엄밀히 따지면 산동악가를 제외한 오대세가가 벌인 일이지.”
그 정도는 적운도 이미 확인했다. 그러나…….
“그래도 그는 믿을 수 없습니다.”
“저놈도 화산파의 제자일세.”
불신의 틈을 비집고 들어온 적제의 한마디가 적운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화산파라는 이름이 가진 의미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종의 벽이었다.
화산의 제자가 아니고선 알 수 없는 거대한 벽의 너머. 그들 사이에서만 느낄 수 있는 동질감과도 같은 것.
적운으로서는 평생 알 수 없는 것이었다.
“휴…… 알겠습니다.”
그리 대답한 적운은 다시 한 번 거구의 사내를 흘겨보았다. 암만 봐도 자신보다 하수가 아니었다.
게다가 산동악가가 자랑하는 전설적인 흉견(凶犬)들인 추혼탈명대(追魂奪命隊)를 이끌고 있다 하였다.
추혼탈명대.
말 위에 오르기만 하면 일기당천이란 단어의 끝을 보여 준다는 집단전의 달인들.
개개인의 무공 또한 낮지 않아서 말 위에서든 말 아래서든 제 몫은 충분히 하고도 남는 자들이다.
그렇게 초운을 호위하기엔 충분한 경력이었지만, 적운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무엇보다 다음 대의 주군이 될 이를 남의 손에 맡겨야 하는 것이 분했다.
그와 천검단은 적제의 신념에 반해 따르기로 하였다.
적제의 신념은, 그리고 계획은 정의와는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악하지는 않았다.
일종에 하얀 백지와도 같달까?
그가 이룬 세상 위에 무엇을 그리느냐에 따라, 무엇을 채워 넣느냐에 따라 정의로운 세상이, 혹은 지옥이 그려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적운은 그 가능성에 모든 것을 걸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을 위해선 초운과 같은 선한 자가 적제의 뒤를 이어주어야 했다.
적제와 같은 패왕은 평화롭고 정의로운 세상에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토록 소중한 소공의 안위를 타인에게 맡길 수는 없었다.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적제가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당가의 바보는 뭘 하고 있나?”
“아, 그자는 짐꾼으로 쓰고 있습니다.”
적운의 대답에 적제가 무릎을 치며 기뻐했다.
“그것참 마음에 드는구만.”
* * *
“빨리빨리 못 움직여?”
천검각의 부각주 벽호가 한 사내를 향해 호통을 쳤다.
그러자 식량을 수레에 싣던 사내들 중 하나가 수치스럽단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제길…… 내가 어째서 이런 꼴을…….’
그러나 입술을 깨물어도 벽호의 호통은 멈추지 않았다.
“늦으면 늦을수록 네놈 평가서엔 좋지 않은 내용이 추가되겠지. 그리되면 애써 백의종군까지 한 의미가 없을 거야, 아마.”
그의 호통에 입술을 깨물던 사내의 몸이 분주해졌다. 사내의 이름은 당철로, 당가주의 장남이자 패도맹에선 꽤 높은 직위의 무사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얼마 전 있었던 검마와의 사건으로 인해 모든 직위를 해제당하고 간신히 목숨만 건진 채 패도맹의 최말단 무사로 짐이나 나르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가 일으킨 사고에 비하면 벌이라 할 수도 없었다.
그가 검마 하나 잡겠다고 면양(綿陽)에서 팔백여 명이 넘는 양민들을 희생시킨 일은 죽음으로 갚아도 모자란 죄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이란 형벌 대신 말단 무사로 백의종군하고 있는 것은, 때가 때이니만큼 패도맹에서 당가의 비위를 맞춰 주기 위함이었다.
게다가 양민의 희생을 낳았던 계략도 그의 머리에서 나온 거라기보다 조력자인 남궁도의 계략이었기에 참작된 점도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러나 자존심 강한 당철에겐 이마저도 굴욕적이었던 터라 처벌의 의미가 퇴색되지는 않았다.
그는 말단 무사로 재직하는 동안에는 어떤 것에도 불평불만을 늘어놓을 수 없고, 누군가를 하대하거나 욕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앞으로는 어떤 공을 세우더라도 지금 이상의 직위를 가질 수 없었다.
패도맹 내에서의 출셋길이 완전히 막힌 것이다.
집법부에선 그런 그를 천검각에 배치시켰다.
패도맹 내부의 어떤 조직도 천검각처럼 객관적일 수 없기 때문에 취한 조치였다.
다들 어떤 식으로든 당가와 인연을 맺고 있기에 당철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반면, 천검각은 어느 파벌에도 속하지 않고 자신만의 세를 구축하고 있으니 당철을 벌주기에 이보다 더 좋은 환경은 찾기 힘들었다.
실제로 각주인 적운 앞으로 당가에서 꽤 많은 뇌물을 보내왔으나 모두 돌려보낼 정도였다.
그런데다 면양에서 희생자들의 시신과 난민들의 눈물을 직접 목도한 이가 바로 적운이었다.
정의를 병적으로 신봉하는 그에게 있어서 당철은 악인이나 다름없었던 터라, 특별히 부각주인 벽호에게 처벌에 대한 모든 것을 일임시킬 정도였다.
벽호는 그런 그의 의중을 알아채고 당철을 열심히 굴리고 있는 중이었다.
사실 당철의 출셋길이 막혔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패도맹에 한정된 것일 뿐, 당가로 돌아가 차기 가주로서 편히 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패도맹이라는 권력의 중추를 포기할 수 없었는지 끝끝내 백의종군을 받아들이고 말단 무사가 된 것이다.
패도맹의 후계에 도전하던 자가 하루아침에 짐이나 나르는 말단 무사가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그는 굴욕을 감수하기로 마음먹었다.
‘젠장! 제길! 기필코 재기하고 말 테다.’
“어라? 설마 너 또 딴생각하냐? 손이 느려졌잖아!”
벽호의 호통에 화들짝 놀란 당철이 이마에 흐르던 땀을 닦으며 열심히 손을 움직였다.
‘두고 보자! 두고 보자고!!’
마음속으로 눈물을 흘리는 당철이었다.
* * *
저 멀리 패도맹의 성채(城砦)가 보였다. 그동안 기력이 더 쇠약해진 건지 초췌해 보이는 사내 곽호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패왕이 천명을 따라 움직이는가? 그렇다면 번천지계를 시작할 수 있겠군. 후후…….”
그러자 그의 그림자 속에서 한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랑산에서 천응과 제갈청의 시신을 흡수하여 그 능력을 취했던 청년은 몸에 활력이 가득해 보였다.
점점 죽어 가는 듯한 곽호와 생동적인 청년. 그러나 둘은 어딘지 모르게 닮아 보였다.
“왔느냐?”
“네, 사부.”
“……곧 일계(一計)를 시작해야 할 때다. 너는 이 길로 이계(二計)를 위해 떠나거라.”
“알겠습니다. 그런데…….”
“뭐냐.”
“본래 없어야 할 진선(眞仙)의 선체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계는 필요 없는 것이 아닌지.”
곽호가 서늘한 눈빛으로 청년에게 말했다.
“이계가 필요 없어지면 너도 필요 없어진다.”
“알고 있습니다.”
청년은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죽음과 가장 가까운 그는 죽음을 안식으로 여긴다. 때문에 곽호의 살기에도 반응이 없었다.
“선체가 존재한다고 해서 그 아이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그러니 본래의 계획대로 진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 어렵습니까?”
“어렵지는 않다. 단지…….”
곽호는 잠시 하늘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하늘의 의도가 염려되어서이다, 하늘의 의도가…….”
문득 증오가 피어올랐다. 감정이 메말라 점점 인간에서 멀어지는 중인 그였으니, 증오라는 감정을 반겨야 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하늘을 향한 증오는 메아리나 다름없다. 목표가 없는 증오는 스스로를 갉아먹을 뿐이다. 그런 것은 그도 원치 않았다.
증오를 애써 누른 그가 청년을 향해 말했다.
“너는 생각하지 말거라, 생각은 내가 할 테니……. 넌 그저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곽호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청년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곧 모습을 감추었다.
홀로 남은 곽호의 한숨이 바람결에 녹아들었다.
二章
인형사 천응에 의해 현천마녀의 불완전한 마정을 몸으로 받아들이고, 마라검이라는 희대의 마공까지 익혀 버린 추연희는 인성이 파괴되는 부작용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이가 있었으니, 바로 소월이라는 이름의 청년이었다.
그는 오래전 도를 닦는 선인의 몸으로 타락하여 반선이 되고 말았다는 허무맹랑한 과거를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이 천상련의 호법신마 중 서열 2위인 귀면호리라나?
물론 그녀는 그가 하는 말들을 다 믿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에게 걸린 마공의 부작용을 고쳐 줄 수 있다고 하기에 함께하는 것뿐이었다.
“정말 천상련주랑 아는 사이 맞아요?”
벌써 두 달째 여행 중이라 지쳐 버린 추연희의 물음에 소월이 가슴을 두드리며 답했다.
“당연하지! 그와 나는 의형제 사이니까.”
“……아무리 봐도 허풍 같아. 그쪽에선 의형제라 생각하지 않는데 소월 님 혼자서만 그리 생각한다든가…….”
“정말이라니까! 분명 그 자식은 내 의형제라고! 안 그럼 나를 왜 호법신마로 영입했겠어?”
“글쎄요. 전 당신이 귀면호리라는 것도 믿기가 어려워서…….”
그가 이마에 핏줄을 세우며 흥분하기 시작했다.
“아오! 정말 왜 이래, 이거. 축지 한 번 더 보여줘? 앙?”
“됐어요. 그것도 이젠 질리는구만.”
“헐.”
소월, 아니 귀면호리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