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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향-171화 (171/217)

검향 171화

같은 시각 성천궁.

총사 배환이 그 뱀 같은 혀로 성천궁의 삼기(三記)들을 설득 중이었다.

궁주는 이미 설득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이들 세 요귀의 동의 없이는 중요한 연구 성과를 바깥에 선보일 수가 없었다.

“불길한 징조가 보이더군.”

뼈다귀에 살만 발라 놓은 듯, 앙상한 몰골로 좌선 중인 그녀는 예지력을 지키기 위함인지 눈꺼풀을 실로 꿰매 놓았다. 그리고 그것은 삼기의 다른 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일모님, 양자를 잃은 송산이 크게 분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의를 보이지 않는다면 그의 분노는 우리에게로 향할 것입니다. 지금 그는 천왕이 아니라 패왕입니다.”

그러자 일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는 패왕이지……. 그러나 하늘이 내린 패왕은 아니야.”

“예? 무슨 말씀이신지…….”

“패기는 있으나 천명은 받지 못했다는 뜻일세.”

“어쨌든 우리는 참여해야 합니다. 안 그럼 다 죽습니다.”

“…….”

일모는 잠시 침묵했다.

그녀의 예지력은 암시성이 강하다.

결코 다 보여 준 적이 없다.

단편적인 암시를 보고 추측을 해야 한다.

때문에 절대적일 수는 없다.

해석하는 이가 틀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예지로 본 불길한 징조.

그것을 해석할 능력이 그녀에겐 없었다.

아니, 이미 천왕 송산이라는 거대한 별이 움직여 버린 이상, 예지가 어느 쪽으로 흘러가 버릴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번 전쟁을 통해 진짜 패왕이 가려진다는 것이다.

“생강시들을 허가하지. 그 숫자 또한 제한은 없네.”

“헉!”

배환이 깜짝 놀라 숨을 들이켰다.

기껏해야 이전에 제갈정오에게 지원해 주었던 실혼인들을 허락할 줄 알았다.

그런데 그보다 세 단계나 높은 생강시들을 허락해 주다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생강시란 살아생전 절대고수였던 자들을 강시로 만든 것.

그것도 여러 세대에 걸쳐 고수들을 모아 만든 것이다.

그들 대부분은 생전의 전투 능력을 그대로 보유하고 있고, 타인의 선천지기를 흡입하여 재생력을 늘릴 수 있으니 수명에도 문제가 없었다.

성천궁이 삼백 년 동안 절대고수의 시신을 모아 만든 생강시의 숫자는 모두 이백.

그들 모두가 진천군의 돌격대에 속하게 되었다.

송산이 최고를 원한 곳은 비단 성천궁과 백월성만이 아니었다.

북해의 빙궁에서도…….

해남도 십사개검류의 연합인 해남검문에서도…….

남만의 백독문에서도…….

천왕 송산이 보낸 사신단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들 거대 방파 모두가 천왕의 진천군에 최고의 정예들을 합류시켰다.

난세의 시작이었다.

* * *

귀면호리가 문득 밤하늘의 천문을 읽다 숨을 들이켰다.

“흐음~ 좋은 향기로군.”

“킁킁! 난 아무 향기도 안 나는데 뭐예요? 어디 아파요?”

추연희가 여기저기 냄새를 맡으며 관심을 표했다.

“하하하. 난세의 향기란 아녀자가 맡을 수 있는 게 아니지.”

그의 말에 추연희가 조용히 주먹을 들어 올렸다.

“농담이었습니다아~”

* * *

패도맹에 비상이 걸렸다.

오랫동안 침묵해 온 반천련의 거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그냥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역대 최고의 군대를 조직할 것이고, 그 첫 번째 목표가 패도맹이 될 거라는 것이다.

당연히 난리가 날 수밖에 없었다.

패도맹에 소속된 방파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관리해야 했고 양민들도 전쟁 소식에 두려워하지 않게끔 안심시켜야 했다.

초운은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자책감 따위는 아니었다.

제갈정오가 죽은 것 자체는 자업자득이라 할 수 있었다.

남을 죽이려 하는 자는 무덤을 두 개 파야 하듯, 그는 스스로 무덤에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의 죽음이 전쟁의 시발점이 되는 건 곤란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게 될 것이 명확하였기 때문이다.

초운은 오랜만에 적제의 집무실을 찾았다.

“사부님.”

“왔느냐?”

사부는 여전했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더 여유로워 보였다.

도저히 전쟁을 앞두고 있는 사람으론 보이지 않았다.

“직접 출정하실 건가요?”

“어떻게 안 게냐?”

“검을 닦고 계시니까요.”

사부는 기쁜 듯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래, 그쪽에선 꼬부랑 노인네가 친히 나오시는데, 이쪽의 수장인 내가 후방에 있는 건 예의가 아니지.”

“천왕 송산…… 육왕칠사의 최고수라고 들었어요.”

“상관없다. 내가 전쟁에서 패배할 일은 없으니까.”

“하지만…….”

적제가 부드럽게, 하지만 조금 엄한 말투로 제자의 염려를 가로막았다.

“너는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지켜만 보아도 좋아. 네게 너의 길이 있듯, 이 사부에게도 길이 있음을 알아다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스승은 ‘전쟁’에선 패배하지 않는다.”

초운이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 비정해 보이기까지 하는 패기는 온데간데없다. 그것은 사랑하는 제자의 앞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이 오히려 패왕이라는 별명에 어울렸다.

이는 그가 자신의 패도를 제어하기 시작했음을 뜻했다.

패도는 폭군이기도 하지만 모든 것을 포용하는 성군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둘을 적절히 받아들이는 자가 진정한 왕이 될 수 있다.

문외한인 초운이 보기에도 지금 그의 스승은 제왕의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초운은 희미하게 웃으며 집무실 밖으로 나왔다.

그곳엔 마영이 기다리고 있었다.

초운이 멋쩍게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즐거우신 것 같아요.”

“소공의 사부님께선 전쟁을 사랑합니다. 새외에선 전신(戰神)이라 불리신 적도 있었지요.”

“전신이요?”

“네, 쑥스러워 하시지만 사실입니다.”

잠시 웃던 초운이 약간 시무룩한 얼굴로 마영에게 물었다.

“……이길 수 있겠지요?”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

마영이 집무실 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주군께선 결코 소공을 혼자 두실 분이 아니라는 거지요. 천하가 인정하는 팔불출이시지 않습니까.”

이에 초운이 입을 막고 웃었다.

집무실 문쪽에서 ‘다 들린다…….’라고 하는 사부의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마영이 그를 향해 다시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우리가 이깁니다. 이길 수밖에 없습니다.”

“네, 믿을게요.”

그렇게 인사를 하고 다시 걸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 마영의 목소리가 초운의 발을 잡았다.

“저…… 소공.”

“네?”

“그는…… 천응은 죽었습니까?”

의외의 인물에게서, 의외의 질문이었던 터라 초운은 당황하였다.

“네? 아…… 네.”

“제갈청과 함께였나요?”

“네, 함께였어요.”

초운의 대답에 마영은 명복을 빌 듯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초운이 그에게 물었다.

“아는 사이셨나요?”

“아주 예전에 조금…….”

그리 대답한 그는 초운에게 목례를 하고 등을 돌려 맹주 집무실의 문고리를 잡았다.

‘천응 형님, 내세엔…… 평범한 농부로 태어나 편안히 사세요.’

* * *

“절대…… 절대 나오면 안 된다. 알았지?”

“혀, 형!”

마영은 자신을 무서운 눈으로 바라보는 사촌형 천응을 불렀다.

부모가 없어 가문에서도 천덕꾸러기가 되어버린 자신을 위해 늘 힘써 주던 형이었다.

친형처럼 따르던 형이, 지금 자신의 가문을 멸문지화로 몰아넣고 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형…… 왜 형, 누나들을 다 죽이고…… 어째서…… 왜…….”

천응은 마영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그저 다급한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며 자기 할 말만 했다.

“사부가 오기 전에 널 숨겨야 했어. 시간이 없으니 아무것도 묻지 말고…… 그저…… 살아줘. 그리고 미안해. 안녕.”

짧은 작별인사와 함께 천응은 결계를 발동시켰다.

그의 진법결계는 대단해서 제아무리 신동이라 불리는 마영일지라도 쉽게 풀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결계가 소리까지 막아 줄 순 없었는지 친족들의 비명이 마영의 귀를 괴롭혔다.

그렇게 두 시진이 지나고 비명은 잦아들었다.

이제 겨우 여덟 살인 마영이었지만 침착함은 어른 못지않았다. 괜히 신동이라 불린 것이 아닌 것이다.

마영은 곧 자길 가둔 진법결계의 구조에 대해 파악하기 시작했다.

과연 천응의 결계는 수준이 높았다.

무려 하루 동안 고생하고 나서야 결계를 풀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계가 사라지고 눈앞에 들어온 것은 폐허로 변한 가문뿐이었다.

같은 성씨를 쓰는 친척들도 고용된 식솔들도, 모두 죽어 있었다.

마영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이젠 정말 혼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하늘 아래 혼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 * *

반쯤 타다 만 전각들 안에서 책 몇 권과 녹다 남은 금자, 그리고 약간의 옷가지를 봇짐에 싸서 가슴에 품은 마영은 제갈가의 정문 앞에 서서 장원 방향으로 큰절을 올렸다.

“제가 힘이 없어 묻어드리지 못했어요. 하지만…… 꼭 나중에 와서 모두에게 제를 올릴게요.”

그 후로 마영은 20여 년을 떠돌았다.

그가 무림맹의 귀주 지부에 몸을 의탁한 것은, 떠도는 것이 조금 지겨워질 무렵이었다.

* * *

마영이 집무실로 들어서자, 적제의 불평이 이어졌다.

“제자 앞에서 팔불출이 뭔가, 팔불출이.”

“사실이지 않습니까.”

마영의 농담 섞인 직언에, 적제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 것으로 불만을 재웠다.

마영은 여기 온 본론부터 꺼냈다.

“우리가 열세입니다.”

“진천군이 정예라고 해 봤자 숫자는 얼마 되지 않을 텐데.”

“그렇긴 하지만 그 질이 문젭니다.”

적제가 반문했다.

“질이 뭐?”

“백랑전이나 북해빙궁 정도는 어떻게 해 보겠습니다만…… 성천궁이 문젭니다.”

마영이 피곤한 듯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답했다. 그러자 적제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곳은 반천련 안에서 가장 약세 아니었나?”

“약세처럼 보였던 것이겠지요. 그것들이 생강시를 이백 구나 내놓았다는 첩보입니다.”

“허.”

이번만큼은 적제도 놀랐다. 생강시의 위력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새외 최고의 가문이라는 조 씨 일가.

그들은 천마로부터 내려오는 마도를 계승한 집단이었고, 생강시 제조에 아주 능했다.

겨우 두 마리에게 얼마나 고전했던가.

물론 적제의 그때와 지금의 역량은 천지 차이였지만 문제는 다른 무사들이었다.

적제가 천왕 송산을 상대하고 나면 생강시를 상대할 만한 자들이 확 줄어든다.

이백 구의 생강시라 함은 절대고수의 숫자에서 엄청난 차이가 나게 됨을 뜻했다.

물론 생강시가 완벽하진 못하다.

그래도 절대고수의 전투 능력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며 공력 또한 살아생전 그대로였다.

그 완숙한 경지는 사라지고 없겠으나, 육체든 내공이든 절대고수의 그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일대일로는 절대고수가 상대해 이길 수 있겠지만, 두세 마리가 합격술을 펼치면 이길 수 있는 자는 극히 드물었다.

패도맹에선 기껏해야 적제와 마영, 그리고 귀천대에 있는 세 명의 절대고수뿐이랄까? 장로원의 고수들도 있지만 그들은 본진을 지킬 최후의 보루였고, 반천련이 아닌 천상련을 위한 패였다.

마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돌파구가 없었다. 그만큼 천왕의 진천군은 강력했다.

최고 중의 최고만을 모아 만든다고 자랑할 만했다.

그때 적제가 씩 웃으며 말했다.

“초운이를 전장에 데려갈까 하는데 어떤가?”

“전장은 위험하니 못 데려간다고, 데려갈 거면 나를 밟고 가라고 하신 게 바로 어제였습니다만…….”

확실히 절대고수라는 자원을 아껴 두기는 힘들어서 마영이 슬쩍 제의한 것이다.

하지만 적제가 이미 거부했던 사안이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가장 안전한 곳은 바로 내 곁인 것 같더구먼. 자네 말처럼 무사들 사기 진작 면에서도 검성이란 이름이 꼭 필요하기도 하고.”

“그렇긴 합니다.”

“그래서 말인데, 내게 한 가지 계획이 있네.”

“계획…… 이요?”

“그래, 잘하면 생강시들을 처리할 수도 있는 좋은 계획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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