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향-170화 (170/217)

검향 170화

칠흑과도 같은 어둠이 두 시신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그들을 포근히 감싸 안기 시작했다.

얼마 후 놀랍게도 시신이 어둠 속에 녹아들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물에 소금이 녹듯 서서히 융해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마정에 담긴 모든 것이 청년에게 흘러 들어왔다.

기억이…… 감정이…… 광기가…… 순차적으로 흘러 들어온다.

그러나 그러한 사념(邪念)까지 취할 생각은 없었다.

기억과 감정들은 강해지는 데 불필요한 요소였기 때문이다.

사념의 전이가 끝나자 그제야 그가 원하는 것이 흘러 들어왔다.

바로 전투 경험과 이능이었다.

두 시신이 겪어 온 전투의 경험과 마공의 이능은 그가 가장 달콤하게 여기는 것들이다.

그것들은 거를 필요도 없이 곧바로 섭취했다.

워낙에 거대한 기운인지라 흡수하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흡수가 끝나고 눈을 떠 보니 하늘은 이미 밤의 장막에 덮여 있었다.

청년은 자신의 양손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 천천히 검지를 움직여 보았다.

위이이잉-!

낮은 매미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리는가 싶더니 그의 곁에 있던 작은 바위 하나가 깨끗하게 동강났다.

이번엔 힘을 좀 줄여 멀리 날아가는 새를 향해 검지를 뻗어 보았다. 그러자 새를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그가 이번엔 수인을 맺었다.

한 번도 배운 적이 없는 온갖 주술이 그의 손끝에서 터져 나왔다.

마지막으로 그는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냈다.

그리고 주변의 땅에 뿌렸다.

콰쾅---!

피가 닿자마자 땅이 폭발하며 뒤집어졌다.

힘을 멈춘 그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달을 바라보았다.

다음 날부터 사내는 더 이상 그곳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 * *

“잡지는 않을 건가요?”

“그러려고 했는데 저거 봐……. 살벌해서 어디 같이 가자고 하겠어? 쯧쯧. 난 늙어서 뼈도 삭았는데 저런 놈한테 맞으면 골로 간다고.”

귀면호리가 과장되게 몸을 떨며 답했다.

“늙기는 얼어 죽을……. 나랑 동갑으로 보이는구만!”

추연희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귀면호리가 울컥했는지 언성을 높였다.

“나 겉보기보다는 늙었어, 추 소저! 이 몸은 본좌가 상승의 심공으로 환골탈태해서 젊어진 거야.”

추연희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네, 어련하시려고요.”

“안 믿네……. 아까부터 하고 싶었던 말이지만 추 소저는 의심이 너무 많아. 사람이 왜 그래? 서로 신뢰하는 사회 몰라? 신.뢰.”

“표국집 딸이 다 그렇죠, 뭐. 하여튼 아까 그 자식 잡지 않았으니, 이젠 날 도와줄 차례인 거 알아요?

추연희가 그의 소맷자락을 잡아끌며 말했다. 그때 귀면호리가 귀찮은 얼굴로 물었다.

“그렇긴 한데……. 먼저 패도맹으로 가면 안 돼? 거기 추 소저가 아는 사람도 많다며? 구경하고 싶은데.”

그가 묻자 추연희가 크게 외쳤다.

“안 돼요!”

“추 소저, 나 귀 안 먹었어.”

“마공의 부작용을 다 해결하고 나서 찾아가고 싶어요. 안 그랬다간 소중한 사람들이 다치고 말 테니까요.”

귀면호리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추연희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꺅! 왜 그래요?”

순식간에 안면 정타를 다섯 방이나 허용한 귀면호리가 말을 더듬었다.

“조, 조금 빨리 가야 할 것 같아서.”

“네? 네? 어딜 가시려기에…….”

귀면호리가 한쪽 눈을 찡긋하며 답했다.

“어디긴? 추 소저를 고쳐줄 수 있는 사람에게 가는 거지.”

“그게 누군데요?”

그녀의 질문에 그는 아주 자연스레 답했다.

“천상련주.”

“예에?”

十三章

“음.”

불길한 꿈으로 인해 잠에서 깨어난 초운은 주전자를 들고 물을 마셨다.

오랑산이 동네 뒷동산으로 변해 버린 사건 이후, 초운은 한동안 패도맹 안에서 두문불출해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심각한 부상을 입고 돌아온 초운으로 인해 적제의 분노가 상당했던 것이다.

아마 마영이 말리지 않았다면 천상련이나 반천련 둘 중 한 곳은 침공이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렇듯 이번 사건은 후유증은 컸지만 긍정적인 면도 있긴 있었다.

아니, 많았다.

초운의 경우 검성이라는 별호가 완전히 정착했다.

인형사 천응과 회안마인 제갈청, 그리고 반천련의 총사 제갈정오를 한꺼번에 장사 지냈다는 소문 덕분이었다.

물론 약간의 행운과 추연희의 도움이 있었고 심지어 제갈정오의 죽음은 그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소문 만들어내기 좋아하는 마영은 그마저도 모두 초운의 공으로 만들어버렸다.

마영에 의해 영웅으로 변모한 것은 초운만이 아니었다.

적운은 비겁한 검마의 술수에서 검성을 지키기 위해 몸을 던진 영웅이 되었다.

사실과는 전혀 달랐지만 세상은 그런 그에게 열광했다.

심지어 그는 천검단주 시절에도 얻지 못한 고상한 별호를 얻게 되었는데, 바로 의혈검(義血劍)이라는 것이었다.

마영은 적운의 소문에도 꽤 신경을 쓰고 있던 터라, 패도맹에 새롭게 들어온 공방의 소년장인 당현에게 부탁해 특별히 붉은빛이 도는 검을 만들어 적제가 만인 앞에서 직접 하사하게 만들었다.

선전 효과는 상당히 뛰어나서 적운의 인기가 엄청나게 올라갔다.

성 장로도 마영의 손길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의 새 별호는 풍천객이었는데, 거기에 얽힌 사연이 기가 막혔다.

사연을 창작한 마영이 자신의 최고의 작품이라 부를 정도였다.

뭐, 성 장로가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단전에 금이 갈 정도로 무리하게 경공을 펼쳤고, 그 결과 불과 반나절 만에 패도맹에 도착한 기적 같은 일화였다.

도착하자마자 적제에게 검성의 위기를 전하고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는 이야기는 전설처럼 회자되어 뭇 사내들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다.

그 덕분에 패도맹에 지원하는 무사들이 두 배 이상 늘어났을 정도였다.

물론 이것은 진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늙어서 뼈가 삭는다는 이유로 경공을 펼치는 걸 싫어했고, 실제로는 전서구나 파발무사를 자주 이용했다.

이밖에도 폭풍대주 종리백은 사천에 불어닥친 20년 만의 태풍 속에서도 검성을 구하기 위해 부하들을 이끌었다는 의리의 사나이로.

조유성은 그 끝을 알 수 없는 신비의 마도(魔道) 공자로 통했다.

이렇듯 마영의 수고 덕에 패도맹은 영웅호걸이 풍년이란 농담이 있을 정도로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다.

심지어 그가 만들어낸 영웅들의 이야기가 민간에서는 책으로 엮여 나오기까지 했다.

가장 인기 있는 책은 의외로 풍천객의 이야기들이었는데 그것은 그가 도도문 출신의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의 풍천객이 악인의 집을 털어 가난한 이들을 돕는 권선징악류의 통쾌한 이야기인지라 여러 편의 이야기가 여러 작가들을 통해 만들어졌다.

그 인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몇몇 사람들은 책 속의 내용이 실화인 줄 알고 성 장로를 찾아와 제자로 받아 달라고 강짜를 부릴 정도였다.

성 장로는 그런 대중적 인기를 귀찮아하는 듯했지만, 그의 숙소를 치우던 어린 시녀가 그의 비밀 궤짝에서 ‘풍천객 이야기’ 전질을 발견한 뒤로 내숭임이 밝혀졌다.

그러나 이러한 대중적 인기가 꼭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마영에 의해 잘 포장되어 퍼지기 시작한 검성에 대한 소문이 반천련에서, 아니, 어쩌면 천하에서 가장 무서운 자를 화나게 하고 만 것이다.

* * *

거대한 정원이 하나 있다. 기화이초가 만발하고 이름 모를 나무와 정원석으로 가득하던 이 정원은 반천련의 금지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늘 아름답기만 하던 이 정원은 달라져 있었다.

아직 때도 아니건만 식물들이 하나둘씩 시들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원인은 다름 아닌 한 노인에게 있었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살기는 식물을 시들게 하고 동물을 병들게 했다.

그가 십 수 년간 열심히 가꿔 온 사과나무는 앙상하게 뼈만 남은 고목이 되어 있었고, 그 위에서 노닐던 새들은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그는 죽어 가는 꽃잎을 하나 따더니 허공에 흩날리며 중얼거렸다.

“이것이 다 무엇인가, 죽으면 다 그만인 것을…….”

쩌억---!

그저 한숨을 내쉬었을 뿐인데 바위가 쪼개지고 꽃밭에 용권풍이 불었다.

걸음을 옮겼을 뿐이건만 지진이 일어난 듯 주변 땅이 갈라졌다.

그의 일보 일보마다 호풍환우하고 생과 사가 교차했다.

그렇게 그의 정원은 망가지고 있었고 그는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성천궁 측의 총사 배환이 침을 꼴깍 삼켰다.

‘그저 산보를 하는 것뿐인데…… 땅이 뒤집어지는구나.’

문득 아버지가 송산을 무서워한 이유를 알 것만도 같았다.

옆에 있던 백월성 측의 총사 현룡도 마찬가지인 듯 보였다.

그들은 송산의 산보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얼마 후 산보가 끝났음에도 그들은 입을 열 수 없었다.

정원은…… 천왕 송산이 아끼던 정원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바위가 깨지고 땅이 갈라지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냥 평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나마 정원에 딸려 있는 담벼락이나 전각의 주춧돌만이 이곳에 사람이 살고 있었음을 알려 주었다.

송산이 그런 그들을 향해 물었다.

“이제 정원은 필요 없으니…… 이곳을 정오의 묏자리로 써 주게…….”

“아…… 예! 예!”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던 두 총사, 배환과 현룡은 침을 꼴깍 삼키며 하나가 되어 대답했다.

늘 뒷방 늙은이라 생각했건만 크나큰 착각이었다.

무적이란 말이, 천왕이라는 별호가 왜 나왔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천왕은 정말 하늘의 왕이었다. 그 누구도 막을 수 있는 자가 아니었다.

육왕칠사? 급이 달랐다. 오왕칠사가 맞다.

천왕을 다른 이들과 같은 선상에 놓는다는 것은 실례로 보일 정도였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정예를 모아 주게.”

“정예…… 를 말입니까?”

배환이었다.

그러자 송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왕이면 최고 중의 최고가 좋겠군.”

현룡이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혹, 이유를 물어도 괜찮겠습니까?”

그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복수네.”

“…….”

배환과 현룡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천하제일의 세력을 지닌 천하제일의 고수가 개인적인 복수를 위해 정예를 모아 달라고 하는데 무어라 하겠는가.

대놓고 앞에서 반대를 할까?

방금 정원 하나를 가루로 만들어버린 사람 앞에서?

그들은 결국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 * *

백월성의 후계가 되기 위해선 수많은 난관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난관 대부분에는 목숨이 걸려 있다.

공식적으로 백월성주의 제자가 되는 이는 많으나, 1년 이 지나도 살아 있는 경우는 1할이 채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1할의 제자들 또한 3년 안에 절반 이상이 죽는다.

5년 이상 살아남는 자들에게는 더 피 말리는 경쟁이 기다리고 있다.

그런 무수한 경쟁자들을 제치고 마지막 정점에 서는 자는 혈월이라 불린다.

모든 사형제들의 피로 자신을 물들였기 때문에 내려지는 별호다.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백월성주가 살아 있는 한은 매년 제자가 들어온다.

제자들은 앞서와 마찬가지로 수년간 경쟁하고 마지막 남은 한 사람은 당대의 혈월에게 도전한다.

단 전대의 혈월이 백월성주가 되어 있다면 마지막 남은 한 사람은 피를 흘리지 않고 혈월이 될 수 있지만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다.

혈월은 또 다른 혈월을 상대로 살아남아야 한다.

그렇게 다음 대 백월성주가 자리를 이양할 때까지 사투는 계속된다.

현재의 혈월은 무려 다섯 번이나 자리를 지킨 괴물이었다.

그야말로 최고 중의 최고인 것이다.

백월성의 총사 현룡이 그에게 말했다.

“련주께서 전쟁을 위해 최고의 무사들을 원하십니다.”

혈월은 빙그레 웃었다.

“그렇다면 잘 찾아왔군. 내가 바로 최고이니까.”

이로써 백월성 최정예 부대 백랑전 사십 인과 그들을 이끄는 백랑전주 혈월이 천왕 송산이 새롭게 만든 반천련 최강무력부대, 진천군(振天軍)의 한 축을 차지하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