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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향-167화 (167/217)

검향 167화

천응이 초운을 향해 빈정대자 그녀가 인상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천응의 이마에 핏줄이 돋았다.

그가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로 손을 움직였다.

“아직 고생을 덜 했군.”

그녀의 전신에서 더욱더 진한 마기가 풀려나왔다.

“어……? 무슨 짓을…….”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갑자기 머릿속을 범람하는 기억의 홍수 때문이었다. 그것은 그녀가 검마로서 마라검을 완성해 가는 과정이었다.

죄 없는 양민들을 베고 그 피를 마셨다. 그것이 노인이든 어린아이든 간에 상관없었다.

자신의 주관적인 기억이라기보다 남의 일기를 들춰 보는 듯한 객관적인 기억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그녀에겐 크나큰 충격이었다.

“꺄아아아악!”

머리라도 부여잡고 주저앉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녀의 몸은 초운을 공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문을 몰라 당황해 하던 초운에게 천응이 입을 열었다.

“그녀에게 검마로서의 기억을 풀어주었지. 아마 꽤 고통스러울 거야.”

“그만해!”

분노한 초운이 천응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제갈청이 그를 막아섰다. 양팔을 잃었으나 상관없었다.

초혈마공을 익힌 그의 주 공격 수단은 피를 폭발시키는 것이다.

그의 피가 초운의 옷에 묻었다.

쾅--!

“큭!”

초운은 내상과 함께 뒤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밀려난 곳에서는 추연희의 검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만해, 그만해……! 그만해! 제발!”

추연희가 절규했다.

기억은 끊임없이 흘러들었다.

결코 알고 싶지 않은 잔혹한 일상이 그의 뇌리에 박혔다.

초운의 옆구리에 검을 찔러 넣은 일도 떠올랐다.

그녀가 그를 향해 말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초운.”

그리 사과하면서도 그녀의 검은 초운의 목을 노리는 중이었다.

“괜찮아요. 그것들은…… 그 기억들은 당신 게 아니에요.”

“아뇨, 내 잘못이에요. 다 내가 저지른 일이에요.”

둘을 지켜보던 천응이 중얼거렸다.

“지겨우니 이제 끝내야겠어.”

좀 더 절망해 주길 바랐는데 초운의 반응이 생각보다 신통치 않았던 것이다.

그가 다시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그녀의 인격이 다시 봉인되었다.

그녀는 언제 울었냐는 듯 다시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가 있었다.

“추 소저! 추 소저!”

“소용없다. 다시 봉인해 버렸으니까.”

초운이 분노하여 외쳤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왜 죄 없는 이들을 괴롭히는 거야!”

“절망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

“한없이 절망하다 문득 누군가를 증오하는 거야. 그리고 그 증오의 대상이 나였으면 좋겠어. 세상 모두가 날 증오한다면 더욱더 행복할 테지. 킥킥킥킥.”

그리 말하는 그의 시선이 문득 제갈청에게로 향했지만 그것은 아주 찰나였다.

초운이 그를 향해 읊조리듯 말했다.

“미쳤구나…… 넌.”

“하하하. 그걸 이제 알았어? 더 재밌는 걸 가르쳐 줄까? 내 꿈은 말이야. 날 증오하는 이들이 내 사지를 자르고 눈알을 뽑고 코와 혀를 잘라 내는 거야. 그리고 날 돼지우리에 던져 놓는 거지. 난 그렇게 쉴 새 없이 유린당하다 고통 속에서 죽고 싶어.”

초운의 얼굴이 굳었다.

천응의 정신 구조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하지만 난 나보다 뛰어난 자가 아니면 죽어줄 생각이 없어. 내가 또 자존심은 세거든.”

“……불쌍해.”

초운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천응이 웃는 낯 그대로 되물었다.

“응? 뭐라고?”

“불쌍하다고 했어……. 왜 스스로를 증오로 몰아넣는 거지?”

“…….”

천응의 얼굴이 바위처럼 굳었다.

그의 미소가 서서히 줄어들었다.

초운이 다시 말했다.

“왜 죽고 싶어 하는 거야?”

“……시끄러워.”

“뭐가…… 그리 슬픈 거지?”

천응의 얼굴에서 미소가 완전히 사라졌다.

“시끄러워…….”

“너도 뭔가 잃어버린 거구나? 바로 나처럼.”

초운의 마지막 한마디에 천응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시끄럽다고 했잖아!!”

위이잉---!

공기를 찢어발기는 소리에 초운은 급히 처로를 들어 막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초운의 검 처로를 스쳐 지나갔다.

툭---!

튼튼하기 그지없던 처로가 깨끗하게 잘리며 땅에 떨어졌다.

“처로!”

초운이 안타까운 마음에 검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그러나 그것은 헛된 목소리의 떨림에 불과했다.

위이잉---!

천응의 다섯 손가락에서 사람 머리카락 굵기의 실들이 거미줄 뽑듯 풀려나왔다.

그것은 실제 실이 아닌 마기가 뭉쳐 만들어진 것들로 평소보다 고도의 마기가 응축되어 있었다.

저 실에 닿는 것은 무엇이 되었든 잘려 나가리라.

위잉---!

마치 매미가 우는 듯한 낮은 소리.

그러나 그것이 죽음을 부른다는 것쯤은 초운도 알았다.

보이지도 않는 마기의 실선들을 완전히 피하는 것은 무리였다. 피한다고 피했건만 어깨살이 한 움큼이나 잘려 나갔다.

이 기술을 제대로 쓴 것은 천응도 처음이었다.

자신의 공력만 소모되는 것이 아니라, 현인마공으로 쌓아 올린 마정의 기운까지 소실되기 때문에 그 동안은 한 번도 쓰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초운에 대한 분노로 그 금기를 넘어서고 만 것이다.

지금 그는 검마에 대한 통제권도 놓아버릴 정도로 크게 화가 나 있었다.

그 덕분에 추연희의 인격이 다시 돌아왔다.

“이건…….”

그녀가 자신의 몸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어찌 된 일인지 몸의 통제권까지 돌아와 있었던 것이다.

기억과 인격을 봉인하는 비술은 상당히 복잡한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모를까 마인에게는 힘들었다.

때문에 육신만큼은 마인으로 화한 그녀는 천응이 평정심을 잃어버린 덕분에 한 번 풀렸던 인격의 봉인이 헐거워진 것이다.

게다가 그 반동으로 인해 몸의 통제권마저 일부 되찾을 수 있었다.

콰콰콰콰----!

천응의 오른손에서 뻗어 나온 다섯 줄기의 마기가 초운을 쫓았다. 어떻게든 피하고는 있었지만 위험해 보였다.

추연희는 그런 초운을 돋기 위해 철영검을 고쳐 잡았다.

그리고…….

마라검(魔羅劍).

구식(九式).

광폭랑(狂暴狼).

늑대 형상의 요귀가 그녀의 검을 통해 나타났다.

아홉 개의 눈을 가진 이 요귀는 이미 한 번 실혼인들 손에 찢겨 죽은 적이 있으나, 본체인 그녀가 살아 있는 한은 몇 백, 몇 천 번이고 되살아날 수 있었다.

그것이 신호라도 되었던 것일까…….

초운 또한 있는 힘을 끌어 모아 한 가지 절학을 펼쳤다.

매화검류(梅花劍流). 오의(奧義).

칠절매화검(七絶梅花劍).

오식(五式).

낙매여우(落梅如雨).

반검이었으나 매화 잎이 피어올라 비처럼 쏟아졌다. 그러나 부상으로 인해 그 위력은 오분지 일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그래도 검마와 옛 검귀가 합심하여 쏟아 낸 검기였다.

위력이 부족할 리 없었다.

“제기랄!!”

천응이 비명을 지르며 주술을 겹겹이 일으켰다.

수백 개의 막이 순식간에 쌓이고 쌓이고 쌓였다.

그러나 단 한 번의 격돌에 수십 개씩 부서져 나갔다.

천응의 수인이 다급해졌다.

부서진 주술들을 황급히 복구시켰지만, 초운과 추연희의 검공(劍功)은 강력했다.

“으…… 으…… 으아아아아! 여기서…… 이런 데서…… 죽을 순 없어!”

그가 이를 갈며 외쳤다.

수십 개의 주술막이 생성되고 부서지길 반복했다.

아마 먼저 공력이 다한 쪽이 쓰러지리라.

표면적으로 봤을 땐 부상을 입은 초운 쪽이 불리했다. 그러나 천응은 추연희를 무척이나 잘 만들었다.

그녀가 바닥에 검을 꽂으며 외쳤다.

“멸공(滅攻)!!”

우르르르---!

천응이 딛고 있던 바닥이 모래처럼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 덕분에 그가 펼쳐 놓은 술식 몇 개가 흐트러졌다.

고명한 주술 중에는 우보법을 중요시 여기는 것이 많았다.

특히 강한 주술일수록 보법의 역할은 컸다.

천응의 주술이 제아무리 강력하다 하나 그 또한 그 틀에서 벗어날 순 없었다.

순식간에 주술막이 절반 이상 파괴되었다.

그리고 파괴가 복구를 따라잡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악!”

천응이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질렀다.

거대한 늑대가 그의 팔뚝을 물어뜯었기 때문이다.

이를 기점으로 그의 방어 술식이 모조리 해제되고 말았다.

초운의 검기가 그의 몸을 유린하는 듯했다.

그때였다.

누군가 천응의 앞을 가로막았다.

붉은 피가 모여 거대한 막을 형성했다.

콰콰콰쾅!

거대한 굉음과 함께 폭발이 일어났다.

그 반동으로 추연희는 산 아래쪽으로 떨어졌고 그녀가 불러낸 늑대는 박살나며 역소환되었다.

초운 또한 피를 뿌리며 튕겨 나가 소나무 다섯 개를 부러뜨리고 나서야 멈추었다.

“콜록, 콜록, 콜록.”

웬만한 이라면 열 번 죽고도 남았을 위력의 반동을 온몸으로 받은 초운이었지만 살아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단련한 외공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즉사하고 말았을 것이다.

새삼 다시 한 번 사부의 위대함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비틀거리며 일어서서 전면을 바라본 초운은 누가 천응을 구했는지 알 수 있었다.

바로 회안의 마인 제갈청이었다.

그러나 그의 상태도 그리 좋아 보이진 않았다.

양팔은 진즉 없어져서 그렇다 쳐도 이젠 다리까지 사라지고 없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피를 무기로 하는 자가 피를 너무 많이 흘린 것이 문제였다.

초운과 추연희의 합격을 막아 낼 정도로 강력한 폭발을 일으키기 위해선 상당히 많은 피가 필요했을 것이다.

실제로 좀 전에 천응의 앞을 가로막았던 피는, 벽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양이었다.

마인도 반은 인간이다.

피를 그만큼이나 쏟으면 그 누구라도 살 수 없다.

“안…… 돼 …… 안 돼, 안 돼, 안 돼! 제갈청!!”

천응이 그의 몸을 흔들며 절규하고 있었다.

“또…… 또야? 나 때문에…… 나 때문에 죽지 마! 당장 일어나! 명령이야! 당장 일어나란 말이야!!”

초운은 그런 그에게로 비틀거리며 다가갔다.

그의 손엔 반검이 되어버린 처로가 들려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산이 울기 시작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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