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향 164화
“지켜 달라 해 놓고 어딜 다녀온 거지?”
“개인적인 볼일이 있었거든. 검마의 상세도 치유해야 했고.”
천응에 의해 혹사당한 검마의 몸은 만신창이였다.
확실히 지금은 부상에서 어느 정도 회복한 듯 보였다.
초운은 그에 대한 의심을 완전히 지우진 않았으나, 추연희의 상세를 보고 나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적이 너무 많다. 그냥 숨어 있는 게 나았을 텐데…….”
“킥. 적이 많다고? 어디? 내겐 두 명밖에 보이지 않는데.”
천응의 대답에 초운은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두…… 명?”
“그래, 두 명이다. 지금부터 그걸 보여 주지.”
천응이 여유로운 자세로 수인을 맺었다.
“막아!”
그가 수인을 맺는 것을 본 제갈정오가 외쳤다.
호결의 명에 의해 실혼인들의 전술은 다시 바뀌었다. 이번엔 천응들과 초운을 동시에 노리는 것으로.
검마가 자랑하는 늑대도 실혼인들 앞에선 소용없었다. 늑대는 실혼인들의 손에 의해 갈가리 찢겨 나갔다.
추연희를 검마로 있게 해주는 마공은 실혼인들에게 통하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추연희의 몸은 다시 상처로 가득해져 갔다.
초운이 돕지 않았다면 추연희는 조금 전 찢겨 나간 늑대 꼴을 면치 못했으리라.
그때 천응이 제갈청을 향해 명했다.
“나머지 팔도 잘라.”
파하학!
제갈청은 두 말 없이 자신의 팔을 뽑아냈다.
초혈마공의 전승자인 그가 자신의 몸속에서 혈액을 폭발시키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의 하나 남은 팔이 어깨 관절부터 뽑히듯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콰아아아앙!!
커다란 폭발이 일어나며 실혼인들이 오 장여나 밀려 나갔다.
한순간에 진영이 무너지고 천응과 제갈정오 사이에 막혀 있는 것은 없었다.
자신의 팔을 뽑는 걸로도 모자라 폭발시켜 버린 무식함에 치를 떨던 제갈정오가 급히 말했다.
“호결! 나를 지키게! 실혼인들을 일으켜 세워!”
호결도 그리 하고 싶었다.
하지만 폭발의 충격에서 벗어난 실혼인들이 제자리를 찾는 시간보다 천응이 조금 더 빨랐다.
천응의 몸에서 튀어나온 마기의 실이 제갈정오의 미간을 향해 뻗어 나갔다.
제갈정오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
찰나 간의 침묵이 덧없이 흘렀다.
제갈정오는 자신의 몸에 아무 이상이 없는 것을 느끼고 살며시 눈을 떴다.
약 오 장여 떨어진 곳에서 천응이 히죽거리며 웃고 있었다.
‘뭐지……? 왜 웃고 있는 거냐?’
그 이유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실혼인들이 모조리 멈춰 있었기 때문이다.
제갈정오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신의 곁에 있을 호결을 보았다.
호결의 미간에는 천응으로부터 이어진 한 가닥 실이 박혀 있었다.
딱-!
수인을 푼 천응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리고…….
푸욱---!
“어…….”
초운의 옆구리에 추연희의 철영검이 박혔다.
모두의 시선이 천응의 손가락을 향하고 있던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초운이 무릎을 꿇으며 쓰러졌다.
“추…… 소저…….”
방심했다.
추연희는 검마이고 천응의 꼭두각시다.
당연히 적이었다.
그저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앞선 나머지, 그녀에게 등을 보이고 만 것이다.
게다가 모든 실혼인들이 멈춰 버린 것이 그 방심을 더 깊게 이끌었다.
“소공!!”
밖이 조용해지자 나와 본 적운과 조유성이 초운을 불렀다.
천응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바로 제갈정오를 향해서.
제갈정오는 발악하듯 바둑돌을 던지고 가문의 비술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막에 부딪혀 튕겨 나가듯 그의 비술들은 천응에게 닿지 않았다.
“키히히히히. 정말이지, 이 숙부를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다니. 정말 잘 컸구나, 정오야.”
그가 검지를 들더니 제갈정오의 어깨를 겨냥하며 말을 이었다.
“이 숙부는.”
핑---!
그의 마기로 빚어진 실이 제갈정오의 어깨를 관통했다.
“정말로.”
피핑---!
마기의 실이 이번엔 정오의 무릎을 관통했다.
“크으윽!”
제갈정오의 입에서 고통에 찬 신음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천응은 멈추지 않았다.
“네가.”
피피핑---!
이번엔 반대쪽 무릎과 어깨였다.
“자랑스럽구나.”
천응은 말을 맺으며 제갈정오의 양 손등마저 꿰뚫었다.
“크으윽! 어떻게…… 어떻게…….”
제갈정오는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그에게 무언가 대답을 원했다.
“어떻게라……. 실혼인들을 어떻게 제어한 건지 궁금한 거겠지?”
“…….”
“그래, 저 실혼인들은 정말 조종할 수가 없더군. 모든 걸 조종할 수 있는 인형사가 아무것도 못하다니 자존심이 상했어. 그러다 결국 방법을 떠올렸다.”
“…….”
천응은 멍한 눈으로 서 있는 호결에게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저 괴물들을 조종할 수 없다면, 조종하는 놈을 조종해 버리자고.”
“그럴 리가! 호결의 감응력은 네가 조종할 수 없을 만큼 방대하다.”
“이 녀석 이름이 호결이었나? 그래, 확실히 감응력은 뛰어나더군. 집단의식을 통제할 만큼 넓고 강력했어. 그래서 단순하게 해결했다. 그의 감응력을 더 강한 감응력으로 찍어 눌러 통제 권한을 뺏어 오자고. 결과적으로는 더 효과가 좋아서 호결이라는 놈의 제어권까지 얻어버렸지만…….”
“크윽……. 네 감응력이 그 정도라고? 지금 나보고 그 말을 믿으란 말이냐? 평범한 인간은 절대 그런 감응력을 가질 수 없다! 그런 자가 있다면 이미 인간이 아니거나…… 어릴 때…….”
제갈정오는 말을 하다 놀랐는지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천응이 한쪽 눈을 찡그리며 말했다.
“이제 알겠어? 난 인간이 아니야.”
“설마…… 너…… 너는 본가의 환신대법으로…….”
“그래, 저주받은 마물이지.”
천응의 미소가 더욱더 진해졌다.
九章
그는 실로 오랜만에 비고를 찾았다.
이 천명비고는 수백 년 전 제갈가의 초대가주가 직접 만든 곳으로, 이곳의 비밀에 대해 아는 자는 셋을 넘지 않았다.
곽호는 바로 그 셋 중에 하나였다.
“번천계를 완성할 중요한 요소가 이 안에 있을 것이다.”
천명비고를 노리던 그가 공교롭게도 제갈가주의 사부로 초청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53년 전의 일이다.
과연 천하의 명가답게 그곳엔 뛰어난 재능을 지닌 이들이 많았고, 그는 젊은 가주인 제갈청을 눈여겨보고 있던 중이었다.
어차피 천명비고를 열 수 있는 자는 제갈청뿐이었으니 그의 도움을 위해서라도 타락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던 중, 그가 천명비고를 탐내면서까지 찾던 것의 결과물을 바깥에서 발견하고 말았다.
인공적인 선체를 만들어내는 비술, 신인환신대법의 결과물을 말이다.
비록 실패작에 불과했지만 천명비고에 대한 그의 욕망은 마치 이별한 연인을 기다리는 여인처럼 더욱더 깊어졌다. 하지만 시간이 모자랐다.
가주의 재능은 뛰어난 것이었지만, 마정의 씨앗이 각성하길 기다리기엔 그의 인내심이 높지 않았다.
결국 그는 실패작을 이용해 사악한 음모를 꾸미기에 이르렀다.
마정의 씨앗이 신인환신대법의 결과물에겐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었기에 우선 그가 아는 온갖 비술을 가르쳤다.
그의 새로운 제자는 방대한 감응력을 지니고 있었다.
감응력이란 타인의 정신에 접속하여 소통하는 능력, 일종의 육감이라 할 수 있었다.
감응력은 정신의 크기에 비례한다.
정신력이 크면 클수록 감응력 또한 배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의 정신은 누군가에 의해 봉인되어 있었다.
즉, 정신과 감응력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는 다섯 살짜리 어린애가 맨손으로 칼날을 잡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마 뛰어난 재능으로 어디까지 커 버릴지 몰라 누군가가 두려워한 나머지 정신을 봉인한 것 같은데, 푸는 것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봉인이란 물을 가둬 두는 거대한 ‘보(洑)’와도 같아서 갑자기 풀면 정신이 망가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곽호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무너진 정신에 아비에게 배신당했다는 거짓 기억을 심어 두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거짓 기억 하나.
그리고 왜곡된 진실.
이 두 가지 요소 덕분에 훌륭한 도구가 탄생했다.
결국 곽호는 그를 이용해 제갈가를 멸망으로 이끌었다.
* * *
천응과 제갈청의 사투는 계속되었다.
곽호는 기분 좋은 미소로 두 제자 간의 사투를 바라보고 있었다.
둘 다 그의 손안에 있으니 이제 천명비고는 그의 것이나 다름없었다.
제갈청의 몸에서 핏방울이 튈 때마다 허공에 크고 작은 폭발이 일어났다.
초혈마공의 이능이라 할 수 있는 폭혈이었다.
천응은 자신의 몸에 여러 겹의 주술을 걸쳐 폭발로부터 몸을 보호했다.
제갈청은 피를 잃을수록 죽어 가고 있었다.
천응은 그것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천응의 수십 겹의 보호결계는 제갈청의 피 앞에서는 연약했다.
피가 폭발할 때마다 결계의 삼분의 일이 파괴되었고, 그것을 원상 복구시키는 일이 반복됐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파괴하는 속도가 복구하는 속도를 앞지르기 시작했다.
“크아아아! 천으으응!”
제갈청의 분노는 그의 육신을 능가했다.
초혈마공의 경지가 순식간에 끝을 바라보고 있을 정도였다.
이 순간만큼은 천응의 뛰어난 재능도 소용없었다.
천응은 두려움을 느꼈다.
파각---파가각---!
결계 너머로 쏘아 보낸 주술들이 제갈청의 몸을 유린했지만 그는 목숨을 포기한 듯 다 무시했다.
그저 결계를 부수는 데 온 힘을 다하고 있었다.
콰쾅!!
천응은 사부인 곽호에게 시선을 보내며 도움을 요청하였지만 소용없었다.
사부는 그저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야속한 사부였지만 그는 그의 성격을 잘 알았다.
그는 제자에게 최고만을 원했고, 그 기준을 채우지 못하면 가차 없이 버릴 것이라 얘기해 왔다.
아마 지금의 저 야속함은 자신을 시험하는 것이겠지…….
천응은 그리 합리화하며 자신이 아는 온갖 술법을 구사하며 버텼다.
그러나 그의 힘은 제갈청의 분노에 미치지 못했다.
꽈앙!!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그의 보호결계가 모조리 박살났다. 천응에게 남은 것은 이제 죽음뿐이었다.
천응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곧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따뜻함을 담은 손바닥이 그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는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후두두둑…….
제갈청의 가슴에서 흘러내리는 피가 바닥을 적셨다.
“안 돼!!”
안타까움이 가득한 곽호의 비명.
천명비고를 열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의 돌발 행동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지른 것이다.
그러나 그런 그의 목소리도 천응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지금 그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오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