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향 163화
八章
지잉---!
제갈청의 손이 천응의 몸에 닿기 직전, 무형의 장벽이 제갈청의 몸을 밀어냈다.
“뭐, 뭐지?”
제갈청은 갑자기 벌어진 일에 당황했다.
조금만 있으면 동생의 마음을 돌릴 수 있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개입에 의해 실패하고 만 것이다.
그러던 와중 동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부님!”
언제부터 있었던 것일까? 천응의 뒤편에 한 중년의 사내가 서 있었다.
가문에는 저명한 서예가라 속이고 자신이 직접 들인 기문둔갑의 고수, 곽호.
그를 스승으로 모신 것은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천명비고를 열기 위한 수작이었음을 이제는 안다.
“이놈!”
제갈청의 손에서 푸르스름한 불덩이가 생성되어 날았다.
하지만 곽호의 그림자 속에서 솟아 나온 한 여인에 의해 불꽃은 그대로 사라졌다.
여인의 손은 눈처럼 하얀 백색이었고 지독한 냉기를 품고 있었다.
제갈청이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소수…… 마공.”
수십 년 전 마인사냥 때 사라진, 저주받을 마공이 나타난 것이다.
여인의 재주는 그게 다가 아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급격히 늘어나더니 제갈청을 휘감으려 했다.
“그만해라, 사요.”
사요라 불린 여인은 아쉬운 얼굴로 머리카락을 회수했다.
제갈청은 다리가 풀렸는지 그대로 주저앉았다.
“당신은 마인인가?”
그가 곽호를 향해 물었다.
그러자 곽호는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
“마인 따위로 불리다니 이 사부는 몹시 불쾌하단다, 제자야.”
“난 당신 제자가 아니야!”
“쯧쯧, 아쉽구나. 그래도 그 재능이 아까워 이것저것 전수해 주었건만.”
“그래서 묻고자 한다. 내 몸에 무슨 짓을 한 거지?”
“흠. 그런 질문을 하다니……. 혹시 벌써 징후가 나타난 건가?”
확실히 제갈청은 일 년 전부터 몸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아니, 나빠졌다기보다 남들에겐 말할 수 없는 특이한 이능을 지니게 된 것이다.
1년 넘게 그 이유를 찾던 제갈청은, 곽호와 함께 나타나 소수마공을 쓰는 여인을 보고 깨달은 것이 있어 물은 것이다.
제갈청이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징…… 후?”
“그래. 네 단전에 마정의 씨앗을 심어 두었지. 적합성이 높은 자는 죽지 않지만, 낮은 자는 굉장한 고통 속에서 서서히 죽어 간다. 너의 경우는 적합성이 꽤 높았나보군. 축하해 주마. 조만간 넌 아주 강력한 마인이 될 거다.”
“나도…… 모르게 날 마인으로 만든단 말이냐!”
제갈청이 분노하여 외쳤다. 그러나 곽호는 더 이상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어차피 도구로서의 그는 이미 그 효용을 잃었다. 지금은 새로운 도구를 관리해야 할 때다.
그가 천응을 향해 말했다.
“너무 굼뜨구나. 그래도 형이라 죽이긴 힘든 게냐?”
“아닙니다. 제자는…… 제자는…….”
“그렇다면 뭘 망설이고 있느냐. 날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고 한 건 바로 너다.”
“…….”
천응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사부와 제갈청을 번갈아 보았다. 갈등의 빛이 역력했다.
그 모습에 곽호가 실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토록 이용당하고도 아직 모르고 있구나. 너는 그저 가문의 도구였다. 그나마도 불완전해 폐기될 뻔한 도구.”
“…….”
‘지금은 나의 도구지만.’
곽호의 진짜 속내였지만, 굳이 그런 것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
“그에 반해 나는 누구보다 너를 아끼는 스승이다.”
그 한마디에 천응은 다시 결심을 굳혔다.
그때 제갈청의 비명이 모두의 귀를 울렸다.
분노로 인해 마정의 씨앗이 각성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가 회색으로 물들고 몸 곳곳에서 뼈 부딪히는 소리가 들린다.
일종의 환골탈태였지만, 진짜와는 다르다.
저것은 온몸이 마기로 가득 찰 때 나는 소리였다.
“호오, 각성이라. 벌써 각성에 이르다니. 역시나 대단한 재능이로군.”
곽호의 감탄에 조급해진 것은 천응이었다.
그가 제갈청을 인정할수록 이상하게 마음속에선 질투심이 꿈틀거렸다.
그것은 곧 스승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졌다.
천응이 제갈청을 향해 뛰어갔다.
그의 양손이 뭉치며 한순간에 다섯 가지 이상의 수인이 맺어졌다.
“죽어!!”
“크아아아아!!”
비명과 함께 제갈청은 자신의 몸에 흐르는 피를 본능적으로 허공에 뿌리며 힘을 집중했다.
콰콰쾅!
수백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초혈마인이 각성하는 순간이었다.
* * *
자신이 뽑아낼 수 있는 모든 실을 이용해 오랑산 전체를 관찰 중이던 천응은 어둠 속에서 슬며시 눈을 떴다.
그는 잠을 즐기진 않았다.
과거의 기억이 매번 재현되기 때문이다.
그래도 주술력을 회복하고 정보를 모으기 위해선 잠이 필요했다.
“키키킥. 엉덩이 무겁던 네 아들이 드디어 움직이네, 제갈청.”
“…….”
“어떡할까? 너처럼 만들어 줄까? 아니면 죽여 버릴까?”
한참 즐겁게 고민하던 그가 결국 선택했다.
“역시 죽여 버리는 게 낫겠어. 이번 함정은 꽤 무서웠거든. 초운이가 없었다면 분명 내가 당했을 거야. 히히히.”
그가 초운에게 의탁했던 것은 제갈정오의 관심을 그쪽으로 쏠리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물론 곧바로 몸을 숨기긴 했지만 그와 초운이 동맹을 맺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지시킨 것만으로도 성공이었다.
그 덕에 실혼인들이 모두 초운을 죽이려 달려들게 되었으니까.
그리고 천응은 천천히 때가 되기를 기다렸다.
제갈정오가 모두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바로 그 때를 말이다.
“추연희, 넌 초운을 막아. 너에게 희망이 남아 있는 것을 아는 이상 그는 널 죽이지 못해. 물론 나도 죽일 수 없을 테고.”
“…….”
“자, 그럼 가 볼까? 오늘이야말로 다 끝내자고. 이 산도 이젠 지겹거든.”
* * *
초운 일행이 원하던 대로, 그리고 계획한 대로 제갈정오는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삼백여 실혼인들에 둘러싸인 그는 마치 제왕처럼 여유가 넘쳐흘렀다.
그는 조유성이 반 시진 넘게 고심하여 설치한 진법을 일각도 안 되어 파훼해 버렸다.
하지만 초운은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진법이 파괴되자마자 동굴 밖으로 나온 것은 초운 한 명뿐이었다.
“그대가 초운인가? 직접 얼굴을 마주한 것은 처음이로구먼.”
제갈정오가 반가워하며 인사를 건네자 초운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당신은 누구지?”
“자네는 이미 날 알고 있을 걸세.”
호결에게 턱짓을 하며 한 번 뜸을 들인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자네를 무림공적으로 선포하고 검귀라는 별호를 선사한 것이 바로 나이니까.”
사사사삭---!
호결의 명에 의해 실혼인들이 초운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초운은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반천련의 총사시군요.”
“머리가 나쁘다고 생각했는데, 제법 잘 돌아가는군.”
“쫓기는 동안 인생 공부를 많이 했으니까요.”
“오, 그렇다면 나에게 고마워해야겠군.”
순간, 초운의 검에서 푸르스름한 강기가 뻗어 나오더니 실혼인 둘을 꿰뚫었다.
실혼인들은 빠져나오기 위해 발버둥 쳤으나 이내 몸이 수십 조각으로 흩어지며 땅에 떨어졌다.
호결은 급히 그들과의 연결을 끊었지만 충격이 있었는지 입가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쫓기면서 한 가지 배운 게 있습니다.”
“무엇인가?”
제갈정오가 되물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호결에게 명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실혼인 열 명이 초운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들의 공격을 피하던 초운이 외치듯 말했다.
“검에는 자비가 없다는 겁니다.”
초운의 애검이 강기를 흩뿌렸다.
그러자 좀 전처럼 실혼인 둘이 꿰뚫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양상이 조금 달랐다.
그들이 토막 나기 전에 동료들이 강기에 걸린 그들을 강제로 끌어내렸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중한 상처를 입기는 했지만 죽지는 않았다. 상처 또한 한순간에 재생되어버렸다.
순식간에 전술이 바뀐 것이다.
그럼에도 초운은 당황하지 않았다.
대신 꾸준히 강기를 피워 올렸다.
검기로는 저들을 상대할 수 없으니, 강기가 최선이었다.
절대고수일지라도 공력의 소모가 심한 강기는 잘 펼치지 않는다.
펼치더라도 단판 승부에만 이용하는 것이 다였다.
그러나 무서운 재생력과 강골을 가진 실혼인들을 상대하기 위해선 강기가 최선의 선택이 될 수밖에 없었다.
호결은 실혼인들을 세 겹으로 나누어 초운을 감싸게 했다.
일종에 차륜전을 펼치기 위함으로, 상대방의 공력을 소모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의도는 상당히 잘 먹히는 중이었다.
제아무리 절대고수라 해도 초운은 절대고수로서의 경험이 부족했다.
실전 경험은 많지만, 절대고수로서 내공의 분배는 아직 모자랐던 것이다.
때문에 강대한 공력을 자랑하던 초운마저 지쳐 가고 있었다.
실혼인들은 이지가 없다.
하지만 그 전술은 제갈정오를 거쳐 호결을 통해 그들에게 이어진다.
특히 제갈정오의 경우 제갈가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천재 중의 천재였다.
그런 그가 실혼인들을 운용하니 제아무리 초운일지라도 고전할 수밖에.
실혼인들의 집단의식을 이용하는 능력과 고도의 정보 분석 능력을 가진 호결은 그가 어떤 전술을 요구해도 곧바로 실행시킬 수 있었다.
수백의 실혼인이 잘 짜 맞춘 춤을 추듯 일사불란했다.
호흡이 어찌나 잘 맞던지, 수백 명이 마치 한 몸과도 같이 움직이는 듯했다.
이것이 바로 실혼인들의 제대로 된 운용법.
각 개체도 강하기 그지없지만, 정작 무서운 건 수백이 곧 하나의 의식을 중심으로 잘 계산된 움직임을 선보일 수 있다는 데 있다.
아마 수십 년간 호흡을 맞춰 온 쌍둥이들조차 불가능 할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초운의 몸에도 상처가 하나둘씩 늘어 가고 있었다.
호신강기를 펼칠 만한 공력이 부족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운은 당황하지도, 힘들어 하지도 않았다.
언젠가부터는 억지로 공력을 끌어올리지 않고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작게 움직여 치명상을 피했다.
이를 지켜보던 제갈정오의 눈썹이 꿈틀댔다.
뭔가 이상한 것을 느낀 것이다.
“저놈…… 공력을 쓰지 않는군.”
“그럴 리가요.”
전장으로 눈을 돌린 호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잘 보게, 저 움직임을. 마치 실혼인들과 한 몸 같지 않는가.”
그의 판단이 옳았다.
초운은 실혼인들 사이에 융화되어 가고 있었다.
이는 그가 깨달은 환검의 비의.
변화의 중심에서 근원이 되어가는 원리였다.
그것을 공력도 없이 육체의 능력만으로 가능케 하다니, 제갈정오가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어처구니가 없군. 내가 저놈 수련을 도와준 건가?”
이 정도면 괴물이라 불려도 할 말이 없다.
생사가 달린 싸움에서조차 깨우침을 얻다니 말이 되느냔 말이다.
제갈정오는 분노했다.
확실한 우위를 선점했다 여겼는데 그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호결, 동굴 안으로 실혼인 몇을 보내게.”
“알겠습니다.”
열 명의 실혼인을 빼내어 동굴 안으로 들여보내려 하자 초운은 명경지수와 같은 상태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들 앞을 가로막으며 제갈정오에게 말했다.
“덕분에 좋은 걸 얻었습니다.”
“제기랄.”
그는 약이 올랐지만 섣불리 움직이진 않았다.
그때 새로운 전술을 짜던 그의 기감에 익숙한 것이 잡혔다.
“나왔군, 천응.”
오랫동안 기다려온 반역자, 천응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아하하하하. 잘들 놀고 있었군.”
천응의 웃음소리가 산을 뒤흔들었다.
순간 아홉 개의 눈이 달린 거대한 늑대에 탄 한 여인이 전장의 한복판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제갈정오로선 꿈에서조차 그리워하던 아버지, 제갈청이 젊은 시절 그대로의 형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