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향 162화
초운 일행이 오랑산에 오른 지 닷새.
오랑산 자락에는 지금 수많은 무사들이 모여들어 진을 치는 중이었다.
먼저 도착한 것은 패도맹의 천검각 소속의 무사 일백.
이들은 과거 천검단으로 더 유명한 자들이었다.
그다음으로는 패도맹에 소속된 이백여 방파들이 보내온 무사 이천.
방파들 모두 적제의 눈치를 보는지라 정예 중의 정예들만 뽑아 보내왔다.
세 번째로 도착한 이들은 패도맹의 주력부대인 폭풍대였다.
패도맹의 본성을 지켜야 할 이들이 직접 움직인 것은 바로 적제의 명 때문이었다.
이렇듯 전 중원을 들었다 놓을 수 있을 만큼 엄청난 무사들이 오랑산 자락에 모이는 이유는 단순했다.
바로 제자 사랑이 남다른 적제를 위해서였다.
가장 먼저 오랑산에 도착했던 천검무사들과 적운을 대신해 그들을 임시로 책임지던 성 장로는 오랑산에 도착하자마자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는 중임을 직감했다.
산을 둘러싼 정체불명의 안개도 안개였지만, 어느 누구도 안개를 뚫고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패도맹에 긴급으로 지원을 요청했다.
사실 이렇게까지 일을 크게 키울 생각은 없었다.
그저 진법에 지식이 있는 문사를 몇 보내 달라는 정도였다.
한데 적제는 역시 화통했다.
아니, 제자 사랑이 너무 지나치다고나 할까?
최고의 경공을 지닌 파발무사들로 사천 땅의 이백여 문파에 긴급 파발을 보냈고, 먼 전선으로 임무를 떠나보냈던 귀천대에게 귀환을 요청했다.
게다가 그것도 모자랐는지 패도맹의 본성을 지키는 폭풍대의 절반을 출정시켰다.
애초에 경합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초운에게 경험을 쌓게 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섞인 일종의 속임수였다.
한데 보고를 듣다 보니 후계 수업이라 부를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검마의 경지는 문제될 게 없었으나, 그 정체가 문제였다.
추연희와 초운의 인연을 천검각을 통해 전해들은 적제는 물러터진 자신의 제자에게 큰 위기가 찾아왔음을 깨달았다.
게다가 오랑산을 둘러싸고 있다는 엄청난 규모의 결계는 아무리 봐도 함정임을 뜻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아는 한 진법의 최고수를 급파했다.
적제가 친히 보낸 진법의 최고수는 오랑산을 올려다보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정말이지 대단한 규모로군. 손이 참 많이 들었겠어.”
“그렇습니까, 대총사.”
새외에서 활동하던 시절.
그 이름만 들어도 우는 애가 이름을 그쳤다는 폭풍대주 종리백이 호위무사처럼 그를 따랐다.
그도 그럴 것이 적제의 오른팔이라 불리는 대 패도맹의 대총사 앞이다.
게다가 종리백은 패도맹의 전신인 귀천무단출신으로 마영의 진면모를 잘 기억하고 있었다.
정복욕의 화신이라 볼 수 있는 패왕 적제.
그의 곁에는 그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희대의 군사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마영이다.
스스로 절대경에 이른 고수이면서도 이를 자랑하지 않는다.
그는 절대의 무공보다 오히려 진법이나 기문둔갑 같은 잡술을 더 즐겨 사용했다.
그 잡술 또한 결코 무공에 떨어지지 않으니 적제가 그를 보낸 것도 이해가 가는 일이었다.
“해제 가능하겠소?”
그때 천검각의 성 장로가 걱정스러운 어조로 그에게 물어 왔다.
“안에서 걸어 잠근 문이니 그 주인이 허락하지 않는 한은 힘들 거 같습니다.”
“으음…….”
“그러나, 그건 제가 없을 때 얘기겠지요.”
“오오오.”
성 장로와 종리백이 과장되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마영의 성격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루 안에 저 안개를 말끔히 치워 버리겠습니다.”
“하루나…….”
성 장로가 실망한 듯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종리백이 급히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툭툭 치며 눈치를 주었다.
마영이 성장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응? 뭔가 대단히 실망스러운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아니오, 대총사. 잘못 들으신 거겠지.”
성 장로가 뻔뻔한 얼굴로 부정했다.
“흐음…… 그렇습니까?”
패도맹은 마영이 대부분을 관리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패도맹 본성의 살림은 물론이고, 맹이 지배 중인 영역과 전장에서 보내오는 수천 개의 정보들을 살피고, 지시를 하느라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판이었다.
게다가 제멋대로인 적제의 비위를 맞추느라 정신적으로 많이 피곤한 상태였다.
그런 그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바로 아부였는데, 조금이라도 자신이 뛰어난 인물임을 느끼고 싶어서였다.
실제로 하는 일에 비해 인정받는 경우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적제가 근엄한 아버지라면 마영은 집안 살림을 돌보는 게 엄마의 역할이었는데, 항시 하는 일들에 비해 과소평가되는 경향이 컸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업무 중엔 인사치레라도 아부를 듣고 싶어 했다.
그것을 잘 아는 종리백은 패도맹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 아직 눈치가 모자란 성 장로를 도와준 것이었다.
-그냥 무조건 오냐오냐 해주세요. 저 인간은 그럼 더 잘합니다.
-대총사가…… 생각보다 단순한 사람이로구먼.
-쌓인 게 많아서 그러니, 모르는 척해 주십쇼.
종리백과 성 장로 사이에 오간 전음이었다.
“음, 자, 기대에 부흥하기 위해서라도, 시작해볼까!”
마영이 의욕 충만한 얼굴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초운이 절대고수라 하지만 무적은 아니었다.
다행인 점은 괴물과도 같은 그의 체력 덕분에 지치진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행을 보호하면서 실혼인들을 상대하기란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적운의 부상이 좀 낫는다면 좋겠지만, 마기에 오염된 그의 부상은 심각해져 가기만 했고, 조유성은 그런 그를 지키느라 초운을 도울 수 없었다.
게다가 며칠 전 혼란스러운 와중에 제갈청이 불현듯 나타나 추연희를 데리고 가는 일이 벌어졌다.
천응 또한 사라진 지 오래였다.
보호해 달라며 먼저 다가온 것은 그쪽인데 왜 사라진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데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실혼인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그들을 쫓았기 때문이다.
잘 죽지도 않는 마물들이 끝도 없이 쫓아오자, 초운은 일행을 보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도망쳐야 했다.
가끔은 싸우기도 했지만 시간을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어느 순간 포위되었고 일행이 위험해졌다.
“짐이 되어버려 송구합니다…… 소공.”
“저는 괜찮으니 한시라도 빨리 마기를 몰아내세요, 적 각주님.”
초운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내심은 추연희 걱정에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그런 걸 얼굴에 드러낼 만큼 어리지 않았다.
그때 그들이 머무는 동굴 주변에 작은 진법을 설치하러 나갔던 조유성이 돌아왔다.
“잠깐 시간을 버는 수준입니다. 산 전체에 진법을 펼쳐 놓은 자 앞에선 어린애 장난 같은 수준이겠지요.”
“그러나…… 한 번쯤 모습을 드러낼 겁니다. 밖의 저 괴물들은 진법을 모르니까.”
초운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동굴 밖에 펼친 진법은 은밀한 것이 아니었다.
몸을 숨기기보다 오히려 이곳이라고 알리려는 의도가 컸다.
당하는 입장에서 벌이는 일종의 도박이랄까?
실혼인들은 지능이 없는 듯하지만 그 목적만큼은 명확했다.
바로 초운 일행과 천응들을 노리는 것이다.
실혼인들의 적아 구분이 확실한 만큼, 뒤에서 조종하는 자가 있다는 것이 조유성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덫을 놓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 * *
실혼인들을 통제하는 호결은 그가 형제라 부르는 실혼인들과는 조금 달랐다.
육체적인 성능이 뛰어나긴 했으나, 다른 이들처럼 선천지기를 무식하게 써서 수명이 줄어드는 부작용에 시달리지 않았다.
다만 그의 모든 능력은 정신 쪽에 특화되어 있었다.
바로 실혼인들의 집단의식을 장악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아직 실험 단계인 실혼인들과는 달리 그는 완성작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만큼 그의 통제 능력은 완벽에 가까웠다.
기문둔갑에 능한 제갈정오가 그를 세뇌해 보려고도 했지만 불가능했다.
의식의 구조 자체가 보통 사람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모든 실혼인들의 의식과 동조 중인 그의 정신은 방대하게 펼쳐진 거미줄과도 같았다.
게다가 그의 의식의 일부는 다른 실혼인들과 겹쳐 있는 상태였다.
그들 하나하나는 이지가 없는 실혼인에 불과하지만 정신을 한데 모아버무리면 또 하나의 호결이 존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것은 호결이 그들을 통제할 수 있는 비결이기도 했다.
수백에 달하는 형제들의 오감을 동시에 체감해도 그는 미치지 않고 그것을 정확히 분류하여 분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명정한 상태를 유지한다.
그것은 그가 본체의 의식만을 이용하는 게 아니라 실혼인들의 집단의식을 이용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수백 개의 뇌가 정보를 나누어 처리하고, 그걸 호결의 본체에서 정리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모든 정보를 호결 혼자 처리하는 것이었다면, 제아무리 괴물 같은 정신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부하가 걸려 머리가 터지고 말았을 것이다.
“몇몇 형제가 그들의 뒤를 쫓다 놓쳤습니다.”
“이유는 무엇인가.”
제갈정오가 물었다.
그는 잠시 눈을 감고 정보를 모으더니 곧 결론을 내렸다.
“진법입니다.”
“호오. 진법?”
제갈정오가 흥미를 드러냈다.
천응을 제외하고 진법을 사용하는 자가 있다는 것이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그 재주를 이제야 쓴다는 건, 뭔가 꿍꿍이가 있는 거로군.”
“네, 아마 유인책이 아닌가 싶습니다.”
“유인책? 하긴…… 실혼인들은 진법을 풀지 못하니. 결국 나를 불러내기 위함인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개인적으로는 반대합니다.”
그의 의견에 제갈정오가 고개를 저으며 일어났다.
“지금 산 아래 얼마나 많은 무사들이 와 있는 줄 아는가? 패도맹에도 인물은 있을 테니, 진법이 언제 파훼될지는 모르는 일이고……. 지금 움직여야 하네.”
“…….”
“실혼인들을 다 모아 그들 앞에 진을 치게.”
“알겠습니다.”
제갈정오는 이제 승부를 걸어야 할 때라고 믿었다.
몸을 숨긴 천응이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나 수백의 실혼인들 앞에선 쓸 수 있는 수가 그리 많지 않다.
아마 초운을 치는 동안 기회를 엿보아 자신을 노릴 테지만, 그가 펼치는 현인마공 따위는 무섭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