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향 155화
제갈청의 볼을 쓰다듬던 아름다운 얼굴의 소년이 중얼거렸다.
“신마께서 이럴수록 난 더 삐뚤어질 텐데 말이야.”
그리 말하는 소년의 주변엔 시신이 넘쳐 났다.
곽호가 그를 감시하기 위해 보낸 무사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천응의 광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최근 들어 광기를 마음껏 표출하는 중이었다. 천응은 제갈청의 턱 선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이며 말했다.
“제자 다루는 법에 서툰 탓일까? 안 그래, 제갈청? 키킥.”
“…….”
그러나 이지를 상실한 마인이 대답할 리 없다.
천응은 그런 그의 회색 눈동자를 쳐다보다 곧 시선을 돌렸다.
시선의 끝에 한 여인의 모습이 들어왔다.
“추연희. 아니, 이젠 검마(劍魔)라 불러야 하나? 조금 더 날뛰어 줘. 많이 죽일수록 녀석이 빨리 올 거야. 알았지?”
“…….”
멍한 눈빛의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의 의지가 아닌, 천응의 괴뢰술에 의한 결과일 뿐이다.
그녀의 의식은 이미 마음속 깊은 곳에 묻힌 채 죽어 가고 있었다.
아마 이대로 세월이 흐른다면 제갈청처럼 완전한 꼭두각시로 변하고 말리라.
천응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잠재웠다.
이제 누가 진짜 제자인지 가려질 것이다.
초운의 심장을 꺼내 곽호의 눈앞에 들이대며 그의 표정을, 호흡을, 그리고 마음을 살피는 것.
천응이 가장 기대하고 있는 미래였다.
* * *
천검단이 지정된 지역에서 모은 정보는 하루 이틀 안에 적운의 손으로 들어온다.
이에 경쟁이라도 하듯 패도맹의 정보 조직 신안의 요원들도 정보를 모아 초운에게 보냈다.
덕분에 일행은 느리게 움직이는 중임에도 사천 땅의 상황이 손바닥처럼 훤했다.
그러던 차에 충격적인 소식이 초운에게 전해졌다.
그것은 바로 당철과 그 조력자들이 검마에 의해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현재로선 누구 하나 생사를 확인하기 어려운 상태였고, 현장에 남은 것은 사투의 흔적과 시신들뿐이라는 소식이었다.
급히 길을 나서기 시작한 초운 일행과 백여 명의 천검들은 잠을 줄이면서까지 강행군을 시작했다.
지나는 곳마다 패도맹의 영역이니 모두가 그들을 환대했고, 이미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인 ‘소맹주’의 얼굴을 보기 위해 여러 방파에서 초대해 왔다.
당연히 모두 거절했다.
그렇게 해서 사흘 만에 도착한 곳이 바로 면양(綿陽)이었다.
면양은 2만 호가 넘는 가옥이 존재했고 인구도 10만에 달하는 곳이었으나, 지금은 태풍이라도 지나간 듯 폐허뿐이었다.
곳곳에 세워진 천막들 덕분에 그래도 난민들이 밤이슬은 피할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패도맹 분타의 재빠른 조치 때문이었다.
이곳의 분타주는 귀천무단 출신의 표량이라는 자였는데, 그가 아니었다면 검마와 당철들 간의 사투에 휩쓸려 수많은 양민들이 피를 흘렸을 것이다.
그는 사달이 벌어지자마자 주민들을 대피시켜 최악의 사태를 막아 낸 자로, 초운 일행이 도착했음에도 신경 쓰지 않고 커다란 솥 앞에 서서 난민들에게 음식을 퍼 주고 있었다.
“밥 떨어졌다. 다음 솥은 아직 멀었냐? 주민들 밥 굶는다!”
그가 뒤편에서 솥을 들고 오는 무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갑니다, 가요!”
표량이란 사내는 7척에 달하는 키에 배가 툭 튀어나온 모양새가 마치 거대한 곰과도 같았다.
인상도 녹림의 산적패처럼 생긴 것이 험악하기 그지없었지만, 밥을 얻어먹는 주민들 중 그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없었다.
무사들이 낑낑대며 솥을 내려놓자 그가 들고 있던 주걱으로 무사들의 머리통을 두드렸다.
“그 정도로 낑낑대다니! 평상시 단련을 게을리한 게 분명하군! 조만간 특훈이다, 알았냐!”
“으힉!”
무사들이 질색을 하며 도망쳤다.
이에 표량은 피식 웃으며 다시 밥주걱을 솥에 꽂았다.
표량과 그의 무사들이 하는 일을 지켜보던 적운은 이마를 찌푸렸다.
분명 기별을 보냈건만 아는 척도 하지 않는 모습이 불쾌했기 때문이었다.
“무례한 자로군요.”
적운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하지만 초운은 그런 그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 듯했다.
그는 두 팔을 걷어붙이더니 표량을 향해 다가갔다.
“소, 소공!”
“이보게!”
이에 당황한 적운과 성 장로가 그 뒤를 따랐고, 조유성이 미소인지 무표정인지 분간하기 힘든 표정을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초운은 표량의 앞에 도착하자마자 텅 비어 밥풀만 약간 남아 있는 무쇠솥을 한 손으로 번쩍 들었다.
그가 표량을 향해 물었다.
“이건 어디에 치우면 되지요?”
“저 뒤에 설거지하는 놈들에게 던져 주면 될 거유.”
“그럼 갖다 두고 올게요!”
“그, 그러시구려.”
초운이 너무도 당당히 말하자 표량이 더듬거리며 답했다.
‘보통 놈이 아니로군.’
힘 좋은 자신조차 저 일백 근짜리 무쇠솥을 들 땐 이마에 핏줄이 돋건만, 저 애송이는 바가지 들듯 손쉽게 들어 올렸다.
내공을 운용한 것 같지도 않은데 저 정도라니……. 내공을 운용하면 어느 정도 효율을 보여 줄지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
그때 곁에 있던 적운이 ‘소공, 제발 체통을…….’하고 짧게 중얼거리더니 그에게 물어왔다.
“……표 분타주, 우린 무얼 하면 되겠소.”
그의 물음에 표량의 얼굴색이 밝아졌다.
가뜩이나 일손이 부족하던 터였다.
“주민들 중에 부상자가 제법 많소. 그러니 가서 의원들 수발 좀 들어주시구려. 의술을 아는 자가 있으면 더욱 좋고.”
적운은 일백 명의 천검들을 불러 모아 주민들을 돕도록 하였다.
다행히 그중엔 의술을 아는 자도 제법 섞여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
* * *
표량이 초운에게 정식으로 인사를 올린 것은 늦은 저녁때였다.
“누추한 곳에 머무르게 하여 미안하외다, 소공.”
“이불을 훔쳐다가 남의 집 지붕 위에 깔고 자던 때도 있었는걸요. 이 정도면 호화롭죠.”
초운 일행이 머문 곳은 작은 장원의 넓은 마당에 세운 천막이었다.
장원 내부는 전각이라 할 만한 것은 대부분 반파되어 기둥만 몇 개 남아 있었고, 담벼락 또한 돌무더기로 변해 있었다.
이곳이 장원이라는 것도 표량이 말해 주지 않았으면 몰랐을 것이다.
표량은 어디서 구한 건지 술병을 몇 개 들고 와서 초운 일행에게 건네며 말했다.
“궁금한 것이 많겠지요?”
그는 술병을 들고 벌컥벌컥 마셨다.
반쯤 마신 술병을 한숨과 함께 바닥에 내려놓은 그가 입을 열었다.
“팔백이오.”
“네?”
다짜고짜 숫자를 얘기하니 초운이나 적운 등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애꿎은 생목숨이 팔백이나 떨어져 나갔다는 얘기요. 그 망할 놈의 당가 새끼와 검마 년 때문에.”
표량의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 * *
이미 한 달 전부터 면양에선 밤마다 살인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
무공을 익힌 무사든 무공을 모르는 무사든, 무차별적으로 행해지는 살인으로 인해 면양은 공포로 휩싸였다.
면양을 관리하는 패도맹 분타주 표량은 흉수를 찾기 위해 밤낮으로 노력했으나, 늘 허탕을 치기 일쑤였다.
당연히 민심은 날이 갈수록 나빠졌고, 급기야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여 고발하는 경우가 속출했다.
범인으로 의심되어 고발당한 이들을 표량이 직접 조사를 해 보았지만 모두 범인이 아니었다.
그렇게 점점 희생자가 늘어 가고 있을 때, 표량과 분타의 무사들은 드디어 범인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었다.
바로 사천의 변경을 뒤흔드는 사악한 검객.
검마였던 것이다.
그나마도 첫 희생자들의 시체들이 보름도 안 되어 살점 하나 안 남기고 썩어 문드러졌기 때문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패도맹의 영역 안에서 그 같은 사달을 벌이는 마인은 오직 검마 하나뿐이었으니, 범인을 짐작하기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급히 파발을 띄워 패도맹에 보고를 올렸다.
한데 문제는 그 파발을 중간에 가로챈 이가 당철이었다는 데 있었다.
패도맹에서 당철의 입지는 매우 불안했다.
이는 스스로도 잘 알고 있는 현실이었다.
그의 배다른 동생은 살왕의 손녀를 건드리려 했고, 이를 말리려던 장왕의 제자를 공격했다.
가장 컸던 것은 바로 그의 아비가 패도맹에 쳐들어와 그 무서운 적제 앞에서 행패를 부린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 두 번째 경합을 큰 기회로 여겼고, 조력자를 구하기 위해 천금을 들여 사람을 샀다.
그러자 놀랍게도 자신의 경쟁자인 초운을 노리는 두 단체가 조력자를 보내왔다.
어린애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심정이었던 그는 어쩔 수 없이 정의회의 검풍대와 오대세가의 척살대를 조력자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상당한 노력 끝에 검마의 흔적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들이 움직이던 경로에서 표량의 파발과 마주친 것이다.
그는 파발무사에게 자초지종을 물었고, 검마에 대한 정보를 얻어 낼 수 있었다.
파발무사는 한시가 급한 와중에 많은 무사를 이끄는 패도맹의 인물을 만난 터라 적극적으로 안내했다.
그렇게 당철과 그가 이끄는 무사들이 면양에 들어서자 면양 사람 모두가 기뻐했다.
그중에는 표량도 있었다.
솔직히 말해 천운이라 여길 정도였다.
당철은 바보일지라도 그가 데리고 온 당가십수의 위명은 상당했고 당철 또한 초절정의 고수였다.
게다가 그의 조력자들은 하나같이 절정 이상의 고수들이었다.
그러니 그들이라면 검마를 잡아 도시 주민들에게 평안을 가져다주는 것도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철과 그 일행들은 주민들의 안위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그들의 목적은 오직 검마를 잡는 것뿐이었다.
* * *
쿵---!
이야기 중에 흥분한 표량이 그 커다란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들썩였지만 지금 천막 안에 있는 이들 중 그보다 하수는 없었기에 누구도 놀라지 않았다.
다만 그의 분노에 어느 정도 공감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 당가 애송이는, 백성을 백성으로 보지 않았소! 자기 출세를 위한 도구 정도로 여겼지.”
“그 바보가 무슨 짓을 했기에 그러시나.”
성 장로가 묻자 표량이 이를 뿌드득 갈며 말했다.
“사람들을 미끼로 던졌소이다.”
* * *
당철이 면양에 들어선 후로도 그리 변한 것은 없었다. 사람들은 희망을 가졌지만, 정작 그날에도 살인 사건은 어김없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당철 일행이 알게 된 것은 검마가 어린아이나 젊은 여인의 피를 더 좋아한다는 것과 사냥이 쉬운 것을 먼저 죽인다는 것이었다.
당철은 조급했다.
초운 일행이 언제 면양으로 올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아시겠소? 당신은 그저 주민들에게 우리의 계획을 알려 주면 되는 거요.”
당철의 조력자인 남궁도였다.
“그럴 수는 없소! 어찌 우리 일에 양민을 끌어들인단 말이오!”
“내 말하지 않았소? 그들은 그저 미끼일 뿐, 위험한 순간에 우리가 나타날 것이니 괜찮을 것이오.”
“그래도…….”
“표 분타주께선 검마를 잡고 싶지 않나 보구려?”
“으음…….”
표량은 갈등하였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건 아닌 것이었다.
“남궁가의 남궁도는 양민을 소나 말 같은 가축 정도로 취급한다더니 틀린 말이 하나 없구려.”
그러자 남궁도가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답했다.
“칭찬으로 듣겠소.”
그는 남궁세가의 방계 중에서도 천재로 통했다.
스스로의 재능만으로 쌓아 올린 것에 자부심이 강했고, 세상은 자신과 같은 뛰어난 자들에 의해 돌아간다고 믿었다.
때문에 능력이 없는 자들은 쓰레기 취급하기 일쑤였다.
당철이 그를 조력자로 삼은 것도 사실은 그 뛰어나면서도 비정한 심성 때문이었다.
표량이 거부 의사를 확실히 했지만, 남궁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끌고 온 척살대의 무사들을 통해 자원자를 모집한다는 벽보를 붙였고, 상당한 보상을 약속했다.
무사들이 지켜 준다고 약속하니 위험 부담이 없는데다, 보상도 상당한 터라 주민들 중에는 혹하는 자들이 많았다.
표량이 주민들을 말려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수백 명의 주민들이 자원하여 몰려들었고, 당철은 그들 중 검마가 좋아할 만한 특징을 지닌 열 명을 골라냈다.
미끼를 얻은 당철과 그 일행들은 서둘러 계획에 착수했다.
그들은 자원자 하나하나를 야경꾼으로 위장하여 도시의 곳곳에 홀로 배치시켰고 열 명의 무사들이 그들을 지켜보게 하였다.
결과부터 얘기하자면 계획은 아주 잘 맞아떨어졌다.
검마는 이지가 없는 마인이기 때문에, 사냥을 본능에 의존하는 바가 컸다.
그래서 그는 쉬워 보이는 사냥감을 노렸고 야경꾼으로 위장 중인 주민은 순식간에 살해당했다.
지켜보던 무사들 중 어느 누구도 주민을 돕지 않았다. 마인을 상대하기엔 열 명의 무사로는 위험할 수도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들은 검마를 발견하자마자 불꽃을 쏘아 올려 지원을 부르는 것이 임무였지, 주민을 구하는 것은 애당초 계획에 없었다.
그들의 상관인 척살대주 남궁도가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검마는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고, 당철의 인생은 좀 펴지는가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