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향 152화
이번 경합에서 적제는 자신의 제자를 노골적으로 편애하는 중이었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대전회의에서 자신의 권력에 도전하는 자는 사랑하는 제자라 해도 용서치 않는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버렸기에, 그의 노골적인 편애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는 없었다.
이를 두고 대총사인 마영은 이렇게 평했다.
“팔불출…….”
“응?”
“그날 일로 인해 간부들의 아부가 하늘을 찌를 듯합니다. 제 처소에는 소속 방파에서 보내온 뇌물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지요.”
적제의 오른팔로 불리는 마영이니 뇌물은 당연한 것이었다.
적제는 귀를 후비며 말했다.
“잘 보관하였다가 늦장가 가거든 써먹게.”
마영이 한숨을 내쉬며 다시 말했다.
“……너무 공포를 심어주면 곤란합니다. 훗날 소공께서 자리를 이으셨을 때 분란의 씨앗이 될 수도 있어요.”
폭군이라 할 수 있는 적제에 비해 초운의 성격은 유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니 적제가 권력을 넘겨주고 나면 초운을 얕잡아 보는 이들이 생길 수도 있었다.
폭군 앞에서 숨도 한 번 못 쉬며 살다가, 초운과 같은 부드러운 이를 주군으로 모시면 다들 제 세상을 만난 듯 할 테고, 어쩌면 누군가는 딴마음을 품을 수도 있다.
적제와 마영이 원하는 세상을 이루기 위해서는, 못해도 오백 년 이상은 갈 권력 구조가 필수였다.
그러니 마영의 걱정도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들의 대에서 애써 이룬 것들이 다음 대에 무너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자넨 초운이 패도의 그릇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능력은 믿어 의심치 않으나…… 워낙 상냥한 성격이시니…….”
“검귀라는 옛 별호는 녀석이 도박장에서 주사위 굴리다 얻은 게 아닐세. 내가 없어도 잘할 게야. 그리고…… 초운이는 어릴 때부터 독특한 구석이 있었지.”
“독특하다 하심은?”
“재능이 없어서 배우는 게 느렸지만, 날 실망시키진 않았다는 얘길세. 콩을 심으면 콩이 나고 팥을 심으면 반드시 팥이 나지. 결코 다른 길로 가진 않아. 패왕의 길을 가르친다면 패왕이 될 것이야.”
“패도지상으로 보이진 않았습니다만…….”
“말이 그렇다는 얘길세. 그리고 녀석이 굳이 나와 같은 패도를 걸을 필요 있나? 피로 얼룩진 정복은 녀석의 길이 아니야. 모든 것은 내가 짊어지고 가고, 녀석은 평화로운 세상을 다스리면 돼.”
“이번 대에 모든 것을 끝내실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소공께 복수의 기회를 주시기로 하신 것 아니었습니까?”
“나 또한 화산 문하일세. 곽호에 대한 원한은 초운 못지않아.”
적제가 권력욕이 없는 초운을 후계자가 되게끔 구슬릴 수 있었던 것은 스승으로서의 권위도 권위였지만, 현실적인 문제를 인식시켜주었기 때문이다.
초운이 혼자 몸으로 마인들의 소굴이 되어버린 화산을 무사히 오를 가능성은 전무했고, 그것은 이미 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문득 적제의 나른해 보이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그의 눈은 매의 눈동자처럼 날카롭게 빛났다.
“……그리고 나는 탐욕스러운 패왕. 내가 모든 걸 집어 삼키지 않는 한…… 만족할 리가 없지.”
마영은 저것이 적제의 본심임을 알았다.
곽호에 대한 원한? 그것은 별개다.
실제 그의 속마음은 세상의 정점에 서고 싶어 하는 권력욕뿐이다.
그는 자신의 패도에 거슬리는 자가 있다면 모조리 짓밟고 무너뜨릴 것이다.
그 광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는 오직 제자인 초운뿐이었다.
만약 당철이나 도수룡이 후계였다면 그들은 그의 패도에 먹이가 되고 말리라.
마영은 초운의 존재가 적제의 패도에 걸림돌이 될까 걱정했었지만, 그의 본성을 또 한 번 확인하고 안심할 수 있었다.
그가 주군으로 모시는 자는 천하를 뒤엎을 패자.
하늘이 그 운명을 결정지은 패왕이었다.
세상에 패도지상(覇道之相)은 많다.
그들은 노력 여하에 따라 지배자가 될 수도, 되지 못할 수도 있다. 그저 씨앗과도 같은 상태인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범주였고 개인이 숙명적으로 타고난 힘이나 성정에 불과하다.
그에 비해 적제는 패왕의 상이었다.
어떤 식으로 흘러가든 패왕이 될 수밖에 없는 ‘천명’을 타고난 것이다.
인위적인 방해로는 결코 막을 수 없는 하늘이 점지한 지배자.
오래전 하늘이 천마(天魔)에게 파멸의 운명을 부여하고 국가라는 체제를 멸망시켰듯, 지금의 하늘은 이 붉은 제왕에게 군림이라는 운명을 부여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운명의 흐름. 마치 강이 바다로 흘러가듯 미리 정해진 ‘결과’였다.
고대부터 마영의 일족은 하늘을 읽고 그 뜻을 좇아왔다. 그러니 얼마 남지 않은 일족의 후손인 그가 하늘이 내린 패왕을 따르는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그는 모든 걱정을 접고 그의 주군 앞에 고개를 숙였다.
“모든 것은 주군의 뜻대로…….”
二章
“아, 출발 전에 잠깐 들를 곳이 있는데…….”
“예? 어딜 말입니까?”
적운의 물음에 초운이 뒤통수를 긁으며 답했다.
“검을 너무 오래 맡겨둔 것 같아서요.”
“검…… 말입니까?”
그렇게 초운 일행과 그 뒤를 따르는 백인의 무사들은 당가타로 향했다.
* * *
땅! 따당---!
검은색의 망치가 붉게 달아오른 쇳덩이를 내려칠 때마다 불똥이 꽃처럼 피어올랐다.
그 불꽃을 두 눈동자에 담은 채 열심히 망치를 휘두르는 이는 아직 약관도 되지 않은 소년이었다.
소년의 이름은 당현으로, 당가의 방계이며 본가의 장인들조차 혀를 내두를 만큼 뛰어난 기술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그가 본가의 장원에 들지 않고 당가타에 대장간을 열고 사는 이유는 다른 장인들의 견제 때문이었다.
장인이라는 위치는 재능은 둘째 치고 무수한 노력이 뒤따라야 얻을 수 있는 법이다.
장인이 되기 위해 기술을 배우고 연마하기 위해선 그만큼 잃는 것도 많았으며, 그나마도 기술을 얻기 위해선 더럽고 치사한 일도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당현과 같이 어린 나이에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하여 남의 노력을 쉽게 넘어서는 존재는 환영받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당현이 재능에 의지해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재능이 노력을 가려 버릴 만큼 뛰어나니 문제였다.
견제가 심했지만 당현은 절망하지 않았다.
대신 당가타에 거주하는 모든 장인들의 꿈인 본가행을 포기했다.
그리고 자신이 있을 곳은 자신이 만들자고 생각했다.
누구도 자신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떠올린 방법이었다.
열다섯 소년은 부모와 가까운 몇몇 친척의 도움을 받아 대장간 거리의 귀퉁이에 작은 가게를 차렸다.
자신만의 공방이자 대장간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나이가 너무 어려서인지 소수의 단골을 제외하곤 손님이 없었다.
게다가 언제부턴가 단골들마저 그를 찾는 것이 뜸해졌다.
단골만큼은 조금씩 늘어나던 것이 줄어든 이유는 바로 본가 소속의 장인들 때문이었다.
무슨 심보인지 그들은 당현이 잘되는 꼴을 보지 못했다.
더구나 최근에는 당현이 독자적으로 개발한 기술을 빼내 가기 위해 노골적으로 접근해 오고 있었다.
철에 섞인 불순물을 최대한 제거하여 순도를 높이는 기술이었는데, 금속을 다루는 이들에게 있어서는 보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들의 발걸음은 오늘도 이어졌다.
“허험, 당현이 있느냐?”
헛기침을 하며 들어서는 이는 당현의 당숙부인 당포와 그의 세 아들들이었다.
당포 역시 당가의 방계 혈족이었지만 그는 본가의 금속 공방의 2인자였다.
당가에서 만들어지는 암기 중 6할 이상이 그의 손을 거친다 할 만큼 뛰어난 솜씨를 자랑하기도 했다.
“숙부님 오셨어요?”
당현은 잡고 있던 농기구를 내려놓으며 일어섰다.
농기구를 바라보던 당포의 얼굴에 순간 비웃음이 흘렀다.
그는 당현의 대장간을 둘러보며 이런저런 물건들을 만져보았다. 그리고 오만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장사가 잘 안 되나 보구나.”
“……네, 소질(小姪)이 아직 부족하여서.”
조카의 일감을 다 끊어버린 장본인이 바로 자신임에도 당포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깨너머로 배운 기술이니 뻔하겠지.”
그의 말에 뒤에 서 있던 그의 세 아들들이 키득거렸다.
그때 당포의 눈에 한 자루의 검이 들어왔다.
“이것은…….”
그가 검을 향해 손을 뻗으려 하자 당현은 자기도 모르게 그 앞을 가로막았다.
“이 검은…… 손님이 맡기고 가신 겁니다.”
“어허, 감히 내 앞을 가로막다니……. 건방지구나. 네 아비가 그리 가르치더냐?”
“…….”
당현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당포가 가진 권력은 방계 혈족 내에서 상당한 것이라 그에게 밉보이게 되면 본가의 공방에서 일하는 아비에게 불이익이 있을 것이다.
당포는 검을 뽑아 천천히 살펴보았다.
무게중심도 잘 잡혀 있고 날도 예리했다.
게다가 현기도 느껴지는 것이 제법 사연이 있어 보였다.
장인만이 명검을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훌륭한 고수가 제 몸처럼 여기며 몸과 마음을 다해 다룬다면 검에도 혼(魂)이 깃들어 명검으로 화한다.
당포는 이 검이 명검의 반열에 오른 것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기술 자체는 별것 없다. 그저 잘 만들어진 검이야. 하나 혼(魂)이 느껴진다는 것은 상당한 고수의 손을 탔다는 뜻이겠지.’
그가 당현에게 물었다.
“이 검의 주인은 나이가 어느 정도나 되어 보였지?”
“약관을 조금 넘긴 듯 보였습니다.”
“당가타의 사람이더냐?”
“이곳 출신은 아니었습니다.”
불안한 눈빛으로 대답하던 당현을 향해 당포가 고개를 끄덕였다.
볼수록 탐이 났다.
그가 장인이긴 하나 혼이 담긴 물건을 보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아니, 그 스스로가 그러한 물건을 만들어 낸 경우가 없었다.
게다가 주인이 젊다는 것은 이 검을 명검의 반열에 올려놓은 고수가 아님을 뜻했다.
아마도 우연히 얻었거나 조상의 것을 물려받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는 것은 자기가 무마할 수 있는 범위라는 것.
원래는 철의 불순물을 제거하는 기술을 빼내려 왔다.
그런데 뜻밖에 횡재를 한 듯하여 기분이 좋았다. 그가 검을 검집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이건 내가 보관해야겠군.”
“예? 아, 안 됩니다!”
“네겐 너무 과분한 물건이다. 본래 보물은 독이 되는 법이야. 당숙의 입장에서 너 같은 어린아이가 위험한 분란의 씨앗을 갖고 있는 것을 묵과할 수 없다.”
당포가 뒤돌아 나가려 하자 당현이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그건 손님이 제게 맡긴 물건입니다! 제 책임이에요!”
“시끄럽다.”
퍽---!
당현의 입술이 터지며 얼굴이 돌아갔다.
하지만 당현은 고통에 굴하지 않았다.
아비를 들먹여도 참았다.
그러나 한 명의 장인으로서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안 됩니다, 숙부님!”
옷자락을 쥔 채로 당현이 또박또박 말했다.
그러자 당포가 인상을 쓰며 외쳤다.
“어허! 네 이놈! 어서 놓지 못할까!”
당포의 아들들이 당현을 잡고 패기 시작했다.
“이 새끼! 어서 못 놔?”
“우리 아버지 놔 줘!”
“싸가지 없는 놈의 새끼!”
십오 세 소년이 버티기엔 과한 폭력이었다.
결국 당현은 힘이 다해 쓰러지고 말았다.
당포가 바닥에 쓰러진 당현을 비웃으며 말했다.
“꼴에 장인이라고 손님에게 신용이 떨어질까 두렵나 보구나. 그렇다면 그자한테 내게 직접 찾으러 오라고 하거라. 내가 잘 타이를 터이니. 뭐, 감히 당가 본가에 있는 공방에 쳐들어올 깜냥은 될지 모르겠지만. 하하하하.”
“아…… 안 돼…….”
당포는 쓰러져 신음하는 조카를 두고 밖으로 나갔다.
그의 세 아들들은 떠나기 전 당현의 복부에 발길질을 몇 번 더 한 후에야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