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향 151화
당철이 승리를 확신하며 웃고 있던 그때.
초운은 자신 앞에 나타난 인물을 바라보며 눈을 크게 떴다.
“아! 당신은…….”
그 인물은 초운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포권을 취하고 있었다.
초운은 감당할 수 없다는 듯이 그의 어깨를 잡고 일으켜 세웠다.
“당신이 제 조력자였어요? 서 사형이 아무런 언질을 주지 않아 몰랐어요.”
“말씀을 낮추십시오, 소공. 저는 이제 아랫사람에 불과합니다.”
“……그래도 그렇지.”
초운은 자신의 앞에서 충성심 가득한 눈빛을 보내오는 사내 적운과 그 주변의 약 백여 명에 이르는 무사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천검각의 무사들이 모두 동원될 줄은 몰랐네요.”
“새로 충원된 이들을 포함해 정확히 백 명입니다. 그리고 중원에 산재한 천검단의 정보 조직을 모두 사용할 수도 있지요. 이 모든 것은 오직 주군과 소공을 위한 것입니다.”
천검단은 그저 무사 집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방파였다.
강력한 무사들로 이루어진 부대.
이백 년이 넘도록 확충에 확충을 거듭한 정보 조직들과 요원들.
그리고 사악하다 의심되는 방파들에 침투시킨 간자들.
세상의 표면에는 무사들만 드러나 있으나 진정한 천검단은 정보 조직의 요원들과 간자들도 포함된 것이었다.
이들이 단순한 무사 집단이었다면 정의 수호라는 기치를 오랫동안 지켜 오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 악당들에 의해 진작 멸망을 당해도 당했을 테니까.
그런데도 그들이 대를 이어 오며 정의라는 이름의 광기를 불태울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자생할 수 있을 만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철저한 비밀이었다.
비밀이었기에 그들은 한낱 무사 집단으로 위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천검단의 비밀은 깨지고 말았다.
바로 당대의 검주인 적운에 의해서…….
무림맹 시절에도 밝히지 않았던 천검단의 비밀을 어찌하여 패도맹주에게 공개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악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던 한 조직이 초운의 조력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인즉.
초운이 권력의 핵심이 되어 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아무리 세상사에 어두운 초운일지라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사부님은 내가 정말 패도맹주가 되기를 원하시는구나.’
권력욕이 없는 초운으로서는 사부의 의중을 알고 있으면서도 당황스러웠다.
존경하는 사부이니 따르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고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사부가 만들어 준 길을 걷기만 하면 되는 그런 상황이다.
하지만 불편했다. 자신의 생각과는 다르게 너무 밀어붙이는 것 같았다.
마치 지난 세월 동안 해주지 못했던 것들을 한꺼번에 보상하려는 듯했다.
그때 적운이 상념에 빠진 그를 깨웠다.
“천검단뿐만이 아닙니다.”
“지금도 차고 넘치는데 또 있어요?”
적운이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돌리자 초운 또한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한 사내가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소공.”
갈색 무복의 사내는 훤칠한 키에 선비와 같은 인상이었다.
하지만 표정이 아예 없다시피 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당최 읽을 수가 없었다.
그쪽에서 먼저 아는 체를 하였지만 초운은 잠시 어리둥절했다.
낯익은 얼굴이었지만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그는 그의 정체를 떠올릴 수 있었다.
“아, 귀천대의…….”
“조유성이라고 합니다. 그저 지나가다 몇 번 인사를 드렸을 뿐이라 기억하기 어려우셨을 겁니다.”
조유성이라 자신을 밝힌 사내의 말은 사실이었다.
초운과 그의 만남은 이제 겨우 세 번째였다.
그나마도 다른 귀천대원들과 함께 있을 때 스치듯 인사했던 것이라 초운이 기억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그만큼 그의 존재감은 적었다.
“귀천대는 모두 임무에 갔다고 들었습니다만.”
“동료들은 다들 전장에 나가 임무를 수행 중이지요. 저 역시 소공을 모시라는 개별 임무를 수행 중일 뿐입니다.”
“이런…… 제가 폐를 끼친 건가요?”
“아닙니다. 임무는 절대적인 거니까요.”
그의 표정은 바위처럼 딱딱하기 그지없고 목소리마저 높낮이가 없어서 마치 인간이 아닌 인형과 이야기하는 기분이었다.
그래서인지 초운은 그가 동료들을 따라가지 못해 화가 난 건가 하고 착각을 했다.
적운이 그런 그의 생각을 읽었는지 전음을 보내왔다.
-원래 저런 자입니다. 우리도 말을 걸어 보았지만 딱딱하기 그지없더군요.
-그렇군요.
초운은 고개를 끄덕이다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어 적운에게 물었다.
“그런데 벽호 님과 성 장로님은 어디 계시는 거지요?”
“벽호는 당분간 맹에 남아 천검각을 지킬 겁니다. 하지만 성 장로께서는 이번 여정을 함께하시기로 하셨지요. 지금은…… 그래, 염탐을 하러 가신다고 하셨습니다.”
“염탐이요?”
“네, 염탐입니다.”
적운이 씩 웃으며 답하였다.
* * *
“에헴헴. 꽤 많이 모으셨구먼, 당 공자.”
“천검각의 각주께선 분명 거절하셨는데 성 장로께서 여긴 어인 일이십니까. 혹, 각주께서 마음을 바꾸시기라도…….”
갑자기 등장한 성 장로로 인해 당철은 의아해 하는 중이었다.
눈앞의 노인은 도도문이라는 사파의 장로였던 성수.
일명 성 장로로 더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는 반천련에 속한 사문을 뒤로하고 의리 하나로 천검단에 몸을 의탁한 자였는데, 천검단의 간부들도 그를 천검단원으로 받아들인 지 오래였다.
그래서 그는 이제 도도문의 성 장로가 아닌 천검각의 부각주이자 패도맹의 신입 장로였다.
그런 자이니만큼 당철도 그를 우습게 볼 수 없었다.
“어…… 그런 건 아니고, 그저 잠시 할 얘기가 있어 들렀다네.”
“하명하시지요.”
당철이 최대한 공손히 말했다.
“자네에겐 안타까운 소식이네만, 우리는 초운 공자를 돕기로 결정하고 말았다네.”
쿠쿵!
순간 당철은 자기 가슴이 내려앉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졌다.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천검각은 분명 중립을 지키기로…….”
“그러기로 했는데, 위에서 내려온 명령이라 어쩔 수 없었다더군.”
“매, 맹주께서 직접 명하셨단 말입니까?”
“그런 거지.”
성 장로는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천검단이 움직인 것은 어디까지나 서평의 설득에 넘어간 적운의 판단 때문이지, 적제의 명령은 애초부터 없었다.
그는 그저 당철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나저나 자네들이 저 무사들을 이끄는 자들인가?”
너무 놀란 나머지 경황이 없던 당철은 자신의 조력자에게 말을 거는 성 장로를 막지 못했다.
육평이 먼저 그에게 포권하고 남궁도가 그 뒤를 이었다.
“육평이라 합니다, 선배.”
“남궁도입니다.”
그들의 이름을 들은 성 장로의 낯빛이 살짝 굳었다가 곧 능글맞은 미소로 바뀌었다.
“귀에 익은 이름들이군. 분명…… 소공자가 검귀라 불리던 시절에…….”
남궁도와 육평은 아차 하는 심정으로 표정을 굳혔다.
당철의 좁은 입지가 더욱더 좁아질 빌미를 제공하고 만 것이다.
게다가 이미 몇 달 전 적제를 직접 목격했던 그들로선 정체가 밝혀지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육평과 남궁도가 이곳에 온 이유는 어디까지나 초운을 잡기 위해서이다.
그러한 계획이 사전에 밝혀져 패도맹에 쫓기는 일은 사절이었다.
때문에 그들이 순간 떠올린 단어는 바로 살인멸구였다. 하지만 그들의 살기를 읽은 당철이 저지했다.
-그만둬.
그의 전음을 남궁도가 받았다.
-우리의 정체가 까발려지면 너에게도 좋지 않아.
-맹주께선 어떠한 조력자도 좋다고 하셨다. 규칙이 번복되지 않는 한은 안전해. 그리고 맹의 사람을 건드리는 건 내가 용납 못한다. 그렇게까지 타락하진 않았으니까.
-검귀를 우리에게 넘기지 않을 생각인가?
-거래 내용을 다시 말해줄까? 자신 있다면 시도해 봐. 대신 난 책임지지 않는다.
남궁도는 말을 잃었다.
그들은 그저 검귀에게 접근이 가능한 틈을 원했고, 당철은 그 틈을 제공해 줬을 뿐이다.
검귀를 잡는 데 적극적으로 협력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은 것이다.
육평의 검풍대나 남궁도의 일백결사대나 아쉬운 입장이었다.
그러니 불리한 조건일지라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두 명이 어정쩡한 자세로 성 장로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는 경험 많은 노강호답게 씩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것이 신호였는지 천검단의 무사 다섯이 멀지 않은 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육평과 남궁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잘 멈추었네. 날 끝장내려 했다면 저들이 맹에 알렸을 테고, 그럼 자네는 물론 당 공자까지 죽었겠지.”
“…….”
그는 당철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이왕 하는 거 깨끗이 하세, 깨끗이. 이런저런 잡놈이 끼어들면 지저분해지지 않겠는가.”
“…….”
성 장로는 당철의 어깨를 두드리며 등을 돌렸다.
“건투를 빌겠네.”
그가 사라지자 당철은 육평과 남궁도를 노려보며 말했다.
“내가 후계가 될 때까진 초운에게 허튼짓하지 마. 안 그랬다간 지옥 끝까지 쫓아가 죽여 버릴 테니까.”
당철이 요즘 들어 바보로 불리고 있지만, 원래는 육평이나 남궁도보다도 먼저 강호에서 이름을 날린 고수였다.
지닌바 무공 또한 두 사람보다 강했다.
그런 자가 마음먹고 살기를 흘리니 육평과 남궁도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잔뜩 무거워진 분위기 때문인지 남궁도가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놀랍군. 그 고고한 천검단주가 검귀의 편을 들다니.”
“검성으로 이름 높은 패도맹의 신성이니까.”
당철이 그의 의문을 풀어주었다.
그러자 가만히 있던 육평이 끼어들었다.
“검성? 검귀가 아니라?”
“절대경에 이른 강자이니 그 정도 별호는 당연하지.”
“하긴, 그 나이에 절대경을 이룬 괴물이라면…….”
남궁도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이에 당철은 약간 뜸을 들이다 두 사람에게 물었다.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건데……. 너희들 정말 그 괴물을 잡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건가?”
육평과 남궁도는 대답할 수 없었다.
계획이 있어 숨기는 것이 아니라 정말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초절정일 때도 잡을 수 없었는데 절대경에 이른 자를 무슨 수로 잡겠는가.
그나마 가까이라도 있으면 무슨 수가 생기지 않을까 하여 당철과 거래를 한 것이다.
둘은 짜기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한숨을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