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향 149화
초운은 그들 사이에 끼어 함께 웃었다.
사형들은 초운과 함께 매화나무 아래서 검을 수련하였으며 여름에는 멱을 감기도 했다.
곽호의 손에 죽은 어린 사제들과는 강으로 가 함께 낚시를 했다.
행복한 날은 그렇게 계속될 것 같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어느 날 그들은 모두 떠날 준비를 하였다.
초운은 함께 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들이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소소(笑笑) 사형, 이제 외로워하지 말아요.’
어린 사제 중 하나가 손을 흔들며 말했다.
초운은 대답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꿈이 계속되는 동안 그들과는 단 한마디도 나눌 수 없었다.
그들은 계속 말을 하는데 자신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다른 아이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사형, 우리 나중나중에~ 이따만큼 많은 밤이 지나면 만나요.’
초운은 눈물을 흘렸다.
또 다른 사제가 그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눈물을 닦아 주었다.
‘안녕, 사형. 행복하게 살아 주세요.’
‘득도~ 하세요~’
‘안녀엉~’
서로 손을 부여잡은 아이들은 놀이를 하듯 초운의 주위를 둥글게 돌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과거 초운이 가르쳐 주었던 노래였다.
화산에는 하나의 바람(風)과 하나의 향(香) 있어~
하나의 바람은 매화 잎 허공을 노닐 듯 부드러운 유(柔)의 극의(極意)라~
그 일보(一步) 무당의 유수행(有水行)에 버금가고~
그 바람 타고 퍼지는 매화 향(梅花香) 있어~
한 번 펼치면 떠난 자리 향기만 남으니~
이는 신선(神仙)의 걸음이며, 인세에 남은 축지(縮地)의 비의이리라~
사제들의 모습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아이들의 노래는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지만, 몸이 희미해져 가는 만큼 목소리도 희미해져 갔다.
‘가지 마……. 가지 마…….’
초운은 사제들을 부르고 싶었지만 목소리는 아직도 나오지 않았다.
모든 이들이 떠날 때쯤 따듯한 기운이 그를 감쌌다.
그리운 느낌에 고개를 든 초운이 콧물을 훌쩍이자, 누군가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는 놀랍게도 황현 사형이었다. 아직 마인이 되기 전의 모습이었다.
그가 초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모두 널 원망하지 않으니…… 이제 내려놓으렴. 너는 너의 길을 가.’
초운은 대답할 수 없는 대신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잊을 수 없었다. 잊고 싶지 않았다. 잊으면 다시 외로워질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너무도 이기적인 인간의 마음이 그를 집착하게 하였다.
인간을 사랑하는 그는 혼자이고 싶지 않았다. 늘 인간과 함께이고 싶었다.
문득 느껴지는 뜻 모를 이질감에 초운은 몸을 떨었다.
눈을 떠보니 황현 사형도 무엇도 없는 그저 텅 빈 공간, 그 공간에 홀로 서 있었다.
그러다 깨달았다.
자신은 조금 전 인간답지 않았다는 것을…….
인간이라면 결코 인간을 사랑한다는 말을 쓰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과는 다른 존재가 인간을 특정 지을 때 쓰는 말투였다.
인간을 사랑하는 개나 고양이가 사람처럼 말을 한다면 아마 초운처럼 말했으리라.
그러나 이것을 깨달았을 때, 그가 있던 빈 공간…….
스스로의 마음이 만들어 낸 공허의 심상(心狀)이 뒤흔들렸다.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가 공간을 뒤흔들었다.
‘…… 덕(悳)을 쌓아라.’
‘덕(悳)? 무슨 소리야? 누구지?’
목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검을 들어…… 덕(悳)을 쌓아라.’
이는 평범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언젠가 들은 적이 있는 마음의 소리.
이윽고 흔들림이 멈추었다. 그러며 공간의 중앙에 한 한 자루의 검이 나타났다.
그저 순수한 빛, 아니 바람의 덩어리인 그것은 검의 형태였다.
목소리는 바로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이는 검명(劍鳴)이었다.
초운은 조용히 오른손을 뻗어 검을 움켜잡았다.
그가 오른손을 번쩍 쳐들며 현실에서 깨어났을 땐 한 달이 지난 후였다.
상념에서 빠져나온 초운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의 그 감각을 다시 느껴 보고 싶었지만 검을 잡은 이후의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허탈한 웃음을 뒤로하고 그는 다시 잠을 청했다.
* * *
패도맹은 최근 누군가의 도전으로 인해 체면을 크게 구기고 있었다.
사천과 섬서의 경계에 위치한 패도맹 측의 방파들을 누군가 깨부수고 다니는 듯했는데, 도무지 범인을 찾아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확실한 것은, 그 주인공이 바로 마인이라는 점이었다. 그 자리에서 양산된 흡정마인들의 시신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해 문파의 시신들은 정기를 빨린 듯 보이지 않았다.
흡정마인의 습격이라 치기엔 검상의 흔적도 너무 많았다.
게다가 보통의 흡정마인이라면 시신들의 골수까지 다 빨아먹지, 이렇게 온전히 두지도 않는다.
몇몇 방파들은 그 이름 모를 흉수를 향해 성급하게 별호를 붙였는데, 바로 검마(劍魔)였다.
소속의 문파들이 당하는 터라 패도맹이 나서야 할 때였지만 이상하게도 말은 없었다.
그러다 얼마 전 정기 대전 회의에서 그에 대한 안건이 나왔고, 금세 결과가 정해졌다.
바로 후보자들 간의 두 번째 경합 주제를 그것으로 정하자는 것이었다.
이른 바 검마 사냥.
참가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길고 힘들었던 시간으로 기억될 두 번째 경합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 * *
“미끼를 물었습니다.”
“길기도 하네.”
천상련의 정보 조직을 잠시 빌려 이용하던 천응은 원하던 소식을 들었는데도 기분이 나빴다.
목표물이 너무 늦게 밖으로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정보를 가져다준 요원이 말했다.
“목표물이 얼마 전에야 상세가 회복되었다고 합니다.”
“허약한 놈이군. 알았어, 넌 그만 가 봐.”
정보 요원은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사라졌다.
마인이 아닌 요원으로서는, 밥 먹다가 밥풀을 떨어뜨렸다는 이유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존재들과 한 장소에 함께 있는 것은 도박이나 마찬가지였다.
천응은 아군의 그런 태도에 익숙했기에 화가 나지도 않았다.
인간이 포식자에 대해 저런 태도를 보이는 것도 당연하다고 여겼다.
그는 자신을 이해해 주는 유일한 친구, 제갈청을 향해 말했다.
“갈까, 제갈청? 약속할게. 이제부터는 분명 재밌어질 거야.”
“…….”
천응은 얼마 전에 만든 또 다른 친구를 불러내었다.
이 친구는 여인의 몸으로 얼마나 훌륭하게 싸워 주었는지, 최근엔 검마라는 별호도 챙겼다.
제갈청만큼은 아니지만, 이 친구도 이젠 제법 믿음이 가는 듯했다.
“너도 가자, 추연희. 너의 검에 피를 먹일 때야.”
세 명의 마인은 남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 * *
“오라버니…… 정말 떠나시는 거예요?”
“응. 그러니 다시 만날 때까지 몸조리 잘하고 건강히 지내렴, 청린.”
준수하게 생긴 청년이 청초한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동생처럼 생각하는 아이라 사심 없이 쓰다듬은 것뿐이다. 하지만 사방에서 살기가 넘실거렸다.
정확히는 소녀를 동경하는 젊은 무사들이 보내는 살기였다.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던 준수한 청년은 바로 초운으로, 오늘은 그가 검마를 잡기 위해 길을 나서는 날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바라보는 소녀는 바로 살왕의 외손녀 이청린이었다.
“언제…… 언제 돌아오실 건데요?”
그리 묻던 그녀가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어떤 철석간담의 사내라도 녹여 버릴 듯한 그녀의 눈물에 지켜보던 젊은이들은 애간장을 태웠다.
하지만 정작 초운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니, 남녀 간의 애정사에 터무니없이 둔감한 터라 그저 안쓰러운 미소로 그녀를 대할 뿐이었다.
‘독하다.’
‘독하군…….’
지켜보던 무사들은 과연 적제의 제자답게 독하다고 생각했다.
초운의 순수한 눈빛과 미소는 패도맹의 숱한 여인들의 방심을 떨리게 만들었지만, 그와 반대로 어떤 여인도 통과 못할 최강의 방패 역할을 하기도 했다.
아무리 친해져도 여동생이나 친구 이상이 될 수 없는데 무슨 희망이 있어 승부를 걸겠는가.
반년여 동안 포기하고 돌아선 여인네만 알게 모르게 세 자리 수를 상회했다.
그런데다 사천제일미로 불릴 만큼 젊은이들 사이에서 돌풍을 일으킨 청순 미녀 이청린도 결국 같은 꼴을 당하는 중이니 독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경합이 끝나면 바로 돌아올게. 사부님도 여기 계시는데 내가 설마 돌아오지 않겠어?”
“정말…… 정말이죠? 빨리 돌아오는 거죠?
“그래, 약속할게.”
“흑…… 흐흑.”
열일곱 소녀였지만 눈치가 없는 건 아니다. 그가 자신을 그저 여동생 바라보듯 한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포기할 순 없었다.
“어이구, 우리 청린이는 눈물이 정말 많구나?”
“흐흑…… 으앙!!”
남의 속도 모르고 농을 거는 초운에게 서운했는지, 그녀는 그의 품에 쓰러지듯 안겨 울고 말았다.
초운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머리를 긁다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초운은 그녀를 달래 주기 위해 무려 이각을 더 지체하고 나서야 패도맹을 떠날 수 있었다.
적제가 멀리 떠나는 중인 경합자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당철은 조력자가 몇이라던가.”
“백여 명입니다. 당가십수를 포함한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사들이 아흔 명 정도였습니다. 일단 경합이 끝날 때까지 신원 확인은 하지 않을 예정입니다.”
“어째서?”
적제가 짧게 되물었다. 그러자 마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휴, 미리 솎아 내면 또 재미없다고 말씀하실 거 아닙니까.”
“……자넨 나를 너무 잘 아는군.”
“저도 그런 제가 싫습니다.”
적제가 도수룡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었다.
“한데 그 아이는 정말 포기한다던가?”
“네. 그냥 맡은 일이나 열심히 하겠다고 하더군요.”
“당철도 수룡이처럼 그리 생각해 주면 좋았을 텐데…….”
당철 하니 뭐가 떠올랐는지 마영이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당철, 그 아이가 ‘그’를 보고 얼마나 화를 낼지…….”
“그…… 라면 검주 말인가?”
“예. 그가 머무는 천검각에 무려 아홉 번이 찾아갔다가 퇴짜만 맞고 왔다는군요.”
적제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아깝군.”
“뭐가 말입니까?”
“검주가 자기 말고 초운의 조력자가 된 것을 알게 되면 당철, 그놈의 표정이 볼 만할 텐데……. 보지 못한다는 것이 아까워…….”
주군의 농에 마영은 모처럼 크게 웃을 수 있었다.
* * *
같은 시각.
섬서와 가장 가까운 사천의 어느 지역에 정체불명의 무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같이 범상치 않아 보이는 기도를 풍기는 그들을 지휘하는 자는 놀랍게도 반천련의 총사인 제갈정오였다.
그는 먼 하늘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증오는 무르익었다, 인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