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향 145화
허약하여 추위를 많이 타는 그는 지금 짐승 털로 만든 내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 짐승이란 것이 해동의 은호(銀狐)다.
은자로 3,000냥이나 하는 여우 가죽인 것이다.
그런 옷을 입은 그를 두고 천한 것이라 하니 어이가 없을 수밖에.
호신강기처럼 빽빽하던 인파가 어느샌가 엷어졌다.
당추를 알아본 이들이 물러선 까닭이었다.
그 덕에 당추의 일행들이 나타났다.
“무슨 일입니까? 형님.”
“역시 형님은 대단하십니다. 그 인파를 어찌 뚫고…….”
그들은 당추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3인의 청년으로, 모두가 힘깨나 쓰는 이들의 자제였다.
그중 한 명이 음흉한 눈으로 청린을 바라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휘익~”
끼리끼리 논다더니, 그들은 모두 당추처럼 질이 나빠 보였다.
그들을 하나하나 관찰하던 엽성은 위기감을 느꼈다.
둘은 일류 정도, 당추를 포함한 나머지 하나는 절정이었다.
혼자라면 어찌어찌 해보다 도망이라도 갈 텐데, 문제는 서평과 청린이었다. 그 둘은 무공이 없었기 때문이다.
초운이 있었다면 문젯거리도 되지 않으련만, 아쉽게도 그는 조금 전에 다른 곳을 구경한다며 사라졌다.
말리지 않은 것은 청린을 사이에 두고 서평과 장난처럼 토닥거리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난감해진 엽성이 서평과 청린을 향해 전음을 날렸다.
-신호하면 도망가라. 나 혼자서 모두 막기에는 조금 버거운 놈들이다.
“네? 도망가요?”
눈치 빠른 서평은 안색이 변하지 않았지만, 순진한 청린은 깜짝 놀라 엽성에게 되묻고 말았다.
그러자 당추를 포함한 4인의 청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가 뭘 어쩐다고 도망가시나.”
“킥킥킥. 이봐요들, 우리 나쁜 놈 아니에요. 그냥 여자를 좋아할 뿐이지.”
“하하하하하.”
청린이 미안한 얼굴로 서평과 엽성에게 말했다.
“미안해요, 오라버니…….”
한숨을 내쉬던 서평이 그녀의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으니, 일단 뒤로 물러나 있어. 신호하면 도망가서 초운이를 찾고.”
“네…….”
엽성이 서평에게도 말했다.
“너도 물러나라, 평아.”
“잠깐이라도 잡아 둬야 청린이가 도망가지.”
“음…….”
엽성은 그를 말릴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미 어디서 난 건지 막대기까지 들고 있었다.
청년들이 점점 다가왔다.
엽성이 먼저 몸을 날리며 이청린에게 외쳤다.
“도망쳐! 린아! 운이를 찾아!”
이청린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머뭇거렸다. 그러자 이번엔 서평이 외쳤다.
“빨리! 그게 우릴 돕는 거야!”
청린은 결국 인파를 뚫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당추가 청년들에게 말했다.
“난 저 여인을 쫓을 테니 너희들은…… 알지?”
청년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아, 부럽습니다, 형님!”
“낄낄낄~”
“곧 따라가겠슴다~”
엽성은 당추를 막고 싶었지만 두 명의 청년이 그를 막아섰다.
“젠장……. 무사해라, 청린아…….”
* * *
초운은 상점과 상점 사이에 끼어 있던 조그마한 찻집에서 차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찻집은 인자한 인상의 할머니가 운영하는 곳이었는데, 차 맛이 아주 좋았다.
“젊은이가 참 맑네그려……. 눈빛이 아주 맑아.”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때, 밖에서 소란이 일어난 듯하자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의 귓가에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싸움이 났나 보구먼.”
“싸움이요?”
“점소이 아이가 좀 전에 지나오다 봤다고 하던데, 웬 외팔이 무인과 청년들이 싸울 것 같더라고…….”
초운이 벌떡 일어나며 품에서 은자를 꺼냈다.
“할머니, 저 찻값이 얼만지 몰라 그냥 되는대로 드릴게요. 이 정도면 되나요?”
“철관음 한 잔에 이렇게나? 잠시 기다려, 내 거슬러줄 테니.”
“싸움 난 사람이 제 일행일지도 몰라서 그래요.”
“어이쿠! 빨리 가 보아!”
“네, 감사합니다~”
초운의 신형이 번개처럼 사라졌다.
찻집의 노파는 깜짝 놀란 얼굴로 중얼거렸다.
“내…… 내가 귀신한테 차를 판 건가?”
싸움이 난 곳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큰 대로 한가운데에 사람들이 널따란 원형으로 몰려 있으면 뻔한 일이다.
초운은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경공을 펼쳤다.
그리고 사람들의 어깨를 밟으며 싸움이 벌어지는 안쪽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자신의 어깨가 밟혔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안쪽의 상황은 이미 무르익은 듯 보였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서평이었고, 그다음은 세 명의 청년에게 둘러싸여 합공당하는 엽성이었다.
그의 얼굴은 피투성이였지만 그럭저럭 버티고 있었다. 왼손으로 펼치는 장법의 숙련도가 제법 높았기 때문이다.
초운은 당연히 분노했다. 실로 오랜만에 그의 손에서 복호권이 펼쳐졌다.
그것도 기존의 화산복호권이 아닌, 누군가의 손에 의해 변형되어 공격일로의 악랄한 권법이 되어버린 악가복호권이었다.
쾅---!
한 청년의 앞니가 우수수 떨어지며 피가 낭자했다.
청년은 자기 앞섶에 떨어지는 피가 자신의 부서진 잇몸과 코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라는 걸 믿지 못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무너지듯 무릎을 꿇고 비명을 질렀다.
“으어아아아어어아아아아!”
“넌 뭐야!”
퍽!!
초운은 대답 대신 뒤돌며 팔꿈치로 상대의 광대뼈를 부숴 버렸다.
그리고 무너지듯 쓰러지는 청년의 뒤통수에 팔꿈치를 내리꽂으려 하였다.
“초운아, 안 된다!”
엽성의 목소리였다.
그는 초운이 나타나 절정고수인 청년을 쓰러뜨리자 한숨을 놓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곧바로 다른 한 명을 쓰러뜨릴 수 있었다.
한데 초운의 순둥이 같은 모습은 어디다 팔아버렸는지, 북풍한설의 북해가 여름처럼 보일 만큼 아주 차가운 눈빛으로 나머지 한 명의 뒤통수에 팔꿈치를 내리꽂는 걸 보며 기겁하여 말렸다.
엽성의 목소리에 초운의 팔꿈치가 멈추었다.
털썩---!
청년은 기절한 지 오래였다.
광대뼈가 내려앉아 안구가 떨어져 나올 듯 튀어나와 있었기 때문에 실명은 감수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청년은 엽성에게 고마워해야 할 것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그의 목뼈는 부러졌을 테니까.
엽성은 말로만 듣던 검귀(劍鬼)의 모습에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때 서평의 상태를 살피던 초운이 엽성에게 물었다.
“형님! 청린이는요!”
그제야 정신을 차린 엽성이 검지로 한 방향을 가리켰다.
그곳은 도망친 청린을 쫓아 당추가 사라진 방향이었다.
“서평 사형을 부탁드려요!”
초운의 신형이 다시 한 번 번개가 되었다.
엽성은 그 모습에 혀를 내두르며 서평에게로 향했다.
* * *
초운이 청린을 발견한 것은 순식간이었다.
어기충소의 신법으로 하늘 높이 이십 장이나 오른 그는 당가타의 전경을 눈에 새겼고, 청린을 발견하자마자 매처럼 날아들어 그 앞에 내려섰다.
그가 청린의 어깨를 잡으며 물었다.
“괜찮니? 다친 덴 없어?”
이에 청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자신의 어깨를 가볍게 흔드는 초운의 손길을 느끼고는 얼굴을 붉혔다.
“어? 또 빨간데? 어디 다친 거야?”
초운이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 안 다쳤어요, 오라버니. 그런데…… 저 사람은 심하게 다친 것 같은데…….”
“저 사람?”
그녀가 가리키는 곳으로 고개를 돌린 초운은 한 청년이 안면에 커다란 주먹 자국을 새긴 채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한눈에 봐도 코는 물론이고 턱뼈도 바스러진 듯했다. 아마도 평생 식사를 편하게 하진 못하리라.
“저 사람도 그놈들 일행인 거야?”
“네…….”
“근데 왜 저래? 혹시 네가 쓰러뜨렸어?”
“아니요, 거인이 와서 도와줬어요.”
“거…… 인?”
초운이 되묻자 그녀가 설명하기 시작했다.
“하악…… 하악…….”
청린은 난생처음으로 정신없이 달렸지만 병이 나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몸이기에 체력이 받쳐주질 않았다.
얼마 못 가 그녀는 당추에게 따라잡히고 말았다.
당연했다. 체력이 좋다 하더라도 절정의 고수를 무공도 모르는 아녀자가 따돌릴 가능성은 없었다.
“여기까지요, 소저.”
“가까이 오지 마세요!”
“큭. 너무 앙탈을 부리면 신상에 좋지 않을 것이오.”
당추가 불량스레 웃으며 다가왔다. 그리고 그녀의 팔목을 거세게 잡으려 했다.
“꺄악!”
청린은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부웅---!
순간! 뭔가 무거운 것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그녀의 오른쪽 귀를 지나는가 싶더니, 당추의 안면에 어지간한 성인 머리통만 한 크기의 주먹이 작렬했다.
퍼어억!!
“으케헤헤헥!”
당추가 이빨을 흩뿌리며 뒤로 날아갔다.
너무 놀라 눈만 껌뻑거리던 청린은 누군가 엄청나게 크고 두터운 손으로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는 것을 느꼈지만 몸이 굳어 돌아볼 수 없었다.
“소저, 녀석에게 안부나 좀 전해 주슈.”
손만큼이나 억세게 들리는 말투였다.
‘녀석’이란 게 누구를 뜻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사람을 저리 만든 것이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는 거인의 소행이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거인은 사라졌고, 곧바로 초운이 나타난 것이다.
그녀의 설명이 끝나자 초운은 기절해 있던 당추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그의 몸에 남아 있는 상흔을 살폈다.
한참을 살피던 그가 깜짝 놀라 일어서며 주변을 살폈다.
그의 눈엔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것은 슬픔이 아닌 그리움의 눈물이었다.
“악 사형…… 악사형이야……. 악 사형!! 악 사형!!”
당추에 남아 있던 것은 분명 복호권의 흔적이었다. 그것도 자신과 같은 악가복호권.
세상에 자신을 제외하고 그 무공을 아는 이는 그것을 창안한 사람 한 명뿐이었다.
화산에서의 어린 시절 따돌림당하던 자신을 친형제처럼 대해 주었던 사형 악휘구였다.
八章
초운 일행은 일을 더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당가타를 빠져나왔지만, 당가주의 넷째 아들과 가문의 주요 직책을 차지하던 이들의 자제들이 반병신이 된 것은 그냥 넘길 일이 아니었다.
잘잘못을 떠나 당가의 기본 원칙은 원한은 열 배로 갚자는 주의라 범인들에 대한 추적이 바로 시작되었다.
그러다 그들이 패도맹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는 목격자까지 나타났고, 초운들의 마음과는 달리 일은 점점 더 커져 가고 있었다.
당가주 당세평은 패도맹의 일에 거의 관여하지 않는다.
아니, 의식은 하되 되도록 없는 것처럼 신경을 꺼 놓는다.
패도맹주를 맹주로 인정하고 받들자니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