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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향-140화 (140/217)

검향 140화

초운은 술자리에 앉아 중얼거렸다. 그의 얼굴이 벌건 것이 술에 취한 듯 보였다.

“꼭 해야 하나요? 사형. 딸꾹.”

“당연하지. 내가 분명 얘기했잖아. 네가 커야 황현 사형과의 약속도 지킬 수 있다고.”

“그렇지만…… 딸꾹! 다투기…… 딸꾹! 싫은데. 딸꾹!”

“……그래도 할 수 없어. 너 혼자 약속을 지키려 했다간 살해당하고 말 테니까.”

옆에 앉은 엽성이 쓴웃음을 지었다.

서평은 평상시엔 착하지만 현실적인 면이 너무 강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런 소릴 당사자 앞에서 쏘아붙이다니…….

“엽성 형님도 그리 생각하지요?”

“으…… 응?”

서평의 물음에 엽성은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였다.

“얘가 무슨 힘이 있다고 곽호를 죽이고 천상련을 무너뜨려요. 그것도 혼자서.”

“천상련을 무너뜨린다는 소린 아니고, 화산에 오른다는 소리 같던데…….”

“그게 그거죠. 곽호가 천상련의 인물인데.”

“그렇기는 하지.”

엽성은 조용히 술잔을 집어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술맛이 썼다.

초운은 처음 마셔보는 술을 과음하였는지 어느 샌가 탁자에 이마를 댄 채 엎드려 있었고, 서평은 엽성과 주거니 받거니 하며 시간을 더 보냈다.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는지 엽성이 물었다.

“그런데 경합 준비 잘하고 있는 건가?”

서평이 자신만만한 어조로 답했다.

“준비할 게 뭐 있으려구요. 무공 경합에선 살살해도 승리할 텐데.”

“무공뿐만이 아니라서 묻는 거야.”

“그것도 문제없어요. 초운의 곁엔 이 내가 있으니까.”

“너도 함께하려고? 위험하지 않겠어?”

‘무공을 쓸 수 없는데’라는 말이 목젖까지 차올랐지만 가까스로 참는 엽성이었다.

그의 무공을 전폐한 것이 그와 그의 스승인 장왕이었기 때문이다.

화해는 했더라도 뜨끔한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에이, 위험이야 하려고요. 여차하면 초운이 도움을 받지요, 뭐.”

엽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평은 머리도 좋지만 주변 정세를 파악하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일종의 통찰력이랄까.

인생 경험이 부족한데도 통찰력이 좋다는 것은 지혜보다는 감각의 영역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의 장사 수완 대부분이 그러한 통찰력에서 오는 것을 보면 초운을 걱정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나라도 따라가고 싶다만, 아직 완전히 회복된 것이 아닌지라…….”

“걱정 마세요, 강력한 조력자를 미리 구해 두었으니.”

“조력자를 벌써? 그게 누구냐?”

서평이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게 누구냐 하면…….”

* * *

드디어 첫 번째 경합 날이 밝았다.

대전 회의에서 후계자를 선정하는 경합 날짜가 발표되고 나서 정확히 열흘이 흐른 뒤였다.

패도맹의 중앙 연무장엔 오랜만에 거대한 비무대가 세워졌고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았다.

그들은 인근 마을과 도시에서 온 구경꾼들이었다.

그저 무공을 겨루는 시합이었지만 패도맹의 차기 후계를 결정하는 자리이다 보니 사람들의 관심도 대단했다.

그런 사람들 틈에서 여기저기 치이며 헤매던 초운은 겨우 연무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래도 그가 제일 먼저 도착한 편이었다. 상대인 당철이나 도수룡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서평과 엽성을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었다.

어수선한 가운데 경합을 관전하려는 간부들이 비무대 옆 단상에 모여들었다.

단상에는 의자가 여러 개 세워져 있었는데, 가장 한가운데 있는 것은 팔걸이가 마치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형상이라 딱 보기에도 적제를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사실 적제는 이런 것에 거의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림자와 같은 총사 마영의 취향이었다.

곧이어 당철이 이미 이긴 사람인 것마냥 오만한 얼굴로 비무대 위에 올라왔고, 그다음 도수룡이, 그다음엔 초운 순으로 올라왔다.

얼마 후 단상에 간부들이 다 들어가 앉자, 경합자들은 미린 정한 바가 있었는지 단상 쪽으로 몸을 돌려 포권하였다.

잠시 후, 청의무복을 입은 잘생긴 무사 한 명이 비무대 위에 올라오더니 큰 소리로 말했다.

“이제 경합을 시작하겠소!”

“와아아아아!”

오전부터 계속 기다려 온 시합이라 관중들의 함성은 더욱 컸다.

얼마 후 열 명의 무사가 비무대 위를 끙끙대며 올라왔다.

그들은 누가 자른 건지 아주 네모반듯하게 다듬어진 바위를 들고 있었는데, 그 무게만도 일천 근(600kg)은 족히 넘어 보였다.

열 명의 무사들이 자기 팔을 주무르며 내려가자, 좀 전의 목청 큰 청의무사가 다시 나타나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무력을 시험하는 첫 번째 과제는 바로 이겁니다.”

‘돌? 부수라는 건가?’

‘바위…… 자르란 거겠지?’

‘…….’

세 명의 후보자들이 호기심을 보였다.

청의무복의 무사가 다시 말했다.

“단순합니다. 이것을 들어 올리십시오.”

“뭐야, 겨우 그건가?”

당철은 우습지도 않다는 얼굴로 바위를 향해 다가가려 하였다.

그러나 청의무사의 이어지는 말에 발걸음을 되돌려야 했다.

“단! 내공을 끌어올리시면 안 됩니다.”

당철이 울컥하며 소리쳤다.

“뭐라고? 그럼 대체 어떻게 들란 말인가!”

“적제께서 말씀하시길, 무인으로서 기본에 충실했으면 충분히 들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청의무사의 대답에 당철은 무의식적으로 적제를 바라보았다.

단상 위의 적제는 무료한 표정으로 비무대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무리였다.

외공을 전문적으로 익힌 고수라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절대경의 고수라도 내공 없이는 어려울 것이다.

당철은 호적수인 도수룡을 바라보았다. 눈 밑에 서린 그림자를 보아하니 분명 당황하고 있었다.

‘우리 둘이 이럴진대…….’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초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초운은 표정이 전혀 변하지 않았다.

‘사부님이 너무 편애하시는 거 아닌가……. 공정해야 하는데…….’

초운은 볼을 긁적이며 적제를 바라보았다.

그는 뭔가 켕기는 것이 있는지 자연히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한숨을 푹 내쉰 초운은 심판처럼 보이는 청의무사에게 물었다.

“제가 먼저 해도 되는 건가요?”

“순서는 상관없습니다.”

허락으로 알아들은 초운이 성큼성큼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정말 번쩍 들었다, 라는 표현이 놀라울 정도로 잘 어울리는 광경이었다.

설사 내공이 있다 해도 저리 쉽게 들 수 있을 것인지 궁금할 만큼 쉽게 바위를 들어 올리는 초운이었다.

관중들은 경악 대신 환호를 하였고, 무공을 좀 아는 무사들은 경악에 입을 쩍 벌렸다.

그것은 단상 위의 간부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적제만큼은 놀라움 대신 기특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녀석, 놀진 않았군.’

적제를 제외한 모두가 놀란 가운데, 당철의 숙부인 당세운이 비무대 위의 심판을 향해 소리쳤다.

“이…… 이보게, 심판!”

“네.”

“저거 정말 내공 안 쓴 거 맞나? 어서 확인해 보게.”

“아…… 네. 저도 잠시 당황해서 잊고 있었습니다. 지금 곧 알아보도록 하지요.”

그러면서 그는 초운에게 양해를 구하였다.

“잠시 맥을 짚어 보아도 되겠습니까?”

“네, 마음대로 하세요.”

심판은 꼼꼼히 하기 위해 손가락으로 목의 맥을 짚고 기를 흘려 넣었다.

역시 내공은 없었다.

“…….”

손가락을 떼고 잠시 멍하니 서 있던 심판을 향해 당세운이 다시 한 번 소리쳤다.

“결과는? 역시 반칙인가?”

“그, 그게 아니오라…….”

그가 말을 더듬자, 이번엔 도호성이 소리쳤다.

“뭔가, 어서 말해 보게!”

“내공이 단 한 톨도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으음…….”

경합자들의 후견인인 도호성과 당세운은 짜기라도 한 것처럼 의자로 동시에 주저앉았다. 어찌 그런 미친…….

절대고수인 도호성조차도 내공 없이 일천 근의 바위는 들지 못한다.

그렇다는 것은, 초운의 육체는 절대경에 이른 고수보다 더 잘 단련되어 있음을 뜻했다.

저런 무서운 육체를 가지고 초절정에 이르렀다면 보통 위력이 아닐 것이다.

당철이든 도수룡이든 오늘 초운을 상대로 방심하면 곤란할 것이다.

“내 제자 어떤가, 마영?”

“괴물…… 이네요, 괴물.”

“하하하하하!”

옆에서 적제의 기뻐하는 목소리를 들은 당세운과 도호성은 분함에 이를 갈았다.

물론 조심히 갈았다.

괜히 심기를 건드렸다가 분노라도 하게 되면 경합이고 뭐고 다 사라질 테니까.

“두 분 공자님도 도전하시겠습니까?”

청의무사가 당철과 도수룡에게 물었다.

도수룡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으나, 당철은 끝까지 해보고자 나섰다가 허리에 근육통만 생기고 말았다.

당연히 바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청의무사는 가차 없이 소리쳤다.

“……자! 두 번째 과제로 넘어가겠습니다!”

“이…… 이봐! 잠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바위 앞에서 끙끙대던 당철이 그를 말렸지만 청의무사는 가볍게 무시해 주었다.

“다음 과제 가져오세요~”

그가 비무대 바깥을 향해 소리치자 무사들이 커다란 쌀가마를 몇 포대 가져왔다.

하지만 그 안에 쌀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안에 들어 있던 것은 연한 남색의 비무대와 비교되는 하얗고 고운 모래였다.

모래 가마를 짊어지고 온 무사들은 곧 모래를 비무대 곳곳에 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넓은 나무판자를 하나 가져오더니, 발자국이 남지 않도록 비무대 끝에서부터 거꾸로 쓸고 왔다.

그러자 모래가 얇은 막을 형성하듯 비무대의 3분의 2 정도를 덮었다.

청의무사는 관중들에게도 잘 들릴 만큼 큰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했다.

“이쯤 되면 짐작하는 분도 계시겠지만, 이번 과제의 목적은 속도입니다.”

그는 세 경합자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본 심판이 다섯을 셀 동안 저 모래에 최대한 많은 족적을 남기십시오. 단, 정확도도 중요하다는 걸 명심하십시오. 족적으로 인해 모래가 너무 심하게 흐트러지면 감점 대상입니다.”

도수룡이 그에게 물었다.

“동점이 나오면 어떡하는 거요?”

“그건 차후 동점이 나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절대 나올 리가 없겠지만요…….”

“어째서…….”

당철이 불만 섞인 얼굴로 따졌다.

“글쎄요. 불만이시면 맹주께 따지십시오. 이번 규칙은 적제께서 대전 회의를 통해 직접 건의하신 거니까요.”

“윽…….”

당연히 불만 없다. 그러나 저 청의무사는 무척이나 얄미웠다.

그가 청의무사에게 전음을 보냈다.

-어디 소속이지?

-왜 그러시오?

-이번 경합 끝나면 얼굴 한 번 봐야 할 것 같아서 그런다. 어디야!!

-귀천대인데…… 너 이 새끼, 말이 짧다?

‘헉!’

-내가 귀천대 부대주 막구(邈口)라고 하는데…… 하! 씨바, 코흘리개들 소꿉장난에 불려 나온 것도 서러운데. 뭐? 내 소속이 어디냐고? 이 썅노무 새끼가 등뼈를 갈아다 곰국을 끓여 주랴? 응? 눈깔을 뽑아다 돼지 먹이로 줘 볼까? 응? 응?

당철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곱게 자라 온 그가 어디 저런 욕을 들어 보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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