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향 139화
그는 조용히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았다.
어딘지 모르게 시원섭섭한 얼굴이었다.
애초에 후계 자리를 탐탁지 않아 했던 아들이었다.
그래도 자신이 억지로 밀어붙여 다른 이들과 경쟁하게 만들었다.
워낙에 뛰어났고, 배경 또한 든든했으니 가장 가능성이 높은 후보라 평가받았었다.
으드득---!
화가 났다. 아들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화가 났다.
다 잘될 것처럼 말해 놓고, 잔뜩 기대만 하게 해 놓고, 억지로 노력하게 만들어 놓고…… 아들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차라리 미친 듯이 화를 냈으면 좋으련만, 저 표정은 뭐란 말인가.
서운하지만 그냥 포기한단 뜻인가?
그러고 보면 아들은 자신보다 주군인 적제를 더 아비처럼 따랐던 것 같았다.
그래서 저렇게 슬픈 눈으로 수긍하는 걸 테지…….
저 다 체념해 버린 얼굴이 싫었다. 자신의 아들이 닭 쫓던 개가 되는 것이 싫었다.
그가 적제에게 손을 들었다. 아무도 먼저 나서지 못했지만 자신은 나서야 했다.
* * *
‘의외로군…….’
당가가 먼저 나설 줄 알았다.
그런데 나선 이는 자신의 측근이라 할 수 있는 도호성이었다.
적제가 턱짓과 함께 답했다.
“말해 보시게.”
“부당합니다, 주군.”
도호성이 목소리를 높였다.
“부당하다?”
“그렇습니다.”
“뭐가 말인가?”
도호성이 검지를 세워 초운을 가리켰다.
“저 자리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적제가 싱글거리며 초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겨우 찾은 제자를 가까운 곳에 두겠다는 것이지. 뭐, 다른 뜻이 있으려고.”
“정말 그것뿐입니까? 소신이…… 믿어도 되겠습니까?”
콰드드득---!
순간 괴음이 흘러나왔다. 싱글거리며 웃고 있는 적제의 태사의에서 나는 소리였다.
소리의 진원지는 금방 밝혀졌다.
그의 팔을 지탱 중이던 팔걸이가 그의 손에 의해 가루로 변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적제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믿지 못하겠다면 뭘 어쩌려고?”
모두가 숨죽일 수밖에 없었다.
적제는 어지간한 일엔 화를 내지 않는다.
대전 회의 중 논쟁이 격화되면 수하들 간에 욕이 오가기도 하지만 그렇다 해도 화를 내진 않았다.
그런 이가 지금은 화를 내고 있었다. 바로 자신의 제자 때문에…….
그는 손에 묻은 파편 가루를 대충 털어 내더니 태사의 뒤로 몸을 눕히듯 기댔다. 그리고 모두를 깔아 보듯 내려 보았다.
“내가 내 제자를 이곳에 세우는 데 허락을 받아야 하는가?”
도호성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숨 막히는 압박감 때문이었다.
도호성 자신도 절대경의 고수였다. 그런데도 저 존재력에 숨을 죽여야 했다.
그는 어렵게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아닙…… 니다, 주군, 모든 것은 주군의 뜻대로…….”
“그렇지…… 그래야지…….”
대전엔 긴 침묵이 흘렀다. 침 삼키는 소리조차 없었다. 강력한 존재감만이 대전을 집어삼킬 듯하였다.
약 일각 정도가 더 흐른 후 기세는 점점 사그라졌다.
적제가 목소리에 공력을 실어 말했다.
“내 의중과는 상관없이 후계를 함부로 정했더군.”
“헉…….”
“허험…….”
여기저기서 찔리는 듯 후회의 표현이 거세졌다.
적제가 다시 말했다.
“나도 모르는 후계자 선택이라……. 혹, 반역인가?”
관련자들의 얼굴이 사색으로 변했다. 반역 행위에 대한 처벌이 가히 엽기적임을 떠올린 것이다.
“반역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고정하십시오, 주구운!”
후계자 후보를 낸 곳은 총 일곱이다.
그중 다섯 곳은 현 상황이 까딱하면 멸문지화로 이어질 것을 잘 알았다. 그래서 알아서 물러났다.
남은 것은 두 곳뿐이었는데, 한 곳은 당가였고 다른 하나는 바로 정보를 관장하는 신안이었다.
적제가 재차 물었다.
“당가와 도 당주는 어떤가?”
“조금, 억울할 뿐입니다.”
도호성이 짧게 대답하자, 당가의 대표로 나온 당가주의 동생 당세운도 그에게 답했다.
“저희에게, 기회를 주시지요.”
도호성은 오랜 시간 함께한 전우로서, 당가주는 패도맹의 설립에 영향을 끼진 공신 가문으로서 호소했다.
“기회?”
“비록 오.해.였다지만, 그래도 후보를 정한 것이 수년째입니다. 그동안 아이들이 노력한 것이 아깝지 않겠습니까. 선보일 기회라도 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래? 무엇으로?”
“……지금 딱히 생각나는 건 무공뿐입니다.”
당세운의 말에 적제는 내심 쾌재를 불렀으나, 그것은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였다.
그러나 신안의 당주 도호성은 의견이 다른 듯했다.
“저는 무공보다는 공을 세우는 것이 더 옳다고 봅니다만…….”
도호성은 선견지명이 있었다.
무공은 일대일 대결로 판가름이 난다. 질 수도 있고 이길 수도 있는 불확실함이 있었다.
하나 공과를 세우는 것은 다르다. 능력을 보여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임무를 부여받고 공을 세우고자 할 땐 분명 무공이 중요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임무들은 개인의 판단력과 운, 지략, 경험 등이 더 중요한 요소였다.
그중 부족한 것이 있으면 채우면 그만이다.
가령 무공이 부족하면 무공이 강한 부하를 데리고 가면 되는 것처럼…….
여러 요소를 종합해 보았을 때, 신안에서 정보를 다루며 실무를 경험해 본 도수룡이 더 나았다.
당가의 첫째는 당가의 후계자로서 의독 수업을 더 많이 쌓았지만 아직 경험이 많지 않았던 것이다.
패도맹에서의 당가는 전방보단 후방 지원의 요소가 강한 곳이기도 했고…….
그걸 아는 당세운은 허를 찔린 듯한 낯빛으로 도호성을 쏘아보았다.
‘여우같은 영감탱이…….’
도호성은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주군을 올려다볼 뿐 당세운을 마주 보진 않았다.
잠시 후 적제의 입꼬리가 싹 하고 올라갔다.
“재밌겠군. 둘 다 허락하지. 규칙 같은 세부적인 사항은 오늘 모인 김에 다 정하도록 하는 게 어떠한가?”
“황공합니다, 주군.”
당세운이 안도의 한숨과 함께 무릎을 꿇었다. 둘 다 한다니 차라리 잘되었다고 여긴 것이다.
확실히 임무 수행 같은 것은 조카인 당철이 모자라다. 하나 무공만큼은 도수룡보다 확실히 강했다.
도수룡이 얼마 전에야 겨우 초절정에 도달한 데 비해 당철은 벌써 4년 차. 그 깊이에서는 따라올 수가 없었다.
주군의 제자라는 아이도 기세가 그리 뛰어나지 않아서 정말로 검귀라 불린 것이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아마 소문이 돌다 보니 어느 정도 과장이 있었으리라.
하여튼 임무 수행 쪽은 무공 부문에서 가뿐히 승리한 후, 경험 많고 머리 좋은 사람을 붙여서 공을 다투면 어떻게든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물론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작정이었다.
도호성은 귀천무단의 전우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기로 하였다.
혈교 출신의 수하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철저하게 주군의 편이다.
그것은 거의 숭배에 가까웠다.
결국 자신과 신안의 역량만으로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도 그는 자신 있었다.
문득 아들을 바라보았다.
아들 도수룡은 이번에도 탐탁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런데도 군말 없이 따르는 것은 자신의 야망 때문이 아니라 아비의 체면 때문이리라.
도호성은 그런 아들의 눈빛을 외면했다. 모든 것은 아들이 진짜 후계자가 되면 풀릴 것이다.
그럼 아비를 용서해 주겠지……. 아니, 아들에게 갖는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겠지.
대전 회의가 다시 시작되었다.
새로운 안건은 후계자 경합에 대한 것이었다.
六章
며칠 전 늦은 밤까지 계속되었던 대전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두 가지 종목에 관한 몇 가지 규칙이 추가되었을 뿐이다.
첫 번째는 무공이다.
힘과 속도, 그리고 비무. 단 세 가지 분야이지만, 비무의 경우 참가자가 세 명뿐인 관계로 힘과 경공이 우수한 자 두 명이 겨룬다.
단, 셋 다 비슷한 수준이라면 동시에 셋이서 겨룬다.
두 번째는 임무 수행이다.
어느 날 후보들에게는 임무가 하나 하달된다.
각각의 임무가 수준이 다르면 공평치 못할 가능성이 있다.
해서 하나의 임무를 누가 먼저 해결하는가에 따라 승패를 나눈다.
수단과 방법은 가리지 않으며, 필요한 인력은 능력이 되는 한 누구든 참가시킬 수 있다.
단, 같은 가문이나 조직 내의 조력자는 열 명으로 제한한다.
영입도 능력이라 보기에 다른 곳에서 조력자를 구해야 한다.
맹 내부의 조직도 맹 외부의 조직도 가능하다. 소속된 문파나 조직만 다르면 절대경의 고수도 영입할 수 있다.
하지만 당철은 어쩐지 마음이 불편해졌다. 왜인지 몰라도 맹주가 일을 너무 크게 키우는 것 같아서였다.
솔직히 말해 그가 거절할 줄 알았다. 그리고 그가 그리한다 해서 거역할 자는 없었다.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너무도 흔쾌히 허락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세세한 규칙까지 정하라고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할아버지인 당위룡을 찾아가 조언을 구해 보았지만 아예 만나 볼 수조차 없었다.
경합을 포기한 다른 다섯 계열의 세력에도 장로원에 든 어르신을 모시는 자가 있어서 부탁을 해 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살왕이나 장왕과 같은 괴물들이 득실대는 곳에 쳐들어가서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라 당철은 답답함을 풀 길이 없었다.
“그래, 설마……. 초운이란 놈은 아무리 봐도 초절정이다. 내가 절대 질 리가 없어. 문제는 도수룡, 그놈이지.”
불편한 마음을 애써 달랜 그는 발걸음을 빨리했다.
누구보다 먼저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도수룡은 아버지의 등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평소 뻣뻣하기 그지없던 등이 열심히 숙여지고 있었다.
과거 새외가 좁다며 날뛰어 공포의 대상이 되었던 혈교주가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도와주신다면 은혜를 잊지 않겠소.”
신안의 당주라는 직위 덕분인지 도호성은 꽤 발이 넓은 자였다.
당가는 패도맹에 들어와서도 그 특유의 폐쇄성을 유지했지만 그는 오히려 인맥을 넓혔다.
모든 것은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위해서였다. 그래서 아들을 준비시켰다.
공을 더 많이 세울 수 있는 전장도 아니고, 정보 조직인 신안의 당주가 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무표정한 얼굴과는 다르게 여기저기 맹 내의 행사에 많이 참여하였고 도움을 거절하는 적이 없었다.
가능한 일이라면 힘이 닿는 데까지 도와서 인망을 얻었다.
덕분에 그의 도움을 거절하는 자는 없었다.
저런 아버지 덕분에 도수룡은 아마도 승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