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향 137화
마을은 그런 의미에서 천당과도 같은 곳, 그들만의 암묵적인 법을 만들고 규칙을 지켰다.
중원 곳곳의 전장에 그런 마을이 몇 개나 세워졌다.
주로 팽팽한 접전이 이루어지는 곳을 위주로 세워졌고, 그것은 곧 돈이 되었다.
무사들은 늘 외로워했고, 돈이 필요했다.
약초를 판 돈의 몇 십 배나 되는 돈이 계속해서 들어왔다.
그걸로 소금 상권을 몇 개 쥐었고, 포룡상회의 주인은 대외적으로는 훌륭한 염상으로 통했다.
무림맹이 성천궁과 백월성 등과 합쳐 반천련이 되자 돈은 더욱 많이 들어왔다.
2년 전부터 중원 사대상회는 오대상회가 되었다.
그리고 그 다섯 번째의 이름엔 포룡상회가 있었다.
“이 같은 사실은 무림의 윗대가리 중에서도 몇 명밖에 모르는 거야.”
서평의 맺는말에 당철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너는 누구냐?”
당철은 바보가 아니다. 포룡상회가 염상으로 유명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염상이 될 수 있었던 과정은 처음 들은 것이었다. 아마 당가주인 아버지도 모르는 일일 것이다.
“나? 포룡상회 주인.”
“설마…….”
“그 설마가 이 설마야. 그리고…….”
서평은 뒤로 물러나더니 초운과 어깨동무를 하며 다시 말했다.
“맹.주.님의 제자인 이 녀석과는 아주 막역한 사형제 사이라 이거지.”
“으음…….”
포룡상회라는 거대 상회가, 그것도 그 주인이 대놓고 지지를 표명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당철이 초운을 차가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네놈…… 아닌 척하면서 실은 많은 준비를 했던 거였군…….”
하지만 뭔가 오해를 하는 듯했다.
“저기…… 그건 아닌데…….”
초운은 그가 사문을 모욕했던 것도 잊고 오해를 풀고자 했으나, 그의 망상은 점점 더 심해졌다.
“그래, 그런 거였어. 놀랍군. 어리바리하다는 소문이었는데, 사실 머릿속에 구렁이 몇 마리를 키운 너구리였다니…….”
어떻게 너구리 머릿속에 구렁이가 들어갈 수 있는지 궁금한 초운이었다.
당철은 계속 말을 이었다.
“두고 보자. 네가 비록 포룡상회와 연을 이었다지만 그것뿐, 중원 오대상회 정도는 우리도 발이 닿아 있다. 후후후. 포룡상회 정도로 쫄 줄 알았다면 큰 오산이다.”
“……저기, 저…… 사람 말을 좀…… 들어주시면…….”
초운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지, 당철은 제 딴에는 제법 멋있는 척 등을 보이고는 고개를 살짝 돌려 초운과 서평을 쏘아보았다.
“맹 내부의 세력과는 전혀 인연이 없는 네놈은 굴러들어온 돌이다. 누가 널 지지할 것 같으냐? 꼴에 ‘초절정’이라지? 그래 봤자 넌 혼자다. 결국 내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이야!”
그러면서 멋지게 다시 돌아 검지로 초운을 가리켰다.
아니, 가리키려 했다. 하지만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서평이 초운을 데리고 떠나 버렸기 때문이다.
“이봐! 멈춰라! 감히 이 당철의 이야기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당철이 노발대발하는 가운데 초운을 끌고 가던 서평이 말했다.
“바보다. 바보병이 옮을지도 모르니 빨리 가자.”
“네…… 사형.”
* * *
“그나저나…… 소공께서 절대경의 고수인 건 계속 숨기실 겁니까? 지금 알리면 헛소리들이 쏙 들어갈 텐데요.”
마영의 질문에 적제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제일 재밌는 건 아껴 둬야지 않겠나.”
“장로분들이 가만있겠습니까? 당하는 게 자기 자식, 손자들일 텐데…….”
“웬걸? 그 노인네들, 재밌겠다며 더 적극적이던걸.”
“어휴…….”
요즘 들어 한숨만 늘어 가는 마영이었다.
五章
반천련의 총사인 제갈정오는 차가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방금…… 서부 전선을 괴멸시킨 이가 누구라 하셨소?”
“……인형사입니다.”
으드득---!
보고를 하러 온 천이각의 무사가 꺼낸 이름에 제갈정오는 이를 갈 수밖에 없었다.
인형사란 별호는 그에게 있어 저주에 가까운 것이었다. 천륜으로 엮인 저주 말이다.
그는 잠시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대반천련의 총사로서 냉정함을 되찾기 위해서다.
천이각의 무사가 집무실을 나가자, 그는 눈을 부릅뜨고 보고서를 읽기 시작했다.
꼼꼼히 쓰인 보고서에는 인형사 천응과 그의 꼭두각시인 제갈청, 그리고 그가 새롭게 부리는 마녀에 대한 정보가 적혀 있었다.
그러다 그 마녀의 정체가 파악된 부분에서 그의 눈빛은 이채를 띠었다.
한참을 상념에 빠져 있던 그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급히 어디론가로 향했다.
반천련의 여러 전각 사이를 헤치고 그가 도착한 곳은 바로 정보 조직인 천이각.
그 천이각에서도 금지로 지정된 지하 밀실로, 이곳에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자는 채 열 명도 되지 않았다.
밀실 안에는 무림맹 시절부터 수십 년간 모아 온 정보들이 서책의 형태로 보관되어 있었다.
제갈정오가 제일 먼저 찾은 것은 바로 인명록이었다.
어차피 무엇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미리 알고 있던 터라 책장 한편에 꽂힌 서책에 곧바로 손을 가져갔다.
한참 동안 책장을 넘기던 그의 눈동자가 커졌다. 원하던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책을 들고 곧바로 천이각주를 찾았다.
4층으로 이루어진 천이각의 최상층에 있을 천이각주 진명을 찾아 계단을 오르던 그의 머릿속에서는 몇 가지 계략이 세워지는 중이었다.
제대로만 된다면 오랜 골칫거리들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으리란 확신을 담고서…….
* * *
쾅!
새벽바람부터 연무장의 벽이 박살이 났다.
장로원의 연무장이 이렇게 부서진 것이 벌써 몇 번째이던가.
벽을 박살내버린 노인이 두꺼운 손을 거두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멀리 동이 터 오며 새벽의 어둠을 물리치는 것이 보였다.
“이젠 제법 잘 피하는군.”
호흡 조절을 마친 노인의 딱딱한 목소리가 이어지자 누군가가 대답하였다.
“맞으면 죽을지도 모르니까요.”
“죽을지도 모르다니? 맞으면 즉사다. 절대고수라도 한 방으로 끝나지.”
노인, 천하제일의 장법을 지닌 장법의 왕. 장왕 염무가 말했다.
그러자 동트기 직전까지 장법을 피하느라 여념이 없던 젊은 청년, 초운이 다시 말했다.
“그런 걸 소손에게 날린 건가요? 장왕 할아버지?”
“허험, 이것이 다 교육을 위해서이니라.”
장왕이 머쓱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는 몇 달 전 자기 제자인 엽성의 치료를 위하여 패도맹을 찾았고, 그 길로 눌러앉아버렸다.
제자의 치료를 위한 거라지만, 사실은 살왕이 장로원에서 어여쁜 손녀의 시중을 받으며 사는 것이 부러웠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적제는 물론이고 살왕과 암제 당위룡까지 나서서 그를 영입하려 노력하는데, 자존심을 중요시하는 그로서는 그런 호사에 흔들리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결국 아무런 직위도 맡지 않는 대신, 가끔 패도맹 직속 무사들의 훈련을 도와주기로 하고 호법장로가 되었다.
적제는 그것만으로도 대성공이라 여기고 그를 받아들였다.
얼마 전부터 그는 초운을 상대로 비무를 벌이고 있었는데, 이는 비무라기보다 일방적인 두들김이란 표현이 옳았다.
그러나 그것은 분풀이가 아니었다.
자신의 경험이나 생각을 초운에게 가르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어험. 너의 환검은 경지에 달했구나. 그러나 아직 모자라. 너에겐 변화가 아니라 강함과 부드러움이 필요한 것 같구나.”
장왕의 설명에 초운은 조용히 경청했다.
절대경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은 그의 입장에서 장왕의 한마디 한마디는 금과옥조와도 같았다.
열흘 동안 매일같이 비무를 했다.
그 결과 실력도 실력이지만 절대경이라는 경지를 조금이나마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어느 정도냐 하면, 열흘 전의 초운과 지금의 초운이 한 판 붙는다면 지금의 초운이 오백 초 안에 이길 수 있을 정도였다.
그만큼 초운의 경지는 높아져 갔다.
장왕뿐만이 아니었다.
살왕이나 당위룡, 그리고 장로원의 다른 장로들도 그때그때의 심득을 전해 주는 편이라, 초운에게 있어서 장로원은 무공의 보고와도 같았다.
“변화 속에서 강유를 겸비하라는 뜻이죠?”
“글쎄……. 내가 얘기하는 것은 조금 더 근원적인 얘기다.”
“그럼 무당의 유검이나 살왕 할아버지의 중검 같은 것을 지금의 환검 수준으로 익히라는 건가요?”
곰곰이 생각하던 장왕이 손바닥을 펴며 말했다.
“그걸 어느 세월에 다시 익힌단 말이냐. 흠, 역시 말보다 한번 보여 줘야겠군.”
장왕의 손에서 황금빛의 거대한 손바닥이 튀어나왔다. 그 크기가 얼추 초운의 몸통만 하였다.
“으악!”
초운은 기겁하며 피했고, 손바닥 모양의 강기는 반대편 벽을 파괴하는 듯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강기는 허공을 노니는 듯하더니 안개처럼 흩어지고 말았다.
“어? 저건…….”
“그래, 너의 특기인 변화다.”
“어찌…… 저것을……. 혹여 젊은 시절에 화산 제자셨어요?”
딱---!
초운이 이마를 부여잡고 쪼그려 앉았다. 장왕의 두꺼운 손가락에 맞은 것이다.
그 모습에 장왕은 작게 미소를 지었지만 곧 사라지고 말았다.
가르칠 때의 그는 엄격한 스승의 모습, 바로 그 자체였다.
장왕이 그에게 물었다.
“높은 산에 오른 적 있느냐?”
“……네.”
또다시 물었다.
“그럼 오를 때는 뭐가 보이더냐?”
“보통 오르는 데 집중하지요.”
“그럼 오른 후에는?”
초운은 잠시 눈을 굴리며 조금 복잡하게 생각해 볼까 하다가, 곧 단순한 것이 때론 올바른 길이라 여기곤 답했다.
“경치요.”
“바로 그것이다.”
“예?”
장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오를 땐 몰라도 오르고 나면 밑이 보이는 법이지. 그렇다고 자신이 올라온 길만 보이겠느냐? 저쪽 길도 보이고 이쪽 길도 보이는 법이지. 넌 간혹 가다 실력이 떨어지는 무사들의 연무 장면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드느냐?”
“……아! 그렇구나!”
초운은 순간 머리가 확 하고 밝아지는 듯했다.
장왕은 몰랐지만 이는 장왕이 전해 주고자 한 것보다 더 고차원적인 이해였다.
깨달음이니 각성이니 하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초운은 착실하게 계단을 밟듯 성장하고 있었다.
환검이라 하여 환이 전부가 아니다.
진정한 변화[幻]를 얻기 위해선 강유(强柔)가 다르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아니, 모든 것이 다르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초운은 매화검류를 익혔다.
환검을 위한 검공임은 맞다.
그러나 그 속엔 강함[强]도 있고 부드러움[柔]도 있다. 빠름[快]도 있고 느림[緩]도 있으며 무거움[重]도 있다.
검의에 따라 얻은 결과물이 환검일 뿐이다.
그러나 변화에 치중한 나머지, 변화에 집착한 나머지 다른 것을 모른다고 여겼다.
변화는 무쌍하다.
너무 당연한 거라 오히려 잊고 있었다. 변화가 무엇이든 될 수 있음을 잊었던 것이다.
씩 웃던 초운이 장왕을 향해 말했다.
“한 판 더 해요, 할아버지.”
“오호, 이번엔 자신 있나 보구나.”
초운은 대답 대신 검을 들어 올렸다.
장왕의 손바닥이 금색으로 빛났다.
멀리서 떠오르던 해가 완전히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