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향 135화
회상에서 빠져나온 초운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화산에 못 가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세상일에 무지한 자신이 한심했던 것이다.
화산이 그리 되었다니…….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
너무 안일하게 생각해 온 것 같았다. 언제든 찾아가 황현과의 약속을 지키고, 곽호를 끝장내면 되는 일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할 당시엔 절대고수도 아니었으니 가 봤자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을 것이다.
마영의 말대로 화산을 구경하기 전에 살해당하고 말았으리라.
“왜 그리 한숨이냐? 애늙은이처럼.”
그때 누군가 타박하듯 농을 걸어 왔다.
“서 사형.”
초운이 빙그레 웃으며 반겼다.
“무슨 일인데 그래? 검무를 다 멈추고.”
“별일 아니에요. 그런데 사형은 어디 다녀오신 거예요?”
초운이 대충 얼버무리며 화제를 돌리자, 서평은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아, 엽성 형님에게. 상단에서 괜찮은 약을 하나 구했다기에 갖다 드리고 왔지.”
“선익단 덕분에 많이 좋아지셨을 텐데……. 혹여 상태가 더 나빠진 건가요?”
“별건 아니고, 원기 보충하는 데 좋다기에 구해 온 거야. 요새 많이 좋아져서 며칠에 한 번씩은 무공도 수련하잖아. 동생으로서 그 정도는 해 드려야지.”
엽성과 서평은 과거의 은원을 잊고 얼마 전 의형제를 맺었다.
하지만 그는 서평을 폐인으로 만든 이 중 하나였기 때문에 서평의 입장에선 어려운 선택이었을 것이리라.
“그랬군요…….”
“너, 며칠 전에 맹주께 된통 혼났다면서?”
이번엔 서평이 화제를 돌렸다.
애써 돌려놓은 화제가 원점으로 돌아오자 초운은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걸 어찌…….”
“맹주께서 노발대발하셨는데, 그게 다른 사람들 귀에 안 들어갈 리가 있으려고? 네가 화산으로 가겠다고 떼쓰다가 혼난 일은 시녀나 하인들도 다 알아.”
“떼는 안 썼는데…… 떼는…….”
“뭐 어쨌든, 가지 않기로 한 건 매우 잘한 거야.”
“…….”
그의 말에 초운은 다시 시무룩해졌다. 그러자 서평이 눈을 치떴다.
“왜 그렇게 궁상맞아? 지금 너는 발가벗고 춤이라도 춰야 할 판이라고.”
“에? 춤이요?”
초운은 잠시 자신이 발가벗고 춤을 추는 것을 상상해 보다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서평이 흥분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 춤! 넌 속된 말로 대박 맞았다 이거야!”
“……대…… 박?”
그는 초운의 어리숙함에 답답했는지 자기 가슴을 쿵쿵 쳐 댔다.
“어우, 답답해! 그래, 대박! 예를 들어 다리 밑 거지 패거리들 틈에서 자란 고아 소년에게 어느 날 친부모가 찾아왔는데, 알고 보니 천하제일의 부자였다는 거짓말 같은 일이 너한테 일어난 거라고!”
초운은 머리를 긁적였다.
부나 명예, 권력 등에는 관심이 없었기에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가슴에 와 닿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초운은 욕심이나 집착이 별로 없다. 다리 밑에서 비참하게 자란다 하더라도 인생에 만족했을 것이다. 그러니 서평의 말이 와 닿지 않을 수밖에…….
“어쨌든 너에게 좋은 일이 일어난 거야.”
“그 정도는 알아요, 저도.”
그래도 그는 화산을 잊지 못했다.
비참하게 죽은 사제들, 생사를 알 수 없는 다른 사형제들과 사숙, 사백, 장로님들……. 그리고 황현과의 약속.
서평은 초운의 얼굴에서 그것을 읽었다.
“일단은 황현 사형을 잊어.”
갑자기 서평이 양손으로 초운의 어깨를 거세게 잡더니, 코가 닿을 만큼 얼굴을 가까이 하며 말했다.
“잊지 않았지? 나도 함께였다……. 그와 너와 내가 함께였어……. 계속해서 마인들에게 쫓기던 시기였지만, 난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였다. 처음으로 친구란 걸 가져 본 기분이었으니까. 그래서 너도 그리웠지만 그 사람도 그리웠어. 아니, 아직도 그가 보고 싶어! 그가 마인이 된 걸 믿고 싶지가 않아! 하지만……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초운아. 넌 더 강해져야 하고, 더 많이 가져야 해. 그래야 복수할 수 있어……. 내가 도와줄게.”
과거가 떠올라 감정이 격앙되었는지 서평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는 멋쩍은 얼굴로 초운의 어깨를 놓으며 등을 돌렸다. 눈물을 보이기 싫은 것이리라.
“알았어요, 서 사형. 그러니…… 울지 마세요.”
“누, 누가 울었다는 거냐!”
“사형이죠. 방금 전에 소매로 눈물 닦는 거 봤어요.”
“이놈이! …… 그냥 눈곱을 뗀 것뿐이야!”
“하하하하하.”
“쳇.”
초운은 기뻤다. 눈곱을 뗀 거라는 그의 변명 때문이 아니라, 아직 황현 사형을 잊지 않아 줘서 기뻤던 것이다.
결말은 슬프더라도 추억은 소중했다. 서평이 추억을 소중히 여겨 줘서 너무 고마웠다.
“고마워요, 사형.”
“고마울 것도 많다.”
서평은 한 발 물러서며 얼굴을 붉혔다. 쑥스러웠던 것이다.
그렇게 일단락되려 할 때, 한 무리의 무사들이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그들은 특이하게도 한쪽 손에 검은색의 가죽 수투를 끼고 있었다.
눈썰미가 좋은 서평은 그들이 누구인지 단박에 알아보았다.
“당가로군.”
* * *
“너무 성급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난립니다, 난리.”
피곤한 얼굴의 마영이 집무실로 들어오며 말했다.
“무슨 일인데 그러나?”
늘 그렇듯 화산의 검수임을 상징하는 푸른색의 도포를 입고 집무실의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이에 마영의 이마에 주름이 생겼다.
“나흘 전의 일, 기억 안 나십니까?”
적제는 눈동자를 굴리며 곰곰이 생각해 보는 듯하더니 곧 답했다.
“아, 그래. 초운이 놈과 한바탕했지.”
“그래요, 기억하시는군요. 그럼 무엇 때문인지 잘 아실 텐데요.”
적제는 정말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마영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마영이 한숨을 쉬며 설명했다.
“모든 게 그날 하신 말씀 때문입니다, 주.군.”
“워낙 화가 났던 때라 뭐라 했는지 모두 기억나지는 않네.”
“사내의 복수란, 십 년이고 이십 년이고 기다릴 수 있는 법. 내 밑에서 후계자 수업을 쌓고 힘을 키워 반천련을 짓밟고 천상련은 뜯어먹어라. 그럼 일통하는 과정에서 곽호든 황현이든지 간에 자연히 정리되지 않겠느냐?”
“……라고 하셨습니다, 주.군.”
적제가 다소 오만한 표정과 함께 의자 뒤로 몸을 뉘였다. 그리고 짧게 말했다.
“그게 뭐?”
마영이 흥분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소공께서 권력 투쟁에 끼어들지 않기를 바라셨잖습니까! 그래서 그분이 최연소로 절대경에 도달한 일도 대외적으로 발표하지 않으셨고!”
“그랬지.”
적제는 계속해 보란 듯 또다시 짧게 답했다.
“그런데 왜 그런 말씀을 하신 겁니까? 벌써 소문이 다 나서 후보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휴…… 어제 아침부터 방금 전까지 들들 볶이다 오는 길입니다. 신안의 당주께선 오늘 새벽에 쳐들어오시더군요.”
“후후후. 자네, 사실은 들들 볶인 게 억울한 거였군.”
마영이 한숨을 내셨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일단은 알아보겠다 말하고 다 돌려보냈지만, 주군의 의중이 궁금할 따름입니다. 뭔가 정해 두신 뜻이 있으십니까?”
적제는 의자 팔걸이에 팔꿈치를 대고 주먹으로 턱을 받친 채 입을 열었다.
그의 억양은 더 이상 점잖은 도사의 것이 아니었다. 철혈의 군주마냥 위엄으로 가득했다.
“나도 모르는 후계자 후보들이 있던가, 마영?”
“…….”
확실히 패도맹은 아직 정식으로 정해진 후계가 없었다.
패도맹이 세워지고 난 후 급박하게 돌아가는 천하 정세 때문인 것도 있지만, 맹주가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스스로 도사임을 자처하는 적제는 혼인을 하고 자식을 볼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인지 패도맹 내부의 권력자들은 몇 년 전부터 암묵적인 합의하에 후보들을 세웠고, 그런 후계 구도는 뿌리박힌 듯 확고해졌다.
훗날 맹주가 자연스레 후계로 받아들일 만한 그런 질기고 질긴 권력의 뿌리 말이다.
물론 그들의 적제에 대한 충성은 확고하다.
그러나 권력이란 독배는 이미 미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기다리고 있었다. 적제에게 후계가 필요해질 시기를…….
적제가 스산한 미소와 함께 다시 말했다.
“어떻게 된 것인가, 마영. 나도 모르는 후계가 있다니?”
“휴, 이미 알고 계셨잖습니까. 그냥 모른 척 두고 보셨을 뿐.”
마영의 한숨 어린 말투에 적제가 피식 웃었다.
“자네는 날 너무 잘 알아.”
“처음부터 소공을…… 후계로 염두에 두셨던 겁니까?”
“처음 자네를 만났을 때부터 얘기해 왔고, 패도맹을 세운 후에도 여러 번 언급했었네. 내 제자는 그 애 하나뿐이라고…….”
“그것은 무공을 전수할 제자를 들이지 않겠냐고 할 때 하신 말씀 아닙니까?”
“그게 그거지. 당시 제자를 들이라고 조르던 그들의 속셈을 모를 것 같았나? 내 진전을 이은 제자는 곧 패도맹의 유력한 후계가 되고 권력을 등에 업게 될 것이 뻔한데.”
마영이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주군께서 너무도 단호하게 거절하시니, 자기들 스스로 제자와 후계의 차이를 만들어버린 것 같군요.”
“해석을 잘못한 게 내 잘못은 아니네.”
즉,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없건만 자기들끼리 떡 먹을 순서를 정해 버린 것이다.
마영은 그들이 한심해졌다. 맹주가 헤어진 제자를 그리워한 것은 소문이 자자할 정도로 나 있었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초운이 나타날 것에 대해 걱정하지 않아 왔다.
헤어진 제자가 다시 나타날 리 없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설사 다시 나타난다 하더라도 굴러들어 온 돌이라 여겼으리라.
기실 맹주의 마음에선 그들이 세운 후계가 굴러들어온 돌인 것도 모르고…….
‘주군께선 처음부터 변한 것이 없다. 수하된 입장에서 그런 걸 파악 못하고 있었다니……. 척 보면 답이 나오는 것이거늘…….’
마영은 반성, 또 반성하였다.
그는 귀천무단 시절, 아니 무림맹 시절 귀주성으로 적제가 파견 나왔을 때부터 부관으로 함께하였다.
대의를 위해 그를 따르고 나서 무엇이든 다 알고 있다고 여겼건만, 너무 안이했다.
주군의 의중을 미리 파악하고 남들에게 알렸다면 후계 구도 문제로 난리가 나진 않았으리라.
“저의 잘못입니다. 벌해 주십시오, 주군.”
“됐네. 그리고 이리 되길 노린 것도 있었으니…… 아주 잘된 걸세.”
“역시…….”
마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자신의 주군의 진실 된 모습을 알고 있었다.
그는 아군에겐 상냥하지만 적에겐 가차 없는 잔혹한 폭군이다. 특히 배신자는 절대 용서치 않았다.
그가 패도의 극의를 얻고 난 후부터는 반역에 대한 관용 자체가 사라졌다. 진정한 패왕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패왕은 독재자다. 하나 모든 것을 포용하는 독재자다.
자신의 땅을, 세력을 위하는 길이라면 어떤 쓴말이라도 받아들인다.
하나 그가 세운 것을 침범하거나 파괴하는 행위는 반역으로 여긴다. 마음속의 반역조차 그는 용납지 않는다.
그가 패왕으로서 수하들에게 원하는 것은 절대적인 충성, 오직 그뿐이다.
그러나 후계 문제를 작당하고 담합하고, 함부로 정하는 행위는 그 충성에 위배되는 행위였다.
후계 문제는 영역에 관한 것으로, 오직 주군인 적제에게만 결정권이 있는 것.
언급을 허락하고 생각을 허락하기 전까진 어느 누구도 함부로 결정을 내릴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 그들은 선을 넘은 것이다.
아마도 이번 기회에 그 선 넘은 자들을 추려 내려는 것이리라.
그의 의도를 눈치챈 마영이 당부했다.
“너무…… 심하게 다루진 말아 주십시오. 그들은 그저 무지했던 것뿐입니다.”
“나도 그럴 생각이지만…… 주제를 모르고 날뛴 대가 정도는 받아야겠지. 다시는 그런 생각을 품지 못하도록.”
적제가 싸늘히 웃으며 답했다.
마영은 다시 골치가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