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향 133화
악록산에서의 일들이 중원 전역에 퍼지기까지 걸린 시간은 석 달.
입에서 입으로 퍼지기 시작한 소문은 언제부턴가 들불처럼 번지더니, 천하삼세 간에 흐르던 팽팽한 긴장감을 뒤흔들 정도였다.
첫 번째 소문은 그곳에 육왕칠사 중 두 고수가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연이은 사건에 비하면 그리 놀라운 것도 아니었다.
바로 적제의 출연 때문이었다.
천하의 패권을 노리는 천하삼세.
그 세 방파 중 태풍의 핵이라 불리는 패도맹의 주인, 적제가 악록산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것도 그의 손발이나 마찬가지라는 공포의 귀천대를 이끌고.
게다가 그는 심검을 선보이며 육왕칠사에 버금가는 고수임을 스스로 입증했다.
그것만으로 모자랐는지 그는 무림의 유서 깊은 조직인 천검단을 손에 넣었음을 공식으로 알렸고, 즉석에서 살왕을 패도맹으로 영입하는 데 성공하기까지 했다.
천하삼세는 본시 천상련과 반천련이 막상막하이고, 패도맹이 그 뒤를 바짝 뒤쫓는 형세다.
세에서 밀리던 패도맹은 그나마 질적인 면에서 약간 앞서고 있어 천하삼세의 일각을 차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살왕과 천검단이라는 패를 손에 쥐어버렸으니, 천하삼세 간의 팽팽하던 균형에 변화가 올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그러나 이보다도 더 큰 관심을 받고 있는 사건이 있었다.
아니, 보는 관점에 따라 약간씩 다르겠지만, 결과적으로 봤을 때 관련된 이들을 모조리 닭 쫓던 개로 만들어버릴 경악할 만한 사건이었다.
바로 검귀의 진정한 신분이 드러난 것이다.
놀랍게도 세상을 혼란에 빠트린 무림공적인 검귀는 패도맹주의 직전제자였던 것이다.
검귀가 여러 무인들에게 잡혀 있는 모습을 본 적제의 분노는 활화산과도 같았고, 그곳에 있던 수천의 무인은 죽음의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살았다.
놀랍게도 검귀가 그의 사부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돈과 명성을 위해 자신을 죽이려 한 자들을 오히려 살리다니, 그 인품에 누가 감복하지 않겠는가.
이에 살아남은 자들은 검귀를 검성(劍星)이라 부르며 칭송하기 시작했다.
결국 검귀라는 불길한 별호는 검성이라는 새 별호에 뒤덮여 흐릿해져 갔다.
심지어 젊은 층에선 그를 우상화하는 움직임도 보였다.
그와 살왕 간의 공전절후한 비무 이야기도 퍼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는 사실상 무림공적이라는 딱지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더 현실적인 이유는, 패도맹주의 하나뿐인 제자를 무림공적이라 부를 만한 담량을 지닌 이들이 없었기 때문이 컸다.
* * *
“검성이라…… 허허. 검성이라…… 허허허허.”
적제는 이렇게 진심을 담아 웃어 본 것이 얼마 만인지 몰랐다. 이 모든 게 제자의 새로운 별호 덕분이었다.
“스승은 제왕(帝王)에, 제자는 별[星]이라……. 정말 좋지 않나? 허허허허. 청출어람이라더니.”
젊은 나이에 절대경에 들어선 데다, 세상으로부터 검성이라 불리게 된 제자가 너무도 자랑스러웠다.
적제라는 위치만 아니었다면 제자를 업고 다니고 싶을 정도였다.
“저런 모습은 처음이시군.”
패도맹의 대총사 마영이 어색한 미소와 함께 중얼거렸다.
귀천무단 때부터 늘 함께해 왔다.
소탈하고 수하들을 잘 배려하는 주군과 함께 여러 수라장을 걸으며 웃기도 많이 웃고 울기도 많이 울었다.
그런데도 저런 웃음은 처음 보았다. 저 웃음은 마치…….
‘팔…… 불출…… 같아…….’
물론 속으로만 생각하지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마영은 헛기침을 하며 그에게 말했다.
“어차피 맹주님이 협박해서 퍼뜨린 소문 덕분이지 않습니까.”
“그런가? 하하하하.”
그날 수천의 무인들을 살려 주는 대가로 적제는 그들에게 한 가지를 요구했다.
협박은 협박이었다. 안 들어주면 죽인다는 게 협박이 아니고 뭐겠는가.
협박의 내용은 단순했다. 그들이 악록산에서 보고 들은 모든 것들을 여기저기 퍼뜨리라는 것.
맹의 정보 조직을 시켜 더 부채질하긴 했지만,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 했던가? 소문은 날개 단 듯 재빠르게 퍼졌다.
그 덕분에 자신이나 패도맹의 평판도 엄청나게 상승하였다.
하지만 제자의 경우 환골탈태라 불러도 될 만큼 처지가 바뀌었다.
반천련 측에선 여전히 검귀로 부르는 듯했지만 대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그 소문의 진원지가 반천련의 텃밭이라 할 수 있는 호남 땅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녀석은 지금 어디 있나?”
“그 장로님들과 함께하고 계십니다.”
“허…… 요즘 노인네들과 너무 붙어 지내는군.”
적제는 다소 부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에 마영이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뭐, 그렇지요. 그래서 소공의 별명이 애늙은이 아닙니까, 애늙은이.”
“내 제자지만…… 이거야, 원.”
“장로님들도 그동안 적적하셨는데, 순수하고 착한 청년이 와서 이야기 상대를 해주니 좋아하실 수밖에요. 요즘은 경쟁이라도 붙은 것 같더군요. 소공과 함께하려고…….”
“하긴, 녀석은 화산에 있을 때도 어르신들 사랑을 독차지했었지.”
잠시 과거를 떠올리며 고개를 젓던 적제가 사뭇 진지한 얼굴로 마영을 불렀다.
“마영.”
“네?”
“나도 내 제자랑 놀고 싶다.”
“가출하신 동안 쌓인 일들을 다 처리해 놓으시면 놀게 해 드리겠습니다.”
“……젠장.”
“귀천대 놈들에 비하면 그래도 편한 겁니다. 녀석들은 지금 전방에서 잠도 못 자고 구르고 있습니다.”
“알았다, 알았어.”
마영은 자신의 주군이 많이 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평소엔 조용한 선비 같고, 적을 앞두었을 땐 폭군이 되던 그가 제자와 놀고 싶다며 떼를 쓰다니.
적응이 어려웠지만 이런 모습도 나쁘지 않았다.
오랫동안 짊어져 온 짐을 내려놓았음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 * *
패도맹은 철저히 능력 중심의 방파다.
당연히 장로들이라 해서 그냥 놀고먹진 않는다.
그들도 각각 맹 내에서든 외에서든 맡은 역할이 있고, 그 역할에 충실하다.
새롭게 영입된 살왕이 대표적인 예였다. 그는 호법장로이면서 동시에 감찰부주였다.
뭐, 어쨌든 그렇다 해도 보통의 무사들보다는 시간이 많았다.
“허어…… 그래? 그래서 어찌 되었느냐?”
“그것이…… 안타깝게도…….”
한 준수한 청년이 장로들 사이에서 이야기 중이었다.
그는 얼마 전부터 장로원에 자주 불려 오고 있었는데, 태상장로인 당위룡과 친해지고 나서부터였다.
처음엔 그저 차를 마시다 자신의 과거 쪽으로 이야기가 흐르기에 과감 없이 늘어놓았을 뿐이다.
그러던 것이 어느 순간부터 청취자가 하나둘씩 늘더니, 닷새가 지난 지금은 장로원의 아홉 장로들이 모두 귀를 기울일 정도가 되었다.
그중에는 얼마 전에 합류한 감찰부주 살왕도 보였다.
청년이 오는 날이면 그들은 어떻게든 일과를 일찍 끝내고 장로원으로 발걸음을 하였다. 그만큼 그의 과거는 예사롭지 않았다.
지금은 화산에서 흑마 곽호가 일으킨 난에 대해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늘 살갑게 굴어주던 식당 주인 곽호가 알고 보니 천상련의 마인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가 청년이 친동생처럼 정을 준 어린 사제들을 무참히 죽여 버린 대목에서 장로들은 마치 자기 일이라도 되는 듯 혀를 찼다.
“역시 마인은 마인이군, 어린애들을 죽이다니……. 수치를 모르는 것인가?”
살왕이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곁에 있던 반백의 수염을 기른 노인이 맞장구를 쳤다.
“천인공노할 놈이로고……. 형님께서 직접 찢어 죽이신다면 말리지 않겠습니다.”
육왕칠사 중 칠사의 일인이며 사천당가의 태상가주인 당위룡이었다.
그는 살왕보다 나이가 적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그를 형님이라 불렀다.
하나 살왕은 반로환동한 미중년의 모습이라, 노안인 그가 형님이라 부르니 남이 보기엔 굉장히 어색해 보였다.
그때 청년이 당황한 얼굴로 그들을 말렸다.
“아니에요, 할아버님들.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음…… 하긴, 녀석은 초운이 몫이지.”
“그렇소. 형님들은 너무 앞서 가지 않는 게 좋겠소.”
장로들이 초운이란 이름의 청년을 편들자, 살왕과 당위룡 두 사람은 입맛을 다셔야 했다.
그때 어디선가 맑은 옥음이 들려왔다.
“차부터 좀 드시고 얘기하셔요.”
아주 청초한 미모를 지닌 소녀였다.
인세에 강림한 선녀가 있다면 바로 이러할까?
몸가짐은 단아하기 이를 데 없고, 신비로운 갈색의 눈동자는 그저 흘겨보기만 하여도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그런 그녀를 당위룡이 반겼다.
“오! 청이가 왔구나!”
어째 친할아비인 살왕보다 당위룡이 그녀를 더 좋아하는 듯했다.
차를 들고 온 이 아름다운 소녀는 시녀가 아니었다. 바로 살왕의 하나뿐인 외손녀 이청린.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녀는 불치병에 걸려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선익단이라는 영약과 당가의 뛰어난 의술에 힘입어 건강을 되찾게 된 그녀는, 자신을 치료해준 패도맹에 보답하고자 이렇게 가끔 와서 장로들에게 차를 타 주었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는 웬일인지 거의 매일 오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초운이 드나들기 시작한 이후부터라는 것을 나이 지긋한 장로들은 잘 알고 있었다.
이청린은 그 미모도 미모였지만 부드럽고 상냥한 그녀의 성품 덕분에 패도맹의 젊은 무사들 사이에선 이미 한 떨기 꽃으로 우상시되어 가는 중이었다.
패도맹에도 여자들은 많았지만 그녀와 같은 상냥함과 부드러움을 겸비한 현모양처감은 드물었다.
질적으로 우수한 패도맹답게 여인들 또한 잘 단련된 무사였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이청린 같은 청초하고 여성스러운 소녀는 거친 무인들의 보호 본능을 자극했다.
덕분에 그녀로 인해 상사병을 앓는 젊은이들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어떤 성질이 급한 이들은 겁도 없이 살왕 앞으로 직접 매파를 보내왔으나, 그는 모조리 무시로 일관하였다.
초운도 빙그레 웃으며 그녀를 아는 체하였다.
“청이 왔구나.”
“네, 초운 오라버니.”
장로원을 오가는 동안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 자연스레 정해진 호칭이다.
하지만 초운을 바라보는 청린의 얼굴은 붉어져 있었다.
이에 초운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어디 아픈 거야? 얼굴이 빨간데…….”
초운 입장에선 걱정이 되어 물은 것이었지만, 청린은 되레 자신의 마음이 들킨 것 같아 창피해졌다.
“아…… 아니에요, 오라버니. 그냥 좀 더워서.”
“아직 겨울인데…….”
“…….”
장로들은 두 사람을 보며 킥킥거렸다. 심지어 무뚝뚝해 뵈는 살왕조차 살짝 미소 지을 정도였다.
아름다운 소녀의 가슴은 연심으로 가득 차 터질 것 같건만 사내놈은 둔하기 그지없으니, 연륜이 넘치는 노인들로서는 소꿉놀이를 엿보는 것 같아 즐거울 수밖에.
“이야기가 끊겼다, 이놈아.”
얼마 전 제자의 치료를 위해 패도맹에 들렀다가, 얼떨결에 호법장로가 되어버린 장왕이 초운을 재촉하였다.
그의 패도맹 합류는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만약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면 그 파급력은 살왕의 영입 때보다 더 지독할 것이 분명했다.
“아, 예……. 저는 앞이 시커메진 듯한 기분을 맛보았습니다. 분노하여 앞뒤 가리지 않게 된 거지요. 그리고 그날, 검의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오오오!”
장로들이 눈을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