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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향-132화 (132/217)

검향 132화

그에게 있어서 무공이나 살법은 큰 차이가 없는 것이었다.

그것을 나눈 것은 스스로의 마음가짐이랄까?

하나 그는 살수였고, 평생을 함께해 온 비의가 확실히 존재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중검을 깨닫기까지 했다.

가장 빠른 것에서 가장 무겁고 느린 것을 찾아낸 것이다.

이젠 그것을 역으로 풀 생각이었다.

그의 전신에서 흉악한 살기가 배어 나왔다.

상대를 반드시 죽이겠다는 일념, 그것이 초운의 몸과 마음을 덮치는 중이었다.

그가 읊조리듯 말했다.

“아느냐? 가장 느린 것이 가장 빠른 법이다.”

“……어?”

초운은 반응하지도 못했다.

분명 상당히 떨어져 있던 그의 몸이, 그의 검이 자신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파팟---!

볼이 베이며 핏방울이 튀었다.

살왕은 처음의 장소에서 똑같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볼의 상처만 아니라면 움직이지 않았던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환검을 펼치거라. 아직 세 번째 검식은 끝나지 않았다.”

초운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스스로 변화의 중심, 아니 변화의 근원이 된다 함은 무서운 집중력을 필요로 한다.

이것을 물 흐르듯 자연스레 꺼내는 것은 그에겐 아직 머나먼 일이었다.

붕검을 받아 낼 때와는 달랐다. 눈앞의 상대를 볼 수도 없다. 때문에 박자를 읽을 수도 없다.

먼저 공격하자니 상상 속에서 펼친 수많은 검의 궤적들이 모조리 격파되고 있었다.

그만큼 빈틈이 없어 보였다.

죽음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무섭지는 않았다.

인생 최대의 위기이건만, 마음은 더할 나위 없이 차분했다.

저런 상대라면 자신이 혼신을 다해도, 모든 것을 보여 줘도 다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상대를 죽일까 걱정하는 대신, 내가 죽지 않을까 걱정하게 된 것이다.

순간 스스로 그어 놓았던 마음의 선을 넘을 수 있었다.

마음이 편해지자 사부를 돌아보았다.

이것을…… 이것을 원하셨던 것인가?

사부는 자신을 향해 웃고 있었다. 귀밑머리가 하얘졌어도 사부는 변하지 않았다.

그 든든함에 초운은 자기도 모르게 씩 웃었다.

그리고 다시 살왕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매화검류…….”

오랜 시간을 참오해 왔다. 실전된 자하신공을 되찾았고 검향을 피워 낼 수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십사수매화검과 이십사수매화검의 경계가 허물어졌다.

자하신공을 얻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둘이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먼 옛날 매화검선에 의해 둘로 분리되었던 하나의 검공이 시공을 뛰어넘어 펼쳐지고 있었다.

“칠절매화검(七絶梅花劍)…….”

초운의 중얼거림에 살왕의 눈썹이 꿈틀대었다.

“칠…… 절매화?”

반선검왕도 얻지 못한 것을 저런 아이가?

하지만 그는 크게 동요되지 않았다.

천하제일의 살수답게 마음속은 지극히 고요한 호수와도 같았다.

그때 초운의 검식이 완성되었다.

만화성막(萬花成幕).

수많은 꽃잎이 장막을 이루듯 검기가 꽃잎처럼 휘날렸다.

뒤이어 피어오르는 향기는 검향.

살왕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때맞추어 그의 검식도 완성되었다.

벽월부동검결(碧月不動劍訣).

단절(斷絶)의 기(技).

섬령(閃靈).

그것은 한줄기 선(線)이었다.

상대에게 도달할 수 있는 최단의 직선. 더할 나위 없이 얇고 가는 압축된 검기.

아니, 검강은 무엇이든 자르고, 무엇이든 꿰뚫어버릴 듯했다.

이 너무도 빠르고 가는 기운은 빛으로 화해 초운의 만화성막과 부딪쳤다.

------!

소리는 없었다. 그저 밝은 빛이 폭발할 듯 터져 나왔다.

생각 있는 군중들은 눈을 감았고, 그러지 못한 이들은 눈이 멀거나 안구가 타 버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눈이 멀지 않은 사람들은 서서히 눈을 뜨며 상황을 살폈다.

어느 누구도 그 같은 상황에서 검귀, 초운이 살아 있으리라 예상치 못하였다. 장왕조차 그리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 예상은 너무도 쉽게 깨어졌다. 비틀거리긴 했지만 초운은 서 있었다.

반대편의 살왕이 하늘을 잠시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허허허…… 비록 전력을 다한 건 아니나 그 오의는 충분히 보여 줬건만…… 그것마저 막아내다니…….”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노부가 졌다.”

三章

작은 목소리였지만 그 파장은 컸다.

군중들이 일제히 웅성이기 시작했다.

“쿨럭…….”

초운은 그제야 피를 토하며 무릎을 꿇었다.

코와 입에서 흐르는 선홍색의 피는 그의 내상이 심각한 수준임을 짐작케 하였다.

비록 환검의 진의를 얻었고, 그 진의를 담은 칠절매화검을 펼쳤다고는 하나, 그는 심검지경에 달한 살왕에 비해 한참 모자랐다.

살왕의 입장에선 어린아이와 싸워 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장하다. 정말 장하다…… 초운아.”

익숙한 목소리. 적제였다.

칭찬에 인색한 그였지만 검향에 이르고, 사문의 오랜 숙원인 칠절매화검마저 복원한 제자가 기꺼울 수밖에 없으리라.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부를 원망하지 않았더냐?”

“아닙니다. 덕분에…… 넘을 수 있었는걸요. 늘 넘지 못하던 그 영역을.”

초운의 대답에 적제는 기쁨을 숨기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조금 전의 격돌로 그의 제자는 절대고수가 되었다.

몸과 마음의 한계까지 열어젖힌 결과였다.

그 상대가 살왕이 아니었다면 심약한 초운으로서는 절대경에 드는 데 많은 시간을 소모했을 것이다.

무림의 오랜 역사 속에서도 초운의 나이에 절대경에 이른 자는 극히 드물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은 하나같이 역사에 이름을 남긴 위대한 인물이 되었다.

그것이 악인이든 영웅이든 간에…….

“며칠 두고 보면서 궁금했었지. 분명 기량은 충분한데 절대경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가…….”

어느새 다가온 살왕이 적제에게 조용히 말했다.

그에 적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고마움을 감추지 않았다.

“줄탁동시라는 말이 있소.”

그의 말을 살왕이 바로 이었다.

“병아리가 태어날 때 알 껍질 속에서 쪼는 것을 줄이라 하고, 어미 닭이 밖에서 쪼아 돕는 것을 탁(啄)이라 하지. 사제지간을 일컫는 말이 아닌가.”

“그렇소. 제자가 한 꺼풀 벗기 위해선 스승이 어미 닭이 되어줄 필요가 있는 법이오. 하지만 내가 직접 하자니 오랜만에 만난 귀한 제자를 심하게 대할 순 없을 것 같고……. 해서 때마침 나타나준 선배가 필요했었소.”

“만약 내가 자네 제자를 죽였다면?”

“죽이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었소. 제아무리 눈치가 없는 자라 해도,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가진 자의 비위를 상하게 할 리가 있겠소? 당신은 천하제일의 살수. 그런 비합리적이고 위험한 도박은 하지 않았겠지.”

“허허…….”

허탈함에 가볍게 웃는 살왕이었다. 하나 수긍이 가는 면도 있었다.

확실히 저 초운이라는 청년은 절대경이나 마찬가지인 상태였다.

아니, 절대경이 아닌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그것은 두 번째 검식인 파산을 막았을 때 깨달았다.

환검의 진의를 알고 있는 걸로 봐서는 이미 절대경을 얻은 것이다.

하나 몸이 따라 주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몸과 마음이 따로 놀고 있음을 뜻했다.

제대로 해결 못하면 심마에 빠져 평생 고생할 것 같은, 그런 지경이라 확실한 충격 요법이 필요했다.

적제가 자신의 제자에게서 읽은 것도 바로 그것이리라.

하지만 놀라운 점은, 살왕 자신도 검을 섞어 보고 나서야 알게 된 것을 적제는 보자마자 바로 알아내고 해결책까지 즉석에서 실행했다는 것이다.

‘패도맹의 제왕이라 해서 그저 강하기만 한 줄 알았더니 제법이군.’

적제의 눈썰미와 심기에 감탄한 살왕은 비무 전에 그가 제시한 조건이 떠올라 물었다.

“그래, 노부에게 바라는 것이 무언가?”

“기억하고 있었구려. 별거 아니오. 우리 패도맹은 인재가 필요하다는 얘기를 드리려 했소.”

“노부보고 자네 밑으로 들어가 인간 백정 짓이나 하고 다니라 이건가?”

살왕은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지만 은은히 섞여 나오는 노기만큼은 감출 수 없었다.

결국 자신을 이용한 반천련과 다를 바 없는 놈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아니오.”

“아니다?”

“패도맹은 천하제일살수를 부리는 호사를 누릴 만한 상황이 아니란 소리요.”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건지 모르겠군.”

“쉽게 말하자면 영입 제의요. 내부 조직을 하나 내어드릴 테니, 맹의 간부가 되어 인재를 육성해 달라는 뜻이오.”

결국 패도맹에 들어와 달라는 소리다. 하지만 반천련과는 달랐다.

반천련은 살왕을 그저 하나의 도구 정도로 여겼다.

게다가 손녀의 목숨을 담보로 그가 수십 년간 지켜온 원칙과 신념을 저버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적제의 요구는 반천련처럼 모욕적이지 않았고, 패도맹에 들어와 맹을 받치는 기둥이 되어 달라는 것이었다.

적제가 계속해서 말했다.

“세력 대 세력전에서 한 명의 고수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소. 상대측에도 고수가 많기 때문이지. 그렇다면 차라리 세력을 더 키우는 편이 낫지 않겠소? 질적인 면에서든 양적인 면에서든. 그래서 선배가 필요하오. 무엇보다 천살신전이라는 걸출한 문파를 직접 세우고 경영하였으니…….”

“조직을 이끌어본 내 경험이 필요하다는 얘기로군.”

그의 목소리에 서려 있던 노기는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두 거물 간의 대화를 지켜보던 군중들을 비롯하여 귀천대와 천검대, 장왕과 서평, 그리고 바로 곁에 있던 초운까지 같은 생각을 떠올리는 중이었다.

‘꼬시고 있군.’

‘꼬시고 있어.’

‘천하제일살수를 꼬시려 한다.’

확실히 살왕은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무림의 명숙이다. 그것도 보통 명숙이 아니라 육왕칠사의 하나로 천하제일살수라 불리는 자다.

천하삼세 중 한 곳의 영입 제의라 해서 쉽게 흔들릴 신분은 아닌 것이다.

하나 그 자신을 도구처럼 부린 반천련에 대한 실망감이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게다가 비무 전에 한 약속 때문에 명분마저 충분한 상태였으니, 그는 결국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자네에게 존댓말은 기대하지 말게.”

이 대답이 허락의 의미임을 모를 자는 없었다.

적제가 웃으며 답했다.

“신분은 감찰부주이나 호법장로로 대우하겠소.”

“음.”

만족하였는지 살왕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러고는 손을 내밀었다.

적제는 품에서 또 하나의 선익단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선익단이 손에 들어오자 안도의 한숨을 내쉰 살왕이 말했다.

“조만간 패도맹으로 가지…….”

“너무 늦진 마시오.”

“손녀가 병에 걸렸네. 어차피 이것의 약발을 잘 받게 하려면 사천당가의 손이 필요할 터…….”

“음…… 맹에 미리 사람을 보내어 기별을 하겠소.”

“고맙군.”

살왕은 그렇게 사라졌다.

천검단의 검주인 적운은 다리에 힘이 풀리는 듯했다.

저런 자에게서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긴장이 풀렸던 것이리라.

그것은 벽호나 성 장로도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벽호는 그의 공격에 팔을 잃지 않았던가.

그런 이와 이제 한솥밥을 먹게 되었으니 그의 심정은 복잡했다.

적제는 멀뚱히 서 있는 군중들을 바라보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

“귀천대와 천검단은 왜 가만있는가? 쥐새끼들을 잡아 죽이지 않고.”

“허헉!”

“컥!”

사태 파악이 빠른 이들이 비명을 집어삼켰다.

장왕부터 살왕까지 연속되는 사건으로 인해 잠시 지체되었을 뿐, 그들은 학살당하던 중이었다.

다시금 공포가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사부님…….”

“왜 그러느냐?”

“오늘은 피를 그만 보았으면 합니다.”

“허허…… 저들은 너를 죽이려 했다.”

“제자는 죽지 않았습니다.”

“…….”

적제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나 내심 기분은 좋았다.

못 알아볼 만큼 쑥 커 버린 제자였지만, 남을 쉽사리 미워하지 못하는 성정은 그대로였다. 그 변하지 않은 모습이 너무도 좋았다.

이러한 속마음과는 달리 못마땅한 듯 표정을 굳힌 채로 혀를 찬 그가 군중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좋아, 살려 주지.”

그 한마디에 군중들 모두가 안도했다.

하나 결코 내색하지 않았다. 금세 마음이 바뀔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대신 너희 쥐새끼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귀 씻고 잘 들어라.”

살 수만 있다면 뭔들 못하랴.

사천이 넘는 무인들은 눈도 깜빡하지 않고 적제의 입만 바라보았다.

적제가 씩 웃으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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