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향 129화
광풍이 불어닥쳤다.
엽성이 다시 한 걸음 어렵게 딛자, 이번엔 살갗이 찢겨져 나가며 피가 터졌다.
“크흑…….”
엽성과 달리 적제는 여유 만만했다. 그는 천천히 유람하듯 뒷짐을 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가 일으킨 기세는 악랄하기 그지없었다.
그의 머리 위로 바람이 모여들며 검의 형상을 이루기 시작했다.
검기가 아닌 순수한 바람의 결정체.
하지만 사람들 눈에 바람이 보일 리 없다.
그저 비정상적인 공기의 압력이 느껴지고 있을 뿐이었다.
모여들던 바람이 압축되기 시작하며 그 존재력을 널리 퍼뜨리고 있었다.
보이지는 않으나 저 자리엔 반드시 검(劍)이 존재한다.
모두가 느낄 수 있는 진실이었다. 적제는 정말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그와 엽성의 거리는 겨우 이 장여. 그 거리가 좁혀지기도 전에 죽음을 맞이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엽성은 굴하지 않았다.
그 고통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 것이다.
‘아프지 않다. 그 세월에 비하면 아프지 않아.’
그가 다시 한 걸음 내디뎠다.
파캉---!
“크읍!”
어깻죽지에서 핏물이 솟구쳤다.
그는 애써 신음을 삼켰다. 그리고 다시 한 걸음. 이번엔 허벅지였다.
적제의 머리 위에 있을 보이지 않는 검.
그 검이 내뿜는 바람에 가까워지는 것만으로도 이 정도인데, 정통으로 맞는다면 몸이 산산조각 나고 말 것이다.
아니, 어쩌면 피 모래로 화할지 모른다.
문득 사부를 바라보았다.
팔짱을 낀 채 자신을 바라보는 얼굴에는 표정이 없다.
그러나 팔짱을 끼고 있는 양손은 팔을 강하게 쥐고 있었다.
팔에서 흘러내린 피가 옷을 적시고 뚝뚝 흘러져 내리는 것만 보아도 그의 사부가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었다.
안심하라는 듯 그가 웃어 보였다. 사부의 한쪽 눈꺼풀이 살짝 떨리는 것이 보였다.
다시 한 걸음…….
파팟!
이마가 길게 베이며 핏물이 눈을 가렸다. 한데도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몸 곳곳에 상처가 생겨났다.
단순히 살이 찢기는 수준이 아니라 근육이 파이고 뼈가 울리는 중상임에도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야말로 불굴의 의지였다.
뒷짐을 지고 있던 적제의 손이 풀렸다. 그리고 오른손을 들어 엽성을 가리켰다.
“단 일검(一劍)이다. 일검에 너는 죽는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거라.”
“그런 말은 날 무릎 꿇리고 나서 하시오.”
적제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 사내였다.
과거, 자신에게 팔을 잘린 때의 가벼워 보이던 청년은 더 이상 없었다.
하나 적당히 상대해 줄 마음은 없었다.
한 무인이 모든 것을 걸고 부딪쳐 온다.
그는 그것을 못 본 척할 수 없다. 그 역시 제대로 보여 줘야 한다.
그래서 보여 줄 생각이다. 그가 도달한 매화검류의 오의(奧義)를.
절대 보일 것 같지 않던 바람의 집약체, 풍검(風劍)은 어느새 조금씩 실체화되어 가고 있었다.
무형을 유형화시킨 이유는 엽성에 대한 배려였다.
그가 무엇을 상대하고 있는지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쓸데없이 강기를 덮어씌웠다.
실체를 완전히 드러낸 풍검은 느렸다.
그것은 아주 천천히 엽성을 향해 움직였다.
거북이처럼 느렸으나 엽성은 피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어느 누구도 저 검 앞에선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
무인이라면 누구나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마음의 영역이다.
도객이라면 심도(心刀), 권사라면 심인권(心印拳), 엽성과 같은 장법의 고수라면 심인장(心印掌)이다.
그리고 검사라면 누구나 원하는 게 바로 심검이다.
진정한 무인이라면 보고 싶고, 직접 맞서고 느끼고 싶은 것이 바로 마음의 영역.
그 영역이 정면에서, 그것도 자신을 향해 다가온다.
공포에 앞서 무인으로서의 충만감이 가슴을 채우고 있었다. 그래서 피하지 못했다.
아니, 설사 피할 생각이 있었다 해도 심검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저 절대적인 패기(覇氣)는 그의 몸과 마음을 제압하고 있었다.
그저 가까워지는 것만으로도 내외(內外)가 상했던 것이다.
그 증거로 입에선 쉴 새 없이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굽히지 않았다.
모든 공력을 하나뿐인 팔로 보냈다.
그리고 단 한 번도 완성하지 못했던 금장류 최후의 절초를 시전했다.
금장류(金掌類).
백팔단혼장(百八斷魂掌). 오의(奧義).
금련화(金蓮花).
二章
엽성의 손바닥 안에서 은은하게 빛나던 황금빛의 기운이 그의 사부인 장왕과 마찬가지로 세차게 타올랐다.
장왕은 눈을 부릅떴다.
저 타오르는 기운이 제자의 생명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자는 지금 자기 기량으로는 불가능한 일을 해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기적 따위가 아니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불태우는 금기의 선을 넘어버린 것이다.
나서고 싶었다. 나서서 말리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제자는 죽는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바람의 칼날에 살이 찢기면서도 웃고 있는 제자의 얼굴을 보아버렸기 때문이다.
초운은 엽성의 모습에서 과거의 자신을 보았다. 곽호의 손에 어린 사제들을 잃고 진원지기를 깨뜨려 폭주하던 그때…….
“사부님…….”
초운의 염려와 달리 적제의 얼굴이 기쁨으로 가득 찼다.
“좋아! 아주 좋구나!”
그의 심검이 더욱 느려졌다. 그러나 공간을 제압한 압력은 더욱 강해졌다.
귀천대와 천검단의 무인들이 십 장 뒤로 황급히 피했다.
하나 가장 가까이 있던 군중의 일부는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적제가 목소리에 힘을 실어 선포하듯 외쳤다.
“들어라! 검의 소리를.”
우우우웅---!
커다란 검명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더욱더 많은 군중들이 귀를 막고 쓰러졌다.
이번만큼은 초운도 견디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가 비틀거리자 어디선가 청량한 기운이 일어나 그의 등을 타고 들어왔다.
금세 몸이 편해진 초운은 놀란 눈으로 등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나타난 장왕이 그의 등에서 손을 떼고 있었다.
“내외의 조화가 제법이구나, 화산의 애송이. 그 나이에 검귀라 불릴 만도 해.”
“가, 감사합니다.”
칭찬을 받으니 일단 감사를 표하긴 했다.
그러나 결코 그럴 상황이 아님은 눈치가 없는 편인 초운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스승이 장왕의 제자를 죽이려 하는 상황에서 상대의 제자를 돌봐 준다?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장왕은 묵묵히 자신의 제자와 적제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미 쓰러져도 진즉에 쓰러졌어야 했다. 한데도 눈앞의 사내는 한 걸음씩 다가오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짓눌러 죽여 버릴 수 있지만 그러지 않았다.
앞서 설파룡이라는 절대고수는 이보다도 못한 압력에 굴해 미쳐 버렸다.
그런데 저 금장류의 젊은 후계는 금기를 넘어 생명을 불태워도 겨우 초절정에 불과하다.
기특했다.
새외를 질타하던 귀천무단 시절의 열정이 되살아난 듯했다.
이런 사내에겐 굳이 장왕의 말이 아니더라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래서 그러는 중이다.
하나뿐인 손에서 터져 나오는 금색의 연꽃에는 한 사내의 생명과 불굴의 의지가 담겨 있었다.
이것을 피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쾅! 콰쾅-!! 쾅!
열두 번의 장법을 온몸으로 받았다. 강하긴 했지만 그의 호신강기를 넘어서진 못했다.
그러나 그는 일 장, 일 장마다 엽성의 묵직한 마음을 느꼈다.
그리고 그의 생명의 불꽃이 점점 꺼져 가는 것도 느꼈다.
‘육체와 마음, 삶을 던져 혼신을 다한다. 이것 역시 패도(覇道).’
그가 제자인 초운에게 가르쳐 주고 싶은 것이었다.
적제의 느릿한 풍검은 엽성의 머리와의 거리를 불과 반 장 앞으로까지 좁혔다.
이윽고 엽성의 힘이 다해 가고 있었다.
그의 절초는 적제의 호신강기를 뚫지 못했다. 아니, 흠집조차 내지 못했다.
그의 눈빛은 점점 희미해져 갔고, 적제의 풍검은 이제 그의 미간에서 불과 손바닥 하나 정도의 거리만을 남겨 두고 있을 뿐이었다.
풍검은 맛보지도 못하고 그 주변의 압력만으로도 그의 전신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의 몸이 박살나지 않은 것은 적제의 배려 덕분이리라.
그나마도 지금 그 마지막 배려가 사라지려 하는 중이었다.
적제가 마음으로 이룬 풍검은 엽성의 몸을 탐욕스레 갉아먹고 있었다.
적제가 물었다.
“어땠나?”
“……좋…… 았소.”
엽성이 씩 웃었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잠시 후 나머지 무릎도 땅에 대었다.
그가 적제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내가…… 졌…… 소.”
펑----!
패배를 자인하는 한마디.
그 한마디가 끝나자 순간, 풍검이 엄청난 바람을 뿜어 대며 사라졌다.
풍검이 사라지며 터져 나온 압력에 휩쓸린 엽성은 뒤로 쓰러지듯 무너졌고, 그런 그를 적제가 잡아 주었다.
의식을 잃어가는 그를 향해 적제가 입을 열었다.
“제 기량을 알지 못하고 그저 죽기 위해 덤비는 건 만용이지……. 미친 짓이야. 하나 자네는 모든 것을 내던진 후에 패배를 인정했어. 무인으로서…… 힘든 선택이었겠지. 하나 그 선택이 자네를 구한 것이네.”
만용과 용기 사이에서 그의 목숨을 구한 것은 바로 용기였다.
만일 끝까지 패배를 자인하지 않았다면 적제는 결국 그의 목숨을 취하고 말았으리라.
“내 제자는 살아 있는가?”
얼굴이 하얗게 굳어버린 장왕이 다가오며 물었다.
딱딱한 어투였지만 스승의 마음은 스승이 잘 아는 법이다.
적제는 그의 걱정을 알고 답해 주었다.
“아직은……. 하지만 당장 치료하지 않는다면 내일을 기약할 수 없소.”
“알았다. 이리 건네다오.”
“아니 되오.”
“뭐라?”
적제의 거절에 장왕이 노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자 적제가 다시 말했다.
“선배의 제자는 진원지기가 깨졌소. 의술이 하늘까지는 아니더라도 태산 언저리까진 닿은 의원이 필요할 텐데, 지금 당장 누구에게 데려갈 생각이시오?”
“…….”
당장 떠오르는 의원은 많았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멀리 있었다.
장왕이 제아무리 육왕칠사의 하나라 하여도 하루 만에 가기엔 무리인 거리였다.
적제의 목소리가 그의 근심 사이로 파고들었다.
“내게 맡기시오.”
“네놈이 의원이라도 된단 말이냐!”
적제가 나직이 웃으며 말했다.
“의원은 아니나…… 난 패도맹의 맹주요. 그리고 패도맹엔 사천당가가 있지.”
적제의 대답에 장왕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