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향 127화
갑자기 나타나 피바다를 만들어버린 귀천대.
그들이 따르는 적제의 등장은 소문이 진실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들의 마음속에 자리한 두려움은 점점 더 고조되어 가고 있었다.
고요한 가운데 패왕의 발걸음은 한 마차로 향하는 중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워질수록, 내색은 안 했지만 적오자는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십 년이 넘었다.
어린 제자를 화산에 내버려 두고 하산해야 했던 마음이 어떠했겠는가.
고향 같던 사문이 멸문하자 제자는 세상에 홀로 내던져졌다.
그날 이후 잠을 제대로 이룬 적이 없었다.
불과 다섯 보 앞.
철창을 사이에 두고 스승과 제자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앞서 장왕에 의해 녹아 없어지긴 했지만 아직도 상당 부분 남아 있던 철창이 그의 몸에 닿지도 않았건만 우그러져 버렸다.
철창 안에 앉아 있던 청년은 그리움에 복받쳤는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였다.
“사…… 부…… 님…….”
“네놈이 잘도 숨어 다녀 준 덕분에 찾기가 무척 힘들더구나.”
오랜만에 만났건만 튀어나온 말은 다소 차가웠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젖어 있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울지 않을 것 같던 패왕의 눈에도 역시 뿌연 습막이 어렸다.
그를 바라보던 검귀, 아니 초운도 마찬가지였다.
초운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몸을 감싼 사슬들이 힘없이 끊어졌다.
일어선 그가 사부인 적오자를 향해 절을 하기 시작했다.
일 배, 이 배…… 아홉 배.
총 아홉 번의 절을 마친 초운이 말했다.
“불초 제자가…… 사부님을 뵙습니다.”
적제, 아니 화산의 마지막 매화검수이며 초운의 스승인 적오자가 장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했다.”
단 한마디였지만 초운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스승과 제자의 감동적인 재회였지만, 이를 지켜보던 군중들의 가슴은 싸늘히 식어 가고 있었다.
수많은 무인을 베고 두려움의 대상이던 현천마녀마저 참살한 자가 바로 검귀(劍鬼)다.
그러나 무림공적인 이상 그의 목숨은 끈 떨어진 연이나 다름없었다.
어떤 무인도 홀로 천하를 상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데 적제의 제자란다. 그것도 적제가 친히 선포했다.
그의 단 한마디에 무림공적이라는 단어는 유명무실해졌다.
적어도 적제의 선포를 직접 들은 이들의 머릿속에선 그러했다.
공적이란 것도 비빌 언덕이 없는 야인일 때나 공적이지, 그 뒤에 천하삼세인 패도맹이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 스승이 패도맹주 적제라면 더더욱.
그것은 즉, 검귀가 패도맹의 차기 맹주임을 뜻하기 때문이다.
검귀의 갑작스러운 신분 상승은 지켜보던 이들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자신만만하게 검귀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던 육대세가의 정예들도, 그리고 정의회의 검풍대도 마찬가지였다.
적제는 그들을 돌아보았다.
“반성은 하고 있는가?”
“…….”
군중은 침묵했다. 적제가 스산한 미소와 함께 다시 말했다.
“죄 있는 자, 엎드려 용서를 구하라. 고개가 가벼운 자는 살 것이나 뻣뻣한 자는…… 구족을 멸할 것이다.”
모욕적인 발언이었다.
하지만 듣는 이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은 더 진해졌다.
하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저들은 겨우 스물인데 우리는 사천이 넘소. 뭐가 그리 두려우시오. 명성? 명성이 밥 먹여 주는 것도 아니고. 저자가 육왕칠사라도 되오?”
반천련 호남 지부장이 끌고 온 무사들까지 더하면 오천이 넘는 대인원이다.
무리를 지으면 없던 용기도 생겨 유약한 양들도 늑대에게 대항하는 법. 그것이 바로 군중심리다.
그렇게 점점 번져 가는 투지를 읽은 적제가 미소를 지우지 않고 중얼거렸다.
“그래…… 비열한 쥐새끼들이 할 선택이야 뻔하지. 원래 쥐들은 한데 모이면 기가 사는 법이니까.”
보통 양민이 이만큼 모여도 앞에 나서기란 만만치 않은 법이다.
한데 무려 오천에 달하는 무인들의 기세를 등에 업고 나서는 이가 있었다.
그는 전혀 눈에 띄지 않을 것 같은 생김새의 무인이었다.
무인이 맞는지 의문이 들 만큼 지극히 평범한 외모.
허리에 찬 박도 한 자루만이 그가 무업을 쌓았음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까짓것! 해봅시다! 저 악독한 사제를 척살하고 우리 호남 무인들의 기개를 보여 주는 겁니다!”
그러자 무인들의 투지가 더욱더 고조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귀천대와 그들의 주군인 적제는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비웃고 있었다.
적제가 나직한 목소리로 누군가를 불렀다.
내공이 실렸는지 그의 목소리는 아주 멀리까지 울려 퍼졌다.
“천검단과 검주는 보고 있는가?”
“예! 주군!”
곧이어 우렁찬 사자후와 함께 오십 인의 무사들이 군중들의 왼편에서 나타났다.
그 결과 쉽게 달아오르는 듯하던 투기가 순식간에 꺼져 버렸다.
천검단.
정의에 미친 광신도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반천련과 천상련과의 전장, 그 최전선에서 맹활약하던 무사 집단이 나타난 것이다.
특히 정의를 위해 목숨을 도외시하는 그들의 지독함은 정사마를 막론하고 널리 알려져 있었다.
한데 그런 그들이 적제를 향해 주군이라 부른다?
아무리 불학무식한 자라 해도 이쯤 되면 상황의 심각함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초절정고수가 즐비하고 절대고수마저 끼어 있는 귀천대.
오천의 무인이 전멸을 각오하더라도 이길 수 있을지 모를 노릇이었다.
그나마 머릿수에 기댄 희망과 군중심리로 사기충천하였으나, 천검단의 등장으로 인해 그마저도 이제 꺾이고 말았다.
“반드시 온다고 했지?”
벽호가 하나 남은 팔을 들어주먹을 보여 주며 인사했다.
“기다리고 있었나?”
적운이 미소를 띠며 물었다.
“허헐. 이런 말 하기 뭐하네만, 자네 정말 쇠창살이 어울리더구먼.”
성 장로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흔들었다.
초운은 그들의 생사를 확인하게 되어 기뻐하면서도 어안이 벙벙했다.
이들이 어찌하여 스승을 주군이라 칭한단 말인가.
그 이유는 적제, 아니 적오자가 설명했다.
천검단의 검주 적운은 본래 내상이 심했다. 살왕의 붕검에 당한 내상이 회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도 모자라 반천련의 고수들인 천중팔성, 그중에서 가장 잔인하고 강력하다는 절대고수 설파룡과 맞닥뜨려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하나 그것은 적오자와 귀천대를 만나며 간단히 해결되었다.
다들 무사한 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 그리고 증거는 하나 더 있었다.
“히…… 히히히히…….”
머리를 산발한 채 목에 사슬이 감긴 한 중년인이 천검단의 무사들에 의해 개처럼 끌려왔다.
반천련 호남 지부 측의 무인들은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서…… 설 대협!”
천중팔성의 첫 번째 별이라 불리며 천하에 그 명성이자자한 절대고수.
그런 자가 목에 사슬을 매고 개처럼 끌려 다니고 있다니, 모두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 더욱더 경악할 만한 일이 벌어졌다.
“헤헤헤…… 주인님, 주인님…….”
눈이 반쯤 풀린 설파룡이 개처럼 엎드리더니, 네 발로 기어 적오자를 향해 다가가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더 놀라운 것은 적오자의 태도였다.
그는 자신의 다리에 머리를 비비는 설파룡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말 아끼는 ‘개’처럼 말이다.
적오자가 초운을 향해 말했다.
“오다가 개를 한 마리 주워 버렸구나.”
“…….”
초운은 동정 어린 눈으로 설파룡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을 당했는지 아주 미쳐 버린 듯했다.
물론 그는 그것이 자신의 사부인 적오자의 짓인지는 몰랐다. 그저 사부가 불쌍한 사람을 거두었다고 여겼을 뿐.
“그런데 어떻게 천검단이 스승님께…….”
초운의 물음에 벽호가 씩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궁금하겠군. 내 모든 것을 설명해 주지.”
“…….”
“그것은 주군께서 사천을 지역 기반으로 패도맹을 세우시고, 제1대 맹주로 등극하신 치명적인 매력의 소유자…….”
벽호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옆에 있던 적운이 인상을 찡그리며 말을 잘랐던 것이다.
“저놈 입에서 개 짖는 소리 좀 안 나게 해라.”
“……네.”
천검단원들 손에 벽호가 끌려 나가자, 적오자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천검단을 바라보던 자신의 제자를 향해 대신 설명했다.
“반천련 놈들에게 당하고 있더구나. 너랑 친하다기에 구해 왔다. 왜? 혹시 안 친한 놈이더냐?”
“아니에요, 사부님. 친합니다. 정말 친한 사람들입니다.”
초운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적운들을 바라보았다.
몹시 걱정했던 이들이 살아 있고, 또 괜찮은 듯 보이니 너무도 기뻤다.
“그리고 좋은 인재들이라 내가 거두기로 했다. 괜찮겠지?”
“사부님의 그늘 아래라면 괜찮습니다.”
초운은 천하 정세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천검단의 패도맹 합류가 얼마나 큰 의미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천검단은 그 자체로도 어지간한 거대 방파를 능가하는 정보력과 힘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그들을 부리던 반천련에서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만약 알았다면 절대 내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유야 어찌 됐든 버림받은 천검단은 그들에 대한 복수를 천명했고, 그들의 목적과 패도맹주 적제의 이해가 상응하니 힘을 합치게 된 것은 당연했다.
그렇게 천하삼세 중 가장 강력한 힘을 지녔으나 세력에서 밀리던 패도맹은 날카로운 검을 한 자루 얻었다.
오늘 이후 천하의 정세는 급격히 바뀔 것이 분명했다.
기뻐하는 초운의 어깨를 두드린 적오자는 다시 한 번 군중들을 돌아보았다.
“기회는 줄 만큼 줬지만 어쩔 수 없군. 천검단과 귀천대는 들으라.”
“하명하십시오, 주군!”
귀천대라는 이름의 섬멸(殲滅)의 뿔[角]을 앞세우고 공포를 뿌리며 나타난 그는 나직한 목소리로 명(命)했다.
“살아 숨 쉬는 것은 모두 죽여라.”
“존명!”
이십 인의 귀천대가 외친 사자후에 공기가 울렸다.
그들의 우렁찬 대답은 공포라는 감정으로 변해 군중들의 가슴속에 파고들었다.
벌써부터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듯했다.
지금 이 순간 군중들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오직 죽음, 죽음뿐이었다.
“나, 난 그만할래. 이곳에 더 있다간 죽을 거야!”
“나도!”
“가자! 도망쳐!”
공포 또한 전염이 빠르다.
하나둘씩 물러서며 도망치기 시작하더니, 삽시간에 모두에게 전염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귀천대의 섬멸진은 잔악하기로 유명했고, 사냥감은 끝까지 쫓는다는 천검단의 악명은 그 역사만도 이백 년이다.
귀천대의 사자후가 천지를 진동시켰다.
“나의 마음은 강철(鋼鐵)!”
파캉!
시작부터 피륙이 사방으로 비산한다.
첫 시작은 귀천대였다.
스무 명의 고수 중 절대고수가 세 명이나 있고, 나머지도 모두가 검귀급의 초절정고수였다.
검귀 하나도 어찌하지 못하는 자들이 태반이다.
사기라도 높으면 대항이라도 했겠지만, 지금은 모두 공포에 질린 사냥감에 불과했다.
그들이 다시 외쳤다.
“나의 몸은 낙뢰(落雷)!”
콰콰쾅!
한순간에 수십 명이 죽어 나갔다.
배가 갈려 내장이 쏟아지고 목이 잘린다.
그럼에도 어느 누구 하나 반항하지 못했다. 그저 고양이 앞의 쥐처럼 몸을 바르르 떨 뿐이다.
“나의 이름은 귀신(鬼神)!”
촤하하학!
여기저기서 일 장 높이까지 피분수가 터져 나온다.
그들은 정말 귀신이었다.
전장을 지배한다는 최악의 섬멸부대. 귀천대의 진정한 모습이었다.
천검단은 묵묵히 그런 귀천대를 뒤따랐다.
귀천대가 휩쓸고 가면 그들이 놓친 것을 천검단이 처리한다.
만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들은 죽이 척척 맞았다.
반 각도 되지 않아 이백여 명이 도륙당했다. 그리고 그 수는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일에 초운이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사부님…… 이건…….”
“초운아, 얘기는 나중에 하자꾸나,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니.”
“하지만…….”
“중요한 손님을 대접해야 할 듯해서 말이다.”
초운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잠시 잊고 있었지만, 이곳엔 또 하나의 절대고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만년한철을 맨손으로 녹여 버릴 만큼 고절한 공력을 자랑하는 장법의 고수.
절대고수의 한계를 벗어난 천외천의 존재.
바로 장왕(掌王)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