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향 125화
뭐, 정작 우문석은 호남 출신도 아닌 해남도 출신이었지만…….
“누군가 검귀를 잡았다는 것도 중요하오. 하지만 호남의 무인들이 잡았다는 것이 더 모양이 나지 않겠소? 이 우모는 다른 성의 사람들이 호남 출신의 무인이라 하면 누구나 엄지손가락부터 내미는 모습을 상상해 보고 있소. 두근거리지 않소이까?”
고개를 끄덕이는 자들이 많아지자 우문석은 표정 관리가 어려워졌다. 그러자 혁가가 급히 전음을 보내왔다.
-이제 다 왔습니다. 표정 관리하십시오.
우문석은 급히 얼굴 근육을 바로잡았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에 실린 공력이 점점 더 많아졌다.
“정사 구분 없이 모두 협심하여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해내었소. 그 배짱과 그 기개를 높이 사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소? 아마 이후 호남의 무인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질 것이오.”
군중 심리란 무서운 것이다.
여기저기서 동의하는 모습을 보이자, 그것은 마치 전염병처럼 퍼져 나갔다.
혁가가 미리 저 군중들 사이에 바람잡이를 심어 놓은 것도 한몫했다.
우문석은 이제 검귀에 대한 처우를 말하기 시작했다.
“검귀는 이 우모가 반천련으로 직접 호송하겠소. 그리고 호송하는 동안 호남 무인들의 기개를 널리 퍼뜨릴 것이며, 본 련에 가서도 위에 장계를 올려 호남성의 무인들의 높은 의협심을 치하하도록 하겠소. 아마 현상금 또한 두둑이 받을 수 있을 것이오.”
이십만 냥에 달하는 현상금은 반천련에서 건 것이다.
그것을 여기 모인 사천의 무인들 개개인이 나눈다면 개인당 오십 냥밖에 되지 않으나, 참여한 방파나 무리대로 나눈다면 일천 냥쯤 된다.
중소 문파의 한 달 유지비가 이백 냥 정도다.
비록 일확천금은 아니나 납득할 만한 수준인 것이다.
군중이 완전히 넘어오자 우문석은 표정 관리를 할 필요가 없어졌다. 장밋빛 미래가 보이기 시작했다.
어차피 자신이 잡았더라도 현상금은 탈 수 없다. 그가 반천련의 무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애초에 그가 원했던 것은 권력이지 돈 따위가 아니었다.
혁가의 말처럼 모양새 좋게 포장은 했지만, 기실 명성의 대부분은 그가 얻을 것이다.
어려운 상황을 현명하게 대처하고 검귀를 호송하는 자가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이제 지긋지긋한 지부장 자리도 끝이로군.’
그는 포박된 채로 땅바닥에 앉아 있는 검귀를 향해 다가갔다.
그러자 검귀, 초운은 무표정한 얼굴로 우문석을 올려다보았다.
우문석이 물었다.
“심정이 어떤가?”
“아무도 죽지 않아 다행입니다.”
초운의 대답에 우문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미쳤다더니 정말이로군.’
“그럼 이제 자네를 데려가야겠군. 혹시 몰라 만년한철로 만든 수레를 가져왔다네.”
그의 말에 초운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누구에게 넘어가든 상관은 없었다. 중요한 것은 적운 일행의 안전이었으니까.
우문석의 수하들이 몰려와 초운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미리 준비한 수레에 태웠다.
수레는 죄수를 호송하기 위한 것으로 철창이 세워져 있었다.
성인 팔뚝만 한 굵기의 철창은 만년한철을 통째로 부어 주조한 것이다. 절대고수가 나타나 검강이라도 뿌려 대지 않는 한 쉽게 잘려 나가지 않으리라.
그렇게 모든 것이 일단락되는 듯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멈춰!”
한 사내가 수레 앞을 가로막으며 외쳤다.
“누구시오?”
아직 욕심을 버리지 못한 무인이 있었나? 하는 마음에 우문석은 정중히 물었다.
대세는 이미 기울었으니 설득할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끝까지 모양새는 좋아야 하지 않겠는가.
사내, 남궁일이 피식 웃으며 짧게 답했다.
“육대세가.”
대답과 동시에 남궁일의 뒤편에서 일백여 명의 무인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고 있었다.
우문석의 얼굴이 굳어졌다. 지켜보던 군중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 * *
육대세가가 검귀를 척살하기 위해 결성한 일백여 명의 절정고수.
그들은 얼마 전 검귀와 맞닥뜨린 적이 있었으나 검풍대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런 그들이 검귀에 관한 정보를 얻은 것은 사흘 전이었다.
하지만 거리가 꽤 되는 곳에 있었고, 검풍대와의 싸움으로 결원이 생긴 무사들을 보충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루 뒤에 출발해야 했다.
그러나 모두가 절정급 이상의 고수. 혼신을 다해 경공을 펼쳐 조금 전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허나 그들이 바로 나선 것은 아니었다. 도착했을 당시엔 우문석이 군중들을 설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경공으로 고갈된 내력을 조금이나마 회복할 틈이 생겼고, 가장 먼저 회복한 부대주 남궁일이 수레를 막아서게 된 것이었다.
우문석은 한눈에 보고 알았다. 저 일백여 무인들 중에 자신보다 모자란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을.
자신이 지부와 분타에서 동원한 무사 중 절정고수는 스무 명뿐이라 어려운 상황이었다.
사천의 무인들과 자기가 동원한 일천의 무사들이 있다지만, 상대측에 절정고수가 저리 많으면 이긴다 해도 피해가 막심할 터였다.
그래서야 무인들을 설득한 보람이 없다.
피해가 커지면 커질수록 련에서 자신에게 책임을 물을 가능성은 높아질 것이다.
검귀 때문에 악록산으로 무인들을 모은 것이 바로 자신이기 때문이다.
“나는 육대세가를 대표해 검귀를 추적 중인 남궁도라는 사람이오.”
남궁일의 형이자 척살대주이기도 한 남궁도가 우문석을 향해 포권하며 스스로를 소개했다.
우문석도 들어본 이름이었다.
방계에 대한 차별이 극심하기로 유명한 남궁세가에서도 강하기로 소문난 고수인데다, 녹림 토벌로 제법 명성을 쌓았던 자였기 때문이다.
“귀하의 명성은 익히 알고 있소. 헌데 무슨 일로 반천련의 행사를 막는 것이오?”
우문석은 반천련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말했다. 하지만 남궁도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당연히 검귀를 원합니다.”
“허허…….”
우문석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반천련의 이름을 들먹였음에도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이를 지켜보던 군중들이 항의하기 시작했다. 몇몇 성질이 급한 이들은 칼을 뽑아 들었다.
“육대세가가 대체 무슨 권리로!”
“도적놈들 같으니!”
일촉즉발의 상황. 하지만 남궁도는 여전히 얼굴 가득 자신감이 넘쳤다.
“우리가 권리가 없다 하시었소?”
그가 큰 소리로 다시 한 번 외쳤다.
“당신들 중 누가 있어, 육.대.세.가.보다 검귀에 대한 원한이 깊겠소!”
그의 말에 다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듯 조용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검귀에 의해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곳이 바로 육대세가였다.
그리고 이 같은 사실은 천하가 알고 있었다.
그들은 검귀에 눈이 멀어 진실을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남궁도의 일갈은 우매한 군중을 일깨웠다. 대의명분은 육대세가로 넘어가는 중이었다.
그것을 깨달은 우문석은 혁가를 바라보았지만, 혁가도 손을 쓸 수가 없는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남궁도가 그에게 말했다.
“검귀는 우리가 데려가겠소.”
우문석은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의 장밋빛 미래가 허물어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상황은 점점 복잡해졌다. 또 한 무리의 무사들이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자격이라 하였는가!”
자기 키보다 거대한 검을 들고 군중들 사이에 나타난 사내였다.
그의 뒤로는 열다섯 명의 고수들이 시립하고 있었는데, 그들 하나하나가 뿜어내는 기세는 육대세가 고수들에 못지않았다. 아니, 더 강해 보였다.
남궁도는 그를 보자마자 이를 갈았다. 훼방꾼이 다시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저놈이 또다시 방해하는군.”
“또 보는구만.”
사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왼손을 들어 인사하자, 남궁도가 울컥했는지 목소리를 높였다.
“왜 또 방해냐!”
“그쪽이 검귀를 취하는 걸 보자니 배알이 꼴려서.”
“…….”
너무도 솔직해 보이는 발언에 남궁도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우문석이 그 사내를 향해 물었다.
“당신들은 또 누구요?”
“정의회의 검풍대요.”
“정의회?!!”
우문석은 눈을 크게 뜨고 반문했다. 정말 몰라서 반문한 것이 아니라 너무 잘 알아서였다.
몇 달 전 반천련에서 내려온 공문에 적혀 있던 이름이었다. 분명 구대문파의 후예들로 이루어졌다던…….
“맙소사……. 당신들이 정말 정의회라면 자격은 충분할 것이오.”
정의회는 아직 널리 알려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호남의 무인들은 그들에 대해 어느 정도 들은 바가 있었는지 육대세가 때처럼 수긍하였다.
구대문파는 검귀의 동료라 알려진 구대호법신마, 황현에게 아주 큰 피해를 입었다.
정의회가 정말로 몰락한 구대문파의 후신이라면 그들에게도 권리는 충분했다.
우문석은 이제 더 놀랄 힘도 없었다. 아마 이젠 어느 누가 나타난다 해도 놀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러한 그의 생각은 일찌감치 폐기되었다.
검풍대와 육대세가의 대치 상황 중 엄청난 거물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바로 천하에서 가장 강력한 장법을 지닌 인물.
“버러지들이 끼리끼리 잘들 노는구나.”
육왕칠사의 장왕(掌王)염무였다.
그는 나타나자마자 절대고수 특유의 존재감을 활짝 개방했다.
이미 반박귀진에 달하여 존재감을 감출 수 있음에도 그는 그러지 않았다.
이는 검귀를 선점한 이들에게 압박감을 주기 위함이었고, 그것은 정확히 먹혔다.
“크윽…… 염 노사가 어찌…….”
남궁도가 경악하며 중얼거렸다. 그와 대치 중이던 육평도 마찬가지였다.
“여우만 잡으면 될 줄 알았더니, 호랑이라…….”
“누가 여우냐!”
남궁도는 그 와중에도 버럭 화를 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장왕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당연히 육대세가지.”
“죽고 싶냐!”
“싫다.”
“…….”
육평이 진지한 얼굴로 남궁도에게 물었다.
“잠시 손을 잡는다고 가정할 때 승산이 몇 할이지?”
“이 할도 안 된다.”
남궁도의 대답에 육평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역시…… 육왕칠사란 말인가.”
장왕이 나타나니 그 많던 군중들은 십 장 밖으로 물러났다. 그것은 우문석도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장왕이란 이름은 경외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주변에 남아 있는 것은 검귀를 태운 수레, 그리고 육대세가와 검풍대의 고수들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조차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염 노사께서 어찌 검귀를 노리는 것이오?”
“알 필요 없다.”
“검귀는 우리 육대세가의 것이오!”
순간 장왕의 신형이 남궁도의 코앞으로 다가왔다.
이는 눈 깜짝할 새에 벌어진 일로, 남궁도는 자기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다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수치스러운 일임에도 그는 멍한 얼굴로 장왕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장왕이 코웃음을 쳤다.
“단 일 보(一步)도 못 견디다니. 입만 살았구나.”
뒤늦게 자신의 처지를 깨달은 남궁도가 독기 어린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