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향 119화
반천련과 천상련 간의 전선에서 가장 치열한 전장은 바로 감숙과 귀주였다.
귀주의 경우 반천련의 기반이라 할 수 있는 사업들이 많았기에 이곳을 빼앗기느냐, 사수하느냐에 따라 두 세력이 가진 힘의 저울추가 달라졌다.
감숙의 경우 당장은 척박한 땅이나 잘만 이용한다면 새외 무역에서 오는 막대한 이익을 차지할 수 있었다.
무인과 무인 간의 다툼은 무(武)로 판가름 나지만, 세력과 세력의 싸움에서는 여러 요소가 필요하다.
그중 하나가 바로 금력. 즉, 돈이었다.
귀주는 현재의 금력, 감숙은 투자 수준에 따라 다르겠지만 미래의 금력을 상징하는 땅이었다.
그렇기에 두 세력은 이 두 곳의 전선에 전력의 삼 할 이상을 투입하고 있었다.
그리고 최근 들어선 반천련 측의 우세로 기울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열기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그것은 바로 천검단의 집단 이탈이었다.
귀주와 감숙에 파견된 모든 천검들이 한날한시에 모조리 탈영하고 만 것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천상련 측이 바보가 아닌 이상 이러한 기회를 날려 버릴 리 없었다.
그들은 계속 밀리기만 하던 전황을 한순간에 뒤집었고, 불과 열흘 만에 귀주의 칠 할, 감숙의 오 할을 차지할 수 있었다.
반천련에서 급히 부대를 파견하지 않았다면 아마 두 곳 모두 한 달도 안 되어 빼앗기고 말았으리라.
그 때문일까? 반천련의 총사인 제갈정오는 내부에서 무수한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사태의 원인이 된 천검단이 무림맹 출신의 정규 부대였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천검단이 탈영한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
그것마저 밝혀진다면 제갈정오는 총사 자리를 내놓아야 할지도 몰랐다.
그로서는 천검단의 검주 적운을 숙청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난 것이다. 아니, 이제는 검주뿐만 아니라 모든 천검들을 축출해야 했다.
안 그랬다간 자신의 치부가 드러날 것이고, 설사 드러나지 않는다 해도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다.
“천검단을 당장 무림공적으로 공표해야겠소.”
“그들의 명성이 있는데…… 부담이 될지도 모릅니다.”
진명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말했지만 제갈정오는 단호했다.
“어쩔 수 없소. 잘못했다간 이쪽에서 다 뒤집어쓸 판이외다.”
“을마지께서 너무 여유를 부리신 게 이유일지도 모릅니다.”
“살수가 신중한 건 어쩔 수 없는 일 아니오. 이왕 이리 된 거 잘됐소. 생각해 보면 천검단은 품 안의 가시였으니, 늦었지만 이런 식으로라도 쳐내는 게 옳은 일이오.”
진명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또한 천검단을 탐탁지 않게 여겨 왔기 때문이다.
분명 무림맹의 그늘 아래 있건만, 건방지게도 검주의 후계자는 오직 당대의 검주가 뽑는다.
검주뿐만이 아니라 모든 단원들의 인사권도 검주가 갖는다.
말이 반천련 산하의 조직이지, 사실상 독자적인 조직인 것이다.
회유라도 가능하면 두렵지 않겠으나 정의라는 단어에 미친 자들이라 그것마저 불가능했다.
감찰부의 무사들보다 더 지독하게 자기 관리를 하는 이들이 천검단이었으니 윗선에서는 늘 거북해했다.
그것이 곪고 곪아 오늘날에야 제대로 터진 것이다.
이날 제갈정오는 천검단을 무림공적으로 공표하였고, 반천련의 모든 간부가 동의하였다.
곧바로 탈영한 천검들에 대한 추적대가 편성되었다.
사실 많은 무인들이 패도맹주를 추격하는 일에 동원되고 있는 중이지만, 반천련에는 아직 무인이 많았다.
그중에는 천중팔성이라는 걸출한 자들도 있었다.
천중팔성은 천상련의 구대호법신마를 상대하기 위해 초빙되거나 키워진 고수들로, 소문에는 개개인의 무력이 구대호법신마에 필적한다고 한다.
현재 그들 중 두 명은 패도맹주 사냥에 파견되었고, 다섯은 천상련과의 전장에 나가 있었다.
그로 인해 남은 이는 단 하나뿐이었는데, 하필이면 천중팔성 중 가장 강한 사내로 천검단으로서는 최악의 상대였다.
총사는 두말할 것 없이 그를 추적대의 책임자로 임명했다.
이는 적운도 예상치 못한 것으로, 그들이 세운 계획에 문제가 생겼음을 뜻했다.
하지만 하늘은 정해진 굴레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 굴레는 반천련의 것도, 천검단의 것도 아니었다.
때문에 총사의 선택이 초운과 적운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는 아직 미지수였다.
* * *
천하제일의 살수.
이런 거창한 칭호를 원한 적은 없었다.
그에게 있어서 살수란 오랜 가업에 불과했고, 이왕 하는 거 억울한 죽음은 없게 하자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세간에선 그를 두고 실패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무적의 살수라 칭하지만 그것은 틀린 말이었다.
그는 그러한 칭호를 얻기까지 수많은 실패를 경험해 보았다. 그 실패들 덕분에 지금의 그가 있는 것이다.
북쪽 하늘을 바라보던 그는 손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조금만 기다리거라……. 할애비가 곧 가마…….”
그가 약속한 대로 아흐레가 되었다.
그날 당장에라도 그들을 죽일 수 있었지만 그리하지 않은 이유는 정당한 살행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아픈 손녀를 위하는 것도 중요했다. 그러나 그는 갈등했다.
죄 없는 자를 죽여야 하는 괴로움. 수십 년간 지켜온 원칙은 쉽게 무너지는 것이 아니었고, 그에겐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오늘, 확실해졌다.
그는 철저한 살수로서 일어설 것이다.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것은 무엇이든 죽음을 내릴 것이다.
오직 손녀를 위해서, 한 번도 안아 주지 못했던 죽은 딸을 위해서였다.
늘 자신의 원칙 속에서만 살아온 그는 단 한 번만이라도 남을 위해 살기로 했다.
죄인만을 죽이던 살수는 이제 죄인이 되려 한다.
* * *
“잘하는 짓일까……? 나 같으면 절대 안 속을 것 같은데…….”
벽호가 자꾸 뒤를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적운을 부축 중이던 성 장로가 그의 말을 받았다.
“세상 살다 보면 단순한 게 먹힐 때도 있는 법. 우리가 잘만 한다면 가능할 게야. 그렇다 해도 도박은 도박이지. 놈의 살수 본능에 모든 걸 맡기는 꼴이 될 테니…….”
벽호가 고개를 끄덕이다 방갓을 쓴 채로 말없이 서 있는 적운을 바라보았다.
“그 괴물이 속아주어야 할 텐데…….”
* * *
아흐레의 시간을 주었다고는 하나 을마지는 녹산사에 대한 감시를 멈추지 않고 있었다. 적운들도 그것을 알고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그는 악록산의 가장 높은 곳에 올라 녹산사를 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이 어디로 도망치던 상관없었다. 언제든 따라잡을 수 있다는 여유와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천하제일살수인 만큼 추종술에 관한 한 최고 수준에 달해서, 적운들이 아무리 빨리 도망쳐도 늘 따라잡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하루 전 검귀가 사찰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으나 의미 없는 일이라 여겼다.
양 떼 속에 늑대 한 마리 섞인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없다.
특히 여물지도 않은 늑대 따위는 굶주린 호랑이 앞에서 강아지나 다름없었다.
드디어 아흐레의 기약이 끝나고 녹산사로 향하던 그의 눈에 사찰의 뒷문으로 황급히 빠져나가는 세 인영이 보였다.
분명 그가 쫓던 적운 일행이었다.
을마지는 그들을 칭찬하고 싶었다.
“죄 없는 승인들을 구하기로 했구나.”
승인들을 죽일 필요가 없어지자 을마지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그래서인지 그는 전날 사찰 안으로 들어갔던 검귀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이상히 여기지 않았다.
마음이 가벼워지자 잠시 동안 냉철함을 잃은 것이다.
그는 언제나 그렇듯 여유 있는 발걸음으로 사냥감을 쫓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시진 뒤, 을마지는 그들을 다시 발견할 수 있었다.
추종술에 익숙한 도도문의 장로 덕에 오는 동안 가짜 흔적을 많이 보았다. 하지만 다른 때와 달리 대부분 알기 쉬운 것들이었다.
을마지는 이 또한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적운들을 오래 쫓았고 성 장로의 가짜 흔적들을 파훼하는 것에도 익숙해진 것이라 여겼다.
결국 한 시진 만에 그들의 앞을 가로막을 수 있었다.
“내가 죽여야 할 이는 오직 천검의 검주뿐이니 도도문의 장로와 천검의 부단주는 살려 주겠다.”
“고양이 쥐 생각하는구려.”
성 장로는 일천한 무공임에도 적운의 앞으로 나서며 을마지에 대항하려 했다.
사실 그가 이렇게 쫓길 필요는 없었다. 도도문은 백월성과 성천궁에 발을 걸친 사파였고, 천검단의 무림맹 측의 정파에 속했다.
그러니 스스로 목숨을 구하고자 한다면 못할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자리에 함께 있는 것은, 일행과 몇 달간 생사고락을 함께한 터라 속정이 많이 들었던 탓이다.
저 꽉 막힌 벽호도 처음엔 사파 떨거지라며 자신을 싫어하더니, 지금은 알게 모르게 챙겨주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그것은 성 장로도 마찬가지였다.
을마지의 얼굴이 차갑게 변했다.
“그렇다면 할 수 없겠지……. 방해가 되는 것은 치우는 수밖에.”
꿀꺽---
살기는 전혀 없다. 대신 정말 물건을 치우듯이 말한다. 바위나 돌 같은 무생물은 동정받지 못한다.
살왕의 눈빛은 바로 그러한 무생물을 보는 듯했다.
불과 아흐레 전만 하더라도 사람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철저한 살수의 눈빛이다.
살수는 철저해질수록 살기가 없어진다.
을마지의 몸에서는 살기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무형인 살기가 흔적이 있을 리 없다.
다만 그의 존재감이 옅어지고 있달까?
무공을 모르는 이가 보았다면 바로 옆을 지나가도 모를 만큼 평범해진 것이다.
눈을 속이고, 마음을 속이고, 육신을 속여 자신을 가린다는 무의경의 최고 경지였다.
적운들 또한 당황할 만큼 그의 존재감은 희미해져 갔다.
분명 눈앞에 있는데 볼 수가 없다. 아니, 눈이 사물을 외면한다. 자신의 눈이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벽호가 체념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큰일이군……. 죽겠어.”
그것은 성 장로도, 방갓으로 얼굴을 가린 적운도 마찬가지였다.
“젠장…….”
그렇게 그들은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았다. 좀 전의 기세등등함과는 정반대였다.
살수 앞에서 체념한다는 것은 배고픈 늑대에게 몸을 내맡기는 것과도 같았다.
을마지의 입장에선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냥 이대로 죽인다면 상황은 종료될 것이고, 자신은 손녀의 목숨을 구명할 약을 얻게 된다.
그래야 했다. 그렇게 흘러가야 했다.
그런데 수십 년간 쌓아 온 살수로서의 본능이 몸을 멈추게 만들었다.
그것은 뒤로 물러서던 적운의 발.걸.음.을 보고 난 이후부터였다.
그것을 시작으로 그의 머릿속이 맹렬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처음 쫓기 시작했을 때의 적운과 한 시진 전 녹산사를 빠져나올 때의 적운이 교차된다.
옅은 안개와 같던 그의 존재감이 다시 형태를 이루었다.
“네놈들…… 어째서 반항하지 않는 거지?”
그동안의 적운들과는 확연히 다른 반응 또한 의문점이었다.
그동안 적운들은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무인의 체통도 버린 채 변소에 숨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 그들이 이제 와 목숨을 포기한다?
뭔가 맞지 않았다. 식사를 하다 체한 것처럼 불편했다.
“방갓을 벗어 보아라, 천검주.”
“…….”
적운은 방갓을 벗지도, 그렇다고 대답하지도 않았다.
대신 성질 급한 벽호가 앞으로 나섰다.
“방갓 쓰고 죽나 안 쓰고 죽나 똑같은데 왜 이리 뜸을 들여? 우린 죽을 준비 됐다니까! 이 괴물아!”
“……뭔가 숨기고 있군.”
벽호의 격한 반응은 더욱더 의심을 불러왔다.
문득 검귀가 보이지 않는 것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