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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향-118화 (118/217)

검향 118화

자길 폐인으로 만든 자에게 무릎 꿇고 용서를 빈다?

자신이었다면 결코 할 수 없을 일을 어렵지 않게 해내는 서평을 보며 엽성은 반성했다.

그리고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서평이 초운의 심성에 의해 조금씩 바뀌었듯, 그 또한 서평의 밝은 심성에 감화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스승은 여전히 꺼려하는 듯했지만, 이제 엽성은 서평을 미워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존중했다.

노인 또한 그것을 알기에 서평을 내치지 않았다.

“칼을 찬 놈들이 많이 보이는구나.”

“검귀에 대한 소문 때문이겠지요.”

“어쩌다 화산의 문하가 검귀가 되었을꼬. 쯧쯧.”

제자의 일로 인해 악연이 쌓이긴 했으나 노인과 화산파는 각별한 사이였다.

정확히는 화산파의 제일고수이자 육왕칠사의 일인인 반선검왕 청명자와 각별했다.

엽성의 팔이 잘렸을 때도 화산을 원망할지언정 죄를 크게 묻지는 않았다.

어린 서평에게 휘둘려 화산의 어린 제자에게 장법을 날린 엽성의 잘못 또한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의 제자에 대한 사랑은 친자식을 향한 그것과도 같아서, 반선검왕이 그를 따로 찾아 위로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큰 사달이 났을 것이다.

이렇듯 과거에 정리가 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적오자를 만나 은원을 풀려 하는 이유는, 엽성의 자존감을 다시 세워 주기 위해서였다.

그의 마음속에 맺힌 증오라는 이름의 독을 없애기 위해선 적오자가 필요했다. 어떤 식으로든 결착을 봐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강호의 법도. 평생을 도산검림에 묻혀 살아온 노강호가 아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런 그를 향해 서평이 씁쓸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오해일 겁니다. 녀석은 그럴 놈이 못 됩니다.”

“사제라고 편을 드는 게냐?”

그가 빈정거리자 서평은 볼을 긁적였다.

“그것이 아니오라…… 설명하기 좀 힘들지만, 녀석을 보시면 알게 될 겁니다. 천생 도사로구나, 싶은 녀석이니까요.”

“도기라도 되는 듯이 말하는구나.”

“제가 볼 땐 그것보다 더합니다.”

“흐음…….”

저렇게까지 말하니 제아무리 노인이라 해도 호기심이 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가 아는 가장 큰 도기는 반선검왕, 바로 화산 제일고수인 청명자였다.

청명자. 그는 마치 도사가 되기 위해 태어난 자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라면 언젠가 검선(劍仙)이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였을까? 서평이 묘사하는 검귀라는 인물에 대해서 관심이 갔다.

화산의 문하에서 또다시 그와 같은 도사가 나타난 것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래, 두고 보자꾸나. 곧 보게 될 터이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많이 다치지는 않게 해주십시오, 장왕(掌王) 어르신.”

“그렇게 부르지 말라 하지 않았더냐. 명성을 얻자고 장법을 연구한 것이 아니거늘……. 간지럽다. 그리고 검귀의 문제라면 알고 있다. 어차피 적오자를 만나려면 검귀는 살려 둬야 할 테니…….”

그리 말하는 노인은 굉장히 자신만만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오백여 년을 내려온 금장류의 당대 전승자이며 금장류 역사상 최초로 절대경에 오른 이였다.

장왕(掌王)이라는 별호로 육왕칠사라는 영광된 자리의 한 축을 차지한 그의 이름은 염무라 했다.

이로써 악록산에는 육왕칠사가 둘이나 모이게 되었다.

바로 살법에 관한 한 천하제일인 자, 을마지.

천하제일의 장법을 지닌 자, 염무.

지금은 서로의 존재를 모르나, 두 사람의 운명은 악록산의 복잡한 상황과 맞물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태였다.

* * *

초운이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설마 당신들을 이런 곳에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재회는 갑작스러웠다. 천검단의 검주 적운과 부단주인 벽호, 그리고 도도문의 장로인 성수는 녹산사를 도와주러 왔다는 고수를 보러 왔다가 거기에 초운이 있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벽호가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낭인방의 그놈들은 어떻게 된 거지?”

“사정이 생겨 헤어졌습니다.”

“널 데려가서 현상금 챙기려던 거 아니었나?”

“그들이 실패했으니 제가 여기 있는 거겠죠.”

“그래? 그런데……!”

계속 이어질 것 같던 벽호의 질문 공세가 끊겼다. 적운이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그는 심각한 부상이라 현재 내공이 전폐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인지 몇 달 못 봤을 뿐인데도 얼굴이 반쪽이 된 듯했다.

“녹산사를 도와주러 온 건가?”

“네.”

“강한 건 알지만 이번 상대는 현천마녀와는 비교도 안 되는 거물이다. 우리를 도우려 하다간 살해당할 거야…….”

그리 오래 안 건 아니지만 초운이 보았던 적운은 마음이 강한 자였다.

아무리 강대한 적 앞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관철시키기 위해 노력할 그런 무인이었다.

헌데 그런 그가 지금 두려움 가득한 얼굴로 누군가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게 누굽니까?”

적운이 아랫입술을 깨물며 망설이는가 싶더니, 곧 답했다.

“을마지……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살수…….”

초운 또한 강호 밥을 먹은 지 오래라 육왕칠사의 이름이 얼마나 거대한지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육왕칠사의 최강자라는 천왕 송산. 그 송산조차 꺼린다는 이가 바로 반선검왕이라 불리던 그의 태사조 청명자였다.

검을 알게 되면 될수록 그는 청명자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육왕칠사를 두고 흔히들 절대고수라 하지만, 실은 그 이상의 경지를 특정 지을 만한 명칭이 없어서 절대고수라 부르는 것이다.

때문에 그 청명자와 함께 육왕칠사에 이름을 올릴 정도의 고수라면 그 격이 다를 것이 분명했다.

적운을 제외한 벽호와 성 장로는 ‘네가 그 이름을 듣고도 돕는다는 소리를 하나 보자.’하는 뜻이 가득 담긴 얼굴로 초운을 바라보았다.

“그래서요?”

“목숨이 아깝지 않느냐?”

“아깝습니다.”

“그렇다면 왜……?”

초운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내버려 둘 수 없으니까요.”

“…….”

“몰랐다면 모를까, 알아버렸습니다. 이 녹산사의 스님들과 당신들의 목숨이 달려 있는데 제가 모른 척해야 합니까? 죽든 말든 그냥 제 갈 길 갔어야 하나요?”

적운들은 답하지 못했다. 천검단은 늘 정의를 부르짖는다. 하지만 가장 기본적인 것을 잊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협의(俠義)였다. 아니, 너무 당연한 거라 오히려 멀어졌다.

협의는 분별력이 없다.

인내심도 없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남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는 것, 세상의 부조리에 대항하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움직이는 것은 언제나 늦다.

그러나 가슴으로 움직이는 것은 빠르다.

천검단은 그동안 늘 머리로 움직였다.

뜨겁게 타오르는 가슴은 내리눌렀다.

정의는 냉정해야 한다고 단정 지었다.

모든 사람을 구할 수 없다면 하나라도 확실히 하자는 주의였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정의일까?

아집은 아닐까?

가식은 아닐까?

그런 의문이 들었던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항상 정의를 부르짖으면서도 늘 뭔가 부족했다.

적운은 오늘 그것을 깨달았다. 정의는 머리가 아닌 가슴에서 나온다는 것을.

그리고 확신하였다. 초운은 결코 무림공적 따위가 아니었다. 그는 남을 위해 자기 자신을 버릴 수 있는 이였다. 그런 이는 결코 마인과 결탁하지 않는다.

그가 초운을 향해 말했다.

“그래, 알았다. 그리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러자 곁에 있던 벽호는 무척 놀랐다. 자존심 강한 그가 한낱 죄인에 불과한 무림공적에게 감사를 표했기 때문이다.

하늘이 무너져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던 일이 생겨 버렸으니 벽호가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검주! 어찌 저런 공적에게 머리를 숙이는 겁니까!”

“그는…… 협의를 알고 있다. 협의를 아는 자가 무림공적일 리 없겠지.”

“……그런 겁니까?”

벽호는 의외로 쉽게 수긍했다. 그러나 초운을 향해 던지는 말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이봐, 아직 널 완전히 믿는 게 아니야. 그저 검주의 눈을 믿으니까…… 흠흠. 하여튼 검주의 믿음을 저버리고 허튼짓을 한다면 내 직접 뼈를 발라 줄 테니 명심하라고. 허험.”

초운은 그러한 벽호를 보고 밝게 웃었다.

“네, 그리하십시오.”

“정말 마음에 안 드는 자식이군.”

벽호는 짧게 투덜대더니 등을 돌려 어딘가로 가 버렸다. 그러자 그런 그를 성 장로가 불렀다.

“이놈아, 어딜 가느냐.”

“밥 먹으러 가오!”

“그놈 참…….”

사라지는 벽호의 등을 바라보던 초운은 눈을 돌리지 않은 채로 적운에게 말했다.

“정말 알기 쉬운 성격이군요.”

적운이 씁쓸한 미소와 함께 화제를 돌렸다.

“사흘…… 아니, 나흘만 더 견디면 될 텐데…… 살왕이 기다려 줄지 모르겠군.”

적운의 이야기에 초운이 의문을 표했다.

“나흘이라……. 이유라도 있습니까?”

“천검단이 모두 모이기 때문이지.”

“아…….”

이미 천검단의 무서움은 겪어 본 바가 있었다. 그들 또한 자신을 쫓던 이들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가장 최근에는 자신과 현천마녀를 상대로 압룡진을 펼치기도 하였다.

그런 이들이 모두 와 준다고 하니 초운은 안심이 되었으나 한편으로는 긴장되기도 하였다.

그의 표정을 읽었는지 적운이 안심하라는 얼굴로 말했다.

“괜찮다. 이미 우리는 반천련과 연을 끊기로 했으니, 더 이상 너를 공적 취급하진 않을 것이다.”

“연을 끊다니요?”

“지금 우리의 목을 노리는 것은 분명 살왕 을마지, 그자이나 그에게 의뢰를 넣은 이는 바로 반천련 안의 무림맹이다. 이미 세작을 통해 확인도 했고…….”

천검단은 전 중원에 걸쳐 정보원을 두고 있다.

아니, 그 정보원조차 천검단원이었다.

현재 대외적으로 무력을 행사하는 단원들은 극히 일부일 뿐, 세부적으로 파고들면 하나의 무림 방파처럼 있을 건 다 있었다.

재정을 관리하는 이들, 정보를 모으고 분류하는 단원들, 암살을 전문으로 하는 단원들 등.

반천련에 있는 세작 또한 어릴 때부터 천검으로 교육을 받은 정보원이었으며, 지금은 무림맹의 고위 간부이기도 했다.

악인들은 음흉하여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 그것을 감시하는 것은 천검단의 의무였고, 그러한 의무감은 사파에 국한되지 않았다.

“놀랍군요.”

설명을 듣던 초운이 놀라며 입을 열었다.

이 정도면 반천련의 하부 조직이라 보기 힘들었다. 철저히 독립된 조직이며 방파였던 것이다.

“하지만 당장 을마지는 어찌할 텐가.”

성 장로가 고개를 저으며 그의 이름을 다시 꺼냈다.

지금 가장 큰 문제는 바로 그의 존재였다. 일단 그에게서 살아남아야 천검단의 덕을 봐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건 저에게 방도가 있습니다.”

초운이 손을 번쩍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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