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향 117화
문득 그의 상념을 깨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는 바로 녹산사의 승인인 각인이었다.
“아, 아닙니다.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각인을 보고 있자니 나쁜 기분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문득 어려워하는 타인을 도와 선행을 실천하였는데 자신의 마음이 충만해지는 것은 왜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남을 위해 덕을 쌓는다는 것은 어쩌면 자신을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한편 각인은 쿵쾅거리는 가슴을 자제할 수 없었다. 죽을 뻔해서가 아니라 희망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 증거로 초운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술기운에 침침한 것이 아니라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그는 급히 초운을 앞서 달려 나오더니, 그 앞을 가로막으며 무릎과 이마를 땅에 대었다.
“은공!”
“아니, 왜 그러시는 겁니까. 스님!”
자신을 향해 오체투지하는 각인의 행동에 깜짝 놀란 초운이 그의 어깨를 잡아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자 각인이 말했다.
“제발 저를…… 아니, 저의 스승님과 사제들을 살려 주십시오.”
그가 아는 무인은 많지 않다. 무인과 교류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초운이 무림공적인 것도 알 수 없었다.
아니, 설사 무림공적임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무림과는 거리가 먼 그로서는 공적으로 지정되는 일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이해 못할 것이다.
주루에서 그 무서운 자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검귀’라는 이름. 그리고 이후 보여 주었던 무서운 솜씨.
분명 도움이 될 것이라 여겼다.
“제발…….”
초운은 이미 왕 씨 주루의 주인에게 그의 사정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가 각인을 향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돕지 않으려 했다면 모를까, 이왕 도운 것 끝까지 가야겠지요?”
“네?”
막 자신이 처한 상황을 설명하려던 각인은 상대가 너무도 흔쾌히 허락하자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九章
“복이 굴러 들어왔군.”
전서구에 실려 온 급보를 읽던 사내가 중얼거렸다.
소식은 익양 분타에서 온 것이었다.
반천련 호남 지부장 우문석(宇汶析)은 기회를 잡았다 여겼다. 총단으로 진출할 바로 그 기회 말이다.
얼마 전 그가 운영하는 호남 지부에 젊은 중놈이 하나 찾아왔다.
녹산사가 무뢰배에게 위협당하고 있으니 도와 달라는 얘기였는데, 그게 뭐 어렵겠나 싶어 일단 만나나 보자고 생각했다.
하지만 총단의 정보 조직인 천이각의 요원이 나타나면서 얘기가 달라졌다.
천이각의 요원은 그 중놈에게 어떠한 도움도 주지 말고 문전박대하라고 요구했다.
심지어 무인을 보내 죽이기를 원했다. 요원이 준 명분은 다른 곳에 도움을 요청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천이각의 힘은 막강하다.
천이각의 요원이 악심을 품으면 보고서 한 장으로 호남 지부장의 자리를 갈아치울 수도 있었다.
물론 털어서 먼지 하나 안 나오는 자라면 불가능할 테지만, 아쉽게도 우문석에겐 나올 먼지가 아주 많았다.
그래서 악록산과 가장 가까운 익양 분타에 파발을 띄웠다. 어린 중놈이 보이면 즉참하라고.
하지만 일이 틀어지고 말았다. 그 중놈 곁에 적(赤)급경계 대상인 검귀가 있었던 것이다.
위기라면 위기였다. 그의 관할에서 검귀가 발견되었고, 그것에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 징계감이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그는 이것을 평생 한 번 만나기 힘든 기회라 여겼다.
호남 지부장이라는 직함도 나쁘지는 않았다.
적어도 이 호남 지부에서만큼은 제왕적인 권세를 휘두르고 있었으니까.
허나 그런 권세도 총단의 간부에게는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천이각의 말단 요원의 한마디에 좌우되는 상황이 그것을 증명한다.
중앙이다.
중앙에 진출해야지만 권력을 잡을 수 있다.
다행히 패도맹주다 뭐다 해서 련의 모든 시선은 그쪽으로 향해 있었다.
이는 경쟁자가 많지 않음을 뜻했다.
경계지수 적(赤)급의 공적을 죽인다면 그것은 출셋길과도 연결된다.
물론 적제(赤帝)를 잡는 것이 더 좋겠지만, 그 목을 원하는 자가 너무 많으니 진즉에 포기했다.
이곳에서 악록산까지는 말을 타도 이틀 거리. 그러나 절정 이상의 무인이라면 하루 만에 주파도 가능하다.
상주 인원이 스무 명 조금 넘는 분타에 비해 호남 지부는 사백 명이나 된다.
인원이 많은 만큼 고수가 섞여 있는 비율도 높았다.
우문석은 무인들을 불러 모아 그중 절정고수를 열 명이나 추려 내었다.
당연히 악록산과 하루 이내의 거리에 있는 분타들과 반천련 휘하의 방파들에도 전서구를 띄웠다.
제때 도착한다면 우문석이 악록산에 도달할 때쯤이면 꽤 많은 무인을 모을 수 있으리라.
하지만 아쉽게도 우문석처럼 생각하는 이는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본래부터 검귀를 쫓던, 보이지 않는 눈들 또한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중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검풍대였다.
검풍대주 육평이 전서구를 통해 받은 쪽지를 비비며 말하자 쪽지는 곧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짐작하고 있었던 곳에서 연락이 오는군.”
“역시 악록산이었습니까?”
“육로라면 그곳이 두 번째로 안정적이니까. 짐작에서 벗어나지 않다니…… 꽤나 순진한 녀석이야.”
그러자 무당 출신의 도사가 입을 열었다.
“그리 순진한 자였다면 삼 년이 넘게 도망 다닐 순 없었을 겁니다.”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다들 침묵하였다.
내용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말을 했다는 것 자체에 놀라워한 것이다.
“일 년 만에 듣는 목소리다!”
“말할 수 있는 거였어?”
워낙에 말이 없는 이였다.
가장 많이 대화를 나눠 본 자가 그나마 대주인 육평이었는데, 그마저도 단답형의 대화가 전부였다.
검풍대에 늦게 합류한 자들 중에는 그가 실어증에 걸렸다고 오해하는 경우도 있었다.
“오랜만에 입을 열었군. 검귀에게 관심 있었나? 의천(義天).”
무당의 도사 의천은 살아남은 무당 도사 중 가장 마지막 항렬인 의(義)자배 제자다.
다른 도문과 비교하자면 항렬상 삼대제자에 해당했지만, 일대제자들의 대부분이 명을 달리했기에 현재는 이대제자였다.
육평의 물음에 그가 검집을 바로잡으며 눈을 빛냈다.
“관심이라…… 아주 큰 관심이 있지요.”
그는 무심한 눈으로 동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육평은 무슨 사연이 있겠거니 생각하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이외에도 육대세가의 무인들, 그리고 천상련의 마인들 등 수많은 무인들이 악록산을 향해 모여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 악록산으로 향하는 이들 중에는 앞서 말한 무인 모두를 합한 것보다 더 무서운 자가 있었다.
* * *
“악록산은 오랜만이로구나.”
무뚝뚝한 얼굴의 노인은 감회가 새로운 듯 주변의 풍광을 돌아보고 있었다.
“이곳에 오신 적이 있습니까?”
그의 제자가 의외라는 얼굴로 물었다. 그의 스승인 저 노인은 외출을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적어도 제자인 그를 거두고 난 후에는 사는 곳을 벗어나는 일이 별로 없었다.
“그래, 젊었을 적 와본 일이 있지.”
그의 깊은 눈빛은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는 듯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눈빛을 바로했다.
추억을 더듬는 일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여긴 것이다.
그는 검귀가 현천마녀와의 생사결을 통해 세간에 다시 이름을 알렸을 때부터 다시 강호에 나왔다. 외팔이가 되어버린 제자를 위해서였다.
허나 검귀를 쫓는 자들과는 그 목적이 달랐다.
검귀를 노리는 것이 아니라 그의 스승인 적오자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자의 팔을 자른 인물이 바로 검귀의 스승인 적오자였고, 그는 그 은원을 풀고자 검귀를 잡으려 한 것이다.
특정 문파에 소속된 것도 아닌, 제자와 단둘만 움직이는 야인의 신분이라 그동안은 늘 한발 늦었었다.
정보력의 부재로 인해 벌어진 일이었다.
검귀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된 자들은 각자 운용하는 정보 조직이 있다. 그러나 노인에겐 하오문뿐이었다.
당연히 들어오는 정보는 시간이 지난 것이 대부분이었다.
검귀가 ‘나타났다.’가 아니라 ‘나타났었다.’인 것이다.
돈이 좀 더 많았다면 알짜배기 정보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노인에게도, 제자에게도 돈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꽤 괜찮은 후원자가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그들 두 사제와는 악연으로 엮인…….
“젊은 시절이라면, 이 차 마인 사냥 때로군요.”
뒤에서 말을 타고 따라오던 한 청년이 아는 척을 해왔다.
바로 그 괜찮은 후원자였다.
무뚝뚝한 노인의 얼굴이 일순 찌푸려졌다.
기분이 나빠서라기보다 불편하다는 느낌이랄까?
그도 그럴 것이, 청년의 무공을 전폐하고 한쪽 다리를 절게 만든 것이 바로 노인이었다.
그가 퉁명스럽게 답했다.
“잘 아는구나.”
“배웠습니다. 어릴 때 크게 다쳐서 한동안 집 안에만 있었거든요.”
“…….”
어릴 때 크게 다쳤다는 말에 노인은 고집스레 입을 다물었다. 마치 자신을 빗대어 말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청년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로 그에게 말했다.
“걱정 마세요. 원망하지 않습니다.”
“흥! 원망을 하면 금수만도 못한 놈이지.”
“네, 그래서 원망하지 않습니다. 어렸지만 제가 자초했던 일……. 그래서 엽성 형님께 큰절로 사죄하지 않았습니까.”
그가 노인의 제자를 슬쩍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청년에게 엽성이라 불린 제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그는 몇 달 전만 해도 황폐한 인생을 살고 있었다.
몇 년 동안 술에 절어 살았고, 얼마나 폐인처럼 살았는지 술독에 찌들어 내공이 줄어들 정도였다.
그나마 검귀의 발견 소식에 희망을 얻어 몸을 다시 관리하여 술독을 모두 배출해 낼 수 있었지만, 다년간 쌓아 온 증오와 원망은 쉽게 사그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증오 속에 살던 그가 지금과 같은 미소를 짓게 된 것은 바로 저 말 위의 청년, 서평을 다시 만나고 난 뒤부터였다.
그의 사정은 엽성보다 나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아니, 돈이 많다는 것 하나는 나았다.
하지만 무공은 전폐되었고 다리 한쪽은 절었다.
건강을 잃은 것이다.
엽성이 팔을 잃고 돌아오자 사부는 진노하여 서평부터 찾았고, 아직 어린 그의 몸을 불구로 만들었다.
다리만 저는 것도 아니었다.
그때의 내상으로 인해 한나절만 걸어도 닷새를 앓아누워야 하는 허약 체질로 변해 버렸다.
얼마 전 기련산에 올랐을 땐 한 달을 넘게 앓아누웠다고 한다.
그에 비해 엽성은 팔만 잘렸다 뿐이지 단련된 몸뚱이와 고절한 내공은 그대로였다. 만약 술독에 빠져 살지 않았다면 더 강해졌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서평은 밝았다.
엽성이 팔 하나 잃었다고 방황할 때, 그보다 어렸던 서평은 모든 걸 받아들였다.
물론 방황하던 시기도 있었지만 상인으로서 빛나는 재능은 그러한 방황 속에서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방황 또한 초운과 함께했던 짧은 여행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