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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향-115화 (115/217)

검향 115화

그는 지금 육로를 통해 사문인 화산파가 있는 섬서로 향하는 중이었다.

원래는 수로를 이용하였으나, 육대세가의 무인들에게 이동 경로가 발각되어 버렸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천성이 선량한 그는 힘없는 양민들이 자신으로 인해 피해를 보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최대한 사람을 만나지 않기 위해 식량을 사 들고 움직여야 했다.

낮보다 밤에 더 많이 움직이고, 수상하다 싶은 곳은 멀리 빙 돌아가거나 산맥을 거쳐 가다 보니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닷새, 혹은 이레면 도달할 거리를 열흘 만에 당도한 그는 모처럼 마을에 들르기로 하였다.

들고 다니던 식량이 전부 떨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아이고, 장사에 방해되니 제발 좀 나가시오, 스님.”

곡물 가루와 육포를 구하기 위해 마을을 돌아다니던 그의 귀에 누군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보니 작은 주루에서 주인으로 보이는 이가 답답한 얼굴로 한 사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승복을 입고 있었으며 머리를 며칠간 밀지 않았는지 머리카락과 수염이 듬성듬성 자라 있었다.

행색을 보아선 승인이 분명할진대 대낮부터 술에 취해 식탁에 얼굴을 처박고 있는 모습이 이상했다.

마을이 작아서인지 곡물상을 찾을 수 없기도 하고, 술 취한 승인에게 호기심이 일기도 하여 청년은 주루로 발걸음을 옮겼다.

손님이 들어섰음에도 주인은 알아채지 못했는지 승인의 팔을 부여잡고 여전히 사정을 하는 중이었다.

“각인 스님, 스님이 이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이럴 시간에 차라리 다른 곳에 가서 도와 달라고 해 보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벌써 나흘째 여기서 술만 퍼 드시니 손님들도 다 떨어져 나갔습니다요.”

주루의 주인인 왕 씨는 술에 취해 퍼져 있는 승인과 잘 아는 사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마을은 녹산사의 지척에 있었고 마을 주민 대부분이 불교를 믿다 보니 녹산사 승인들과의 교류도 상당한 편이었다. 아니, 사실상 녹산사를 먹여 살리는 이들은 이 마을 주민들이나 다름없었다.

각인은 녹산사의 주지인 법무의 대제자로, 평소 마을로 자주 내려와 까막눈이 대부분인 마을 사람들을 위해 편지를 대신 써 주거나 읽어주고, 제사가 있을 땐 축문도 써 줄 정도로 가까웠다.

주루의 현판에 새겨진 왕 씨 주루라는 글자도 각인이 직접 새겨 준 것이었다.

그러니 주인인 왕 씨와 친한 것도 당연했다.

이렇듯 존경을 받아도 모자랄 승인이 대낮부터 술독에 빠져 있다니,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주루의 새 손님, 초운은 각인의 몰골에 눈살을 찌푸리기보다는 왠지 측은지심이 일었다.

그 역시 한때 도사였고, 아니 지금도 도사임을 잊지 않고 있다.

같은 수행자로서 그는 각인에게 동정심을 느낀 것이다.

“저 사람은 왜 저러는 겁니까?”

그가 왕 씨에게 다가가 묻자 왕 씨가 깜짝 놀라 허둥지둥 대답했다.

“어이쿠, 손님! 제가 늙었는지 귀가 멍해 오시는 발걸음을 못 들었습니다요. 뭘 드릴깝쇼.”

주루의 규모가 크고 손님이 많았다면 점소이라도 들이겠건만, 마을 규모만큼 주루 역시 작아 왕 씨 혼자 주방의 숙수까지 맡아서 하는 중이다.

그가 각인에게 정신이 팔려 초운을 보지 못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그래도 왕 씨는 미안함이 가득한 얼굴로 초운에게 굽실거렸다.

“괜찮습니다. 저도 방금 왔습니다.”

“아…… 그러시다면야.”

방금 왔다는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왕 씨가 다시 말했다.

“그런데 좀 전에 뭔가 물어보지 않으셨습니까?”

“……저 스님은 무엇이 괴롭기에 저렇게 술만 마셔대는 거지요?”

왕 씨는 혹시나 초운이 불쾌하여 물은 건 아닌지 그의 얼굴을 살폈으나 다행히도 그런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사정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것이…… 저분은 녹산사라는 절에서 온 스님이신데, 지금 절이 큰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합니다. 어떤 무도한 놈이…… 녹산사에서 살겁을 일으킬 거라고 예고를 했다 하더군요. 그것 때문에 저 스님께서 반천련의 지부에 도움을 요청하러 갔건만…… 문전박대만 당하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저리 술만 퍼마시는 건…… 자포자기지요.”

“그랬군요…….”

사정을 알게 되니 측은한 마음이 더욱 커지는 초운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도와줄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도와주려다 오히려 더 화를 끼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된 것이다.

“뭘 드시겠습니까?”

“아, 일단 차나 한 잔 주시고…… 혹시 쌀가루와 육포를 좀 얻을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죠. 얼마만큼 준비해 드리면 될까요.”

“한 열흘 정도 먹을 양이면 충분할 듯합니다.”

“네, 준비해 드립죠. 열흘 분량이면…… 가만 있자…… 반 냥 정도입니다.”

초운은 왕 씨에게 한 냥을 주며 말했다.

“반 냥은 쌀가루와 육포를 준비해 주시고, 나머지 반 냥은 저 스님의 술값으로 해주세요.”

왕 씨는 감격한 듯 눈을 빛내며 말했다.

“아…… 정말 좋은 손님이시군요. 알겠습니다. 그리하겠습니다.”

* * *

반천련 호남 지부, 익양(益陽) 분타의 분타주 척기율(斥期栗)이 쇳소리처럼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중놈은 어디 있는가?”

“주루에서 술만 퍼마시고 있습니다.”

“땡중이었군.”

척기율이 피식 웃고는 허리춤에 걸려 있는 술병을 잡고 벌컥벌컥 마셨다.

특이하게도 그의 목울대는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아마도 그의 쇳소리의 원인인 목의 흉터와 연관되어 있으리라.

술병을 다 비운 그가 낭아도의 손잡이를 잡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젊은 놈이긴 하나 부처 모시는 중이라 죽이기 꺼렸었는데, 술 좋아하는 땡중이라면 얘기가 다르지.”

그가 일어서 걸음을 옮기자 그의 주변에 서 있던 익양 분타의 무인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이 향한 곳은 악록산 자락의 작은 마을, 그리고 그 마을에서도 단 하나뿐인 왕 씨 주루였다.

* * *

각인은 마시고 또 마셨다.

없는 돈에 겨우 말을 빌려 반천련 호남 지부에 찾아가 보았지만 문전박대당했다.

스승의 이름도 대 보고 처한 상황도 잘 설명해 보았지만 어느 누구도 신경 써 주지 않았다.

그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사제들과 스승님의 목숨은 어찌 구명한단 말인가…….’

그래서 마셨다. 돈도 없으면서 쉴 새 없이 마셨다.

기절할 때까지 마시고, 다시 마시기를 반복하다 보니 나흘이 훌쩍 지났다.

반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온 것은 정오 무렵이었다.

겨우 취기에서 벗어나 정신을 차려 가던 그에게 한 사내가 말을 걸어왔다.

목에 쇳조각이라도 집어넣은 건지 지극히 불쾌한 목소리였다.

“어이, 땡중. 술은 맛있던가?”

그리 묻는 사내의 딱딱한 도갑이 각인의 볼에 닿았다.

각인은 순간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애써 눈을 떠 바라보니 누군가의 목에 난 흉측한 흉터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누구…… 십니까……?”

흉터의 사나이 척기율이 씨익 웃으며 답했다.

“나? 저승사자.”

“네?”

의문을 채 표하기도 전에 복부에 발길질이 들어왔다.

퍽---!

“우웨엑!”

아침까지 들이부은 술과 안주들이 입을 통해 사정없이 튀어나왔다.

“어허. 많이도 푸셨구만, 땡중. 그래, 하나 묻자. ‘그 일’을 어디에다 또 고했느냐?”

“콜록콜록, 켁…… 무슨 일…… 말이오.”

척기율은 실실 웃으며 답했다.

“네가 네 스승과 사제들을 구명해 달라 요청했다 하던데.”

“그, 그럼 반천련에서 오신 분입니까?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각인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의 얼굴엔 희망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희망은 곧 고통으로 바뀌었다.

퍼억!

“우웨에엑!!”

이미 앞서 한 번 토했던지라 더 이상 나올 것이 없었는지 위액이 흘러나왔다.

고통에 몸부림치며 바닥을 구르던 각인이 척기율을 향해 물었다.

“어째서…… 어째서 이러는 것입니까…….”

“두 번 안 묻는다. 호남 지부 말고 다른 곳에 도움을 요청한 곳이 있느냐?”

척기율이 웃고는 있었지만 그 기세는 흉흉하기 이를 데 없었다. 대답하지 않으면 들고 있는 칼로 당장에라도 베어버릴 것 같은 분위기였다.

“없…… 습니다…….”

“그래……?”

척기율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그러나 그의 살기 역시 더욱 진해졌다.

그가 칼을 빼 들었다.

스르릉----

“……그렇다면 이만 죽어 줘야겠다.”

“허억!!”

척기율은 가차 없이 칼을 휘둘렀다.

각인의 목은 곧 떨어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의 목은 안전했다.

척기율의 칼이 허공에 멈추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한 청년의 손가락에 잡힌 채로…….

척기율의 시선이 자신의 칼을 잡고 있는 손가락을 따라 손목에서 팔과 어깨를 타고 얼굴에 닿았다.

방갓을 쓴 사내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턱의 고운 선만을 보았을 땐 아직 젊은 청년이라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척기율의 뒤편에 서 있던 부하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칼을 뽑았다.

하지만 그런 그들을 척기율은 손을 들어 올려 저지했다.

그가 방갓 청년에게 시선을 떼지 않으며 물었다.

“누구냐.”

“……주루의 손님…… 이지요.”

“손님이면 밥이든 술이든 대충 처먹고 꺼져라.”

“아쉽게도 당신들 덕분에 주인장은 진작 도망갔습니다.”

왕 씨 주루의 왕 씨는 척기율과 그 부하들이 들어올 때 이미 도망갔다. 덕분에 방갓의 청년, 초운은 차 한 잔 제대로 못 마시고 있었다.

“그럼 남의 일에 신경 쓰지 말고 그냥 가지? 죽고 싶지 않으면.”

“그것 또한 안 될 것 같습니다.”

“어째서?”

“보지 못했다면 모를까 이미 보았고, 관여하지 않았으면 모를까 이미 관여해 버렸습니다.”

척기율의 미간에 핏줄이 돋았다.

평소의 그였다면 눈앞의 청년을 진즉에 베었을 것이다. 하지만 무인으로서의 육감이 그것을 가로막았다.

자신의 칼을 막아냈다고는 하나 그것 때문은 아니었다. 떠오를 듯 떠오르지 않는 낯익음 때문이랄까?

방갓으로 가려져 얼굴은 보이지 않으나, 기세만큼은 겪어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어디서 본 걸까……. 알아보는 방법은 하나뿐이로군.’

척기율의 칼[刀]이 빛을 뿜었다.

사파의 유명한 도법인 혈성도(血星刀).

오직 사람을 죽이기 위해 만든 살기 짙은 무공이었다.

정사가 연합하여 만든 반천련, 그중에서도 사파 계열인 그는 이십삼 년 전 사부의 심장에 칼을 꽂고 전승 과정을 끝마쳤다.

대성하면 칼에서 붉은 유성이 떠오른다는 혈성도.

척기율의 칼에선 유성 대신 검기만이 피어올랐다.

그러나 그 정도로도 척기율은 각박한 강호에서 홀로 이십여 년을 살아남았다.

하지만 초운은 그런 그의 칼을 가볍게 피했다.

검기 또한 그의 몸에 닿기가 무섭게 허공에서 흩어져 버렸다.

허나 척기율의 본래 목적은 그의 목숨을 취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파팟!

초운의 방갓이 두 조각으로 갈라지며 땅에 떨어지고 있었다.

“이런…….”

초운은 살짝 당황한 얼굴로 땅에 떨어진 방갓과 척기율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렇게 드러난 준수한 청년의 얼굴, 초운을 바라보던 척기율의 눈빛이 순간 멍해졌다. 그리고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들…….

그의 심장은 터질 것처럼 쿵쾅거리고 있었다.

문득 목의 흉터가 쑤셔 오는 것 같았다.

부하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 누군가 그에게 물었다.

“아는 자입니까?”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척기율의 시선은 초운에게 완전히 고정되어 있었다.

부하가 다시 물었다.

“누구입니까?”

척기율이 떨리는 음성으로 답했다.

“검귀(劍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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