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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향-114화 (114/217)

검향 114화

주변의 처참한 상황을 살피던 육평은 자기도 모르게 혀를 찼다.

이에 남궁도가 발끈하며 소리쳤다. 자신을 향해 혀를 찬다고 착각했기 때문이었다.

“누구인지는 모르나 오늘의 빚은 반드시 갚고야 말겠다!”

“……원래 꼬랑지 말고 도망가는 개새끼가 짖기는 잘 짖는 법이지.”

“뭣이?”

다시 한 번 발끈한 남궁도였으나 딱히 부정은 못했다.

일백 명이 겨우 열다섯 명을 당하지 못했으니 오히려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검귀는 난전 중에 도망가 버렸고 중상을 입은 자는 서른이 넘었다.

고심해서 뽑아 훈련시킨 무인들을 삼분의 일이나 잃었으니 이젠 검귀를 만난다 하더라도 승산은 육 할이 채 되지 않으리라.

반면 검풍대는 한 명도 다치지 않았다. 다만 과도한 내공 소모로 인해 모두가 진이 빠져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지쳐 있음을 내색하지 않았다.

여기서 더 싸운다면 누가 이기든 피해가 클 것이고, 그리되면 검귀는 결코 잡을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궁도는 잠시 물러나기로 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계산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후속 인원 충원까지 닷새라……. 검귀를 따라잡을 수 있을는지 모르겠군.’

무공이 조금 떨어지는 후발대와 합류하는 것이 닷새 뒤.

그때 부상자들을 돌려보내고 후발대 인원으로 결원을 보충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당연히 검귀를 잡을 가능성은 낮아질 것이다.

남궁도는 저 앞의 육평과 그 수하들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다 잡은 고기를 놓친 건 바로 저들 때문이다.

저들의 방해만 없었어도 지금쯤 검귀의 목을 들고 세가로 돌아가고 있었으리라.

“계속할 테냐? 우리는 상관없다만, 득 보는 자는 검귀뿐이다.”

육평이 차갑게 웃으면 말했다.

남궁도는 당장에라도 그에게 달려들어 참살하고 싶었으나 곧 차가운 이성이 그를 말렸다.

그의 무공이 자신의 아래가 아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물러나지. 하지만 다음에도 방해한다면 그땐 검귀고 뭐고 끝장을 보고 말겠다.”

“그러지.”

그렇게 육대세가의 척살대는 떠났다.

검풍대는 그들이 떠나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겨우 쉴 수 있었다.

“대주, 검귀는 멀리 가 버렸겠지요?”

근처의 폐장원에서 체력을 회복하던 중 공동파 출신의 젊은 무인 하나가 육평에게 물었다.

“그래도 상관없다. 이미 그를 감시하는 눈은 무척 많으니까.”

“감시요?”

“그렇다. 패도맹주 적제의 출도로 인해 검귀의 일이 묻혔다고는 하나 그의 이름값도 보통은 넘지. 못해도 대여섯 곳의 단체에서 그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다. 우리 정의회도 그중 하나이고.”

적제의 출도 사건이 터져 준 덕분에 검귀를 쫓던 이들 중 칠 할은 돌아섰다.

그들 대부분이 적제의 사냥에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적제를 죽이면 현재 천하를 삼분하는 세력 중 한 곳인 패도맹을 뒤흔들 수 있다.

전쟁의 양상이 바뀌어 버리는 것이다.

천상련이든 반천련이든 전쟁을 오래 끌 생각은 없다. 그들은 평화를 바라지 않는다. 상대방의 멸망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선 패도맹이 없어져야 했다.

그러던 중 적제의 출도는 절호의 기회였다.

검귀같이 독보하는 야인은 언제든 상대할 수 있으나, 거대 세력인 패도맹을 뒤흔들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다.

이러한 강호 정세 덕분에 지금 검귀를 쫓는 이들은 많지 않았고, 있더라도 그와 직간접적으로 은원이 있는 방파들뿐이었다.

하지만 다들 만만치 않은 곳들뿐이라 초운에 대한 감시만큼은 철저히 하고 있었다.

육대세가만 하더라도 엄청난 재력을 동원해 하오문을 움직여 초운을 쫓는 중이었고, 정의회 또한 자체적으로 운용하는 정보 조직을 통해 정보를 얻고 있었다.

육평의 설명에 공동파의 젊은 무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쩌면 잡기 힘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잡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 정의회가 빛을 볼 수 있어.”

“……잘 몰라서 그러는데, 어째서 장로님들은 검귀를 죽이라고 한 거지요? 그래도 같은 구대문파 출신이지 않습니까?”

그에 육평이 낮은 한숨과 함께 답했다.

“명성을 얻기 위해서다.”

“명성?”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너도 알겠지만 정의회는 아직 제대로 자리를 잡은 게 아니다. 돈도 인재도 턱없이 부족하지. 구대문파의 속가들마저 우리에게서 거리를 두는 마당에…… 다른 방파들은 또 어떻겠느냐.”

속가의 이야기가 나오자 공동파의 젊은 무인은 조금 분한 듯 목소리를 키웠다.

“나쁜 놈들 아닙니까? 본산이 망했다 해서 그 뿌리가 어디 가는 게 아닐진대…….”

“속가를 너무 욕하지 마라. 그들도 천상련과 반천련의 눈치를 보느라 죽을 맛인데, 우리를 지원이라도 했다가 찍히면 누가 책임져 주겠느냐?”

“…….”

“하여간 정의회가 하나의 단체로서 구대문파의 전통을 계승했다는 것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무림공적의 목을 취해 명성을 올리는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고 지금까지처럼 천상련의 지부만 박살내다가는 언젠가 사냥당하고 말 테지…… 뭐, 이렇게 생각하는 장로들이 많은 것 같더군.”

“대주님은 아닙니까?”

“글쎄…… 큰 그림을 봤을 땐 옳은 소리다만, 문파의 부흥 운동을 위해 자파의 제자를 제물 삼아 죽인다? 자세한 사정은 알아보지도 않고 무림공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이건 사파 놈들이나 할 짓이 아닌가 싶다.”

“그럼 반대를 하시지 왜 검귀를 쫓는 것입니까?”

육평이 볼을 긁적이며 답했다.

“까라면 까야지 어쩌겠냐.”

“…….”

八章

녹산사.

악록산의 아름다운 산세의 고요한 풍광들과 잘 어우러진 이 사찰은 호남성 제일의 사원으로 유명했다.

미륵전(彌勒殿), 대웅보전(大雄寶殿), 오관당(五觀堂), 종고루(鐘鼓樓), 관간각(觀間閣) 등 다섯 개의 전각으로 이루어진 녹산사.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중 오관당은 반파되어 있었고, 관간각은 그 잔해만 남아 있었다.

그래서일까.

경내에는 평소와는 달리 짙은 암운이 끼어 있었다.

“그를 내놓지 않는다면…… 뒷일은 노부도 감당하지 못한다. 전각 두어 개 무너지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게야.”

중년의 사내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그의 앞에 서 있는 작은 체구의 노(老)승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담담한 어조로 답했다.

“녹산사는 무림의 방파가 아니오. 그러니 그런 사람을 숨겨둘 이유가 없소.”

“내 분명 그놈이 이곳으로 도망치는 것을 보았거늘……. 중놈이 거짓말을 하는구나.”

중년의 사내는 얼핏 보아도 마흔을 넘기지 않아 보였다. 헌데도 그는 늙은 승인을 하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늙은 승인 역시 그의 하대를 당연시 여긴다는 것이다.

“원하신다면…… 뒤져 보아도 좋소.”

“보나마나 어디론가 빼돌려 두었겠지.”

“그리 생각하시면서 왜 내놓으라 하시오.”

“…….”

승인이 되묻자 사내는 대답 대신 자신의 검을 천천히 뽑았다.

아주 고요하고 느린 발검. 그러나 그 기세는 태산이 뽑히는 듯했다.

이윽고 그의 검날이 늙은 승인의 코앞에 이르자 승인의 전신에는 땀이 흥건했다.

“아흐레 더 주겠다. 아흐레가 지나도 그놈을 내놓지 않고 고집 부린다면, 내 중과 어린아이는 죽이지 않는다는 철칙을 어기고 말리라.”

중년 사내가 돌아가자 노승인은 짧은 한숨과 함께 비틀거렸다.

나름 허세를 부리며 버텼으나, 사내의 흉흉한 기세는 무공에 무 자도 모르는 승인이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스승님!”

“스승님!!”

그가 쓰러질 듯 보이자 뒤편에 있던 젊은 승인들이 달려왔다.

그들은 감히 사내 앞에 다가설 용기가 부족했기에 스승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수양이 제법 깊은 노승인마저 비틀거릴 정도인데 새파란 젊은이들이 견디기엔 무리가 있었다.

아마 다른 이였다면 그 사내의 살기에 게거품을 물고 기절했을 것이다.

절대경의 고수란 바로 그런 것이다.

얼마 후 노승인이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고 등에선 계속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중년 사내의 살기는 그만큼 공포스러웠다.

“괜찮으십니까, 스승님……?”

제자들이 근심하여 묻자 노승인, 법무(法撫)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각 두 개로 끝난 것이 다행이로구나.”

“하지만 스승님, 그자는 아흐레 뒤에 온다고 하였습니다.”

“내일 걱정은 내일 하자꾸나.”

“…….”

스승의 무책임한 말에 제자는 할 말을 잃었다.

더구나 이레 뒤엔 정말로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몰랐다.

출가하여 승적에 이름을 올린 몸이라도 아직은 젊다. 죽음에 달관할 나이는 아닌 것이다.

“그럴 게 아니라…… 그자 말대로 그분들을 넘기는 게…….”

“어허!”

힘없어 보이던 법무의 입에서 호통이 튀어나왔다.

“부처를 모시는 놈 주둥이에서 그 무슨 망발인고! 중이 제 몸 아끼려 남의 등을 떠밀어야 한단 말이더냐!”

“그, 그것이 아니오라…….”

“시끄럽다, 이놈! 어허…… 내 제자를 잘못 키웠구나. 너는 오늘부터 반년간 묵언하여라.”

“……스승님.”

젊은 승인은 울상이 되어 그의 스승을 불렀다. 하지만 법무의 굳은 얼굴은 풀리지 않았다.

그는 결국 체념하여 입을 꾹 다물어야 했다.

평소 승인답지 않게 말이 많은 편이었으니 묵언 수행은 그에게 있어서 크나큰 고통일 것이다.

잠시 후 법무는 또 다른 제자의 이름을 불렀다.

“각인(覺人)아…….”

“네, 스승님.”

그러자 진중한 얼굴의 승인 하나가 답했다.

그는 그의 제자 중 첫째로 수행이 제법 깊어 법무가 기꺼워하는 이였다.

“너는 이 길로 반천련의 지부로 찾아가 을마지에 대해 전하고 도움을 청하여라. 내 송산, 그 친구와는 적지 않은 인연이 있으니 련에서는 분명 도움을 줄 것이다.”

송산. 반천련의 전신 중 하나인 무림맹의 맹주이자, 천하의 고수들이라는 육왕칠사 중에서도 일인자라 칭해지는 절대고수였다.

무림과 연이 없다던 법무가 송산이라는 절대자와 친분이 있었다니. 놀라운 일이었지만 제자 중 어느 누구도 놀라워하지는 않았다.

각인이 그의 손을 잡으며 굳은 어조로 답했다.

“네, 스승님. 반드시 도움을 구하겠습니다.”

“그래, 너의 양어깨에 녹산사와 사제들의 목숨이 달려 있음을 잊지 말거라.”

그렇게 각인은 길을 나섰고, 엿새가 지났다.

* * *

“드디어 악록산인가.”

햇볕을 가린 방갓을 들어 올려 얼굴을 드러낸 준수한 청년이 멀리 보이는 작은 산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는 현 무림에서 가장 원한을 많이 쌓은 자로서, 수많은 무인들이 쫓고 있는 공적이었다.

몇 년 동안 자신을 쫓는 무인들을 닥치는 대로 참살한 그의 귀신같은 검공 덕분일까.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경외와 두려움을 담아 그를 검귀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런 무서운 별호와는 달리 그는 멸문한 화산파의 본산제자였다.

게다가 명맥이 끊긴 자하신공을 복원하고 검향을 피워 올린 인재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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