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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향-106화 (106/217)

검향 106화

그리고 그런 그를 뒤로하고 다시 포호문의 행렬 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도사의 목소리가 그의 귀를 파고들었다.

“자네가 오늘 죽지 않아도 된다는 소릴세.”

포호문주 척상호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도사를 바라보았다.

짐꾼에게 힘없이 끌려가기에 무공도 모르고 입만 산 도사인 줄 알았다. 그래서 신경 끄려고 했건만, 어느 순간 다시 행렬의 앞을 가로막고 선 것이다.

귀찮음보다는 작은 호기심이 밀려왔다. 그래서 물었다.

“목적이 뭐지?”

“시주를 받으러 왔다 했소.”

“시주라면 돈을 주었는데…….”

그에 도사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건 내가 원하는 시주가 아니오.”

“원하는 게 무엇인지 한번 말해 보도록.”

도사 적오가 짧게 답했다.

“네놈들 목숨.”

“뭐……?”

척상호는 그의 얼굴에서 차가운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평생 가장 불길한 것이었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매화 향이 섞여 있었다.

오의(奧義).

칠절매화검(七絶梅花劍). 삼식(三式).

향만천지(香滿天地).

척상호는 그저 향기를 맡았을 뿐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의 숨은 이미 끊겨 있었다.

아니, 숨통이 끊긴 것만이 아니었다. 그의 몸통이 두 동강 나 있는 것이 더 문제였다.

하반신은 여전히 말 위에 앉아 있었지만 가슴 위의 상반신은 땅에 떨어지고 있었다.

무사들이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으…… 으…… 으아아아!”

“문주님!”

적오가 입꼬리를 쫙 올리며 비릿한 살소를 내비췄다.

“너희는 악인이다. 그러나 너희가 악인이라서 죽는 건 아니다.”

그의 손아귀엔 검이 없었다.

그런데도 매화 향을 실은 바람이 불어오면 두 명에서 세 명씩 아주 잔인하게 목숨을 잃었다.

그가 이십사수매화검 속에서 얻은 칠절매화검의 오의는 초운의 그것과는 달랐다.

초운의 매화검류가 산들바람과 같다면 적오의 매화검류는 폭풍을 닮았다. 그의 검기는 강하고 거침이 없었다.

포호문의 무사들은 덤비는 걸 포기했다. 보이지도 않는 무형의 검기가 동료들을 토막 내는데 무섭지 않을 리 없었다.

그래서 도망가려 했다. 그러나…….

“크아아악!”

일백 명의 무사들은 반경 십 장 안을 넘어가지 못했다.

그 밖을 넘어서려 하면 어디선가 검기가 일어나 그들을 도륙했기 때문이다.

진퇴양난. 몇몇은 죽을 각오로 덤벼 보기도 했지만 소용없었다.

적오가 다시 말했다.

“너희가 죽는 것은 내 제자를 건드리려 했기 때문이다.”

마혈이 찍혀 몸을 움직일 수 없던 짐꾼 오 씨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무사들의 비명에 오줌을 지렸다.

자신은 이미 죽었는데 저승사자의 농간으로 염라대왕 앞이 아닌 지옥에 먼저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 많던 비명 소리가 차츰 줄어들기 시작한 것은 약 이각여가 지난 후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비명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었다.

잠시 후 오 씨는 뒤편에서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발자국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그 도사가 자신마저 죽이러 오는가 보다 하고 그는 눈을 질끈 감아야 했다.

하지만 왠지 이상한 기분에 눈을 떴다.

발자국 소리가 하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마혈이 풀렸다.

“어…… 어?”

몸이 편해지자 그는 자기도 모르게 주저앉아 버렸다.

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 그를 불렀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어이, 오 씨. 괜찮은가!”

“어? 자네들은……?”

분명 마을에서 자신과 함께 끌려온 네 명의 짐꾼들이었다.

그들은 어디 한 군데 다친 곳 없이 멀쩡했다. 반면 그들의 뒤편은 피바다였다.

일백의 무사들 중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한 것이다.

“그 도사는…… 왜인지 몰라도 우리를 살려 주었네.”

짐꾼 중 하나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 말에 오 씨는 순간 도사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자네가 오늘 죽지 않아도 된다는 소릴세.”

아마 짐꾼이라고 밝혔던 것이 통했던 것이리라.

오 씨를 포함한 다섯 명의 짐꾼들은 서둘러 자리를 떠나 고향으로 향했다.

***

포호문 무사들의 전멸 소식이 반천련의 총사인 제갈정오에게 흘러들어 간 것은 조금 전이었다.

닷새 전의 일이었지만, 사건이 벌어진 귀주는 반천련과 지척이라 그나마 빨리 소식을 들은 편이다.

제갈정오는 지금 어느 때보다 흥분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눈엣가시 같은 존재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포호문도들의 죽음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희생으로 패도맹주가 강호에 나타난 것을 알았으니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는 반천련의 주요 인물들을 급히 불러 모았고, 모든 것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반천련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세 곳의 세력, 무림맹, 성천궁, 백월성의 정예 부대들이 강호로 나갔다.

무림맹 측은 천중팔성 중 두 명과 그들을 따르는 고수 삼백이 동원되었고, 성천궁 측은 칠금인의 절반이 투입되었다.

백월성은 백월성 정예 부대 서열 2위인 철랑대를 모조리 투입했다.

거의 이천에 달하는 규모였다.

하지만 제갈정오는 그것만으로도 모자라다 여겼다.

그래서 반천련 산하의 모든 방파에 지원을 요청했다.

아니, 단순한 지원 요청이 아닌 반강제에 가까운 동원령이었다.

낭인방이나 살수 문파들과 같은 중립 세력들에게는 그들이 좋아하는 현상금도 걸었다.

물경 삼십만 냥에 달하는 거금이었지만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패도맹주 사냥은 그만큼 중요한 사안이었다.

천상련도 일사천리로 돌아가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십수 년째 련주를 대신해 천상련을 이끌어 가던 부련주 오일상은 천상련을 지탱하는 사부육당의 수장들을 모조리 불러 모았다.

그리고 현재 반천련과의 전선에 나가 있는 다섯 개 정예 부대들을 제외하고 천상련을 지켜야 할 나머지 다섯의 정예 부대들을 모조리 동원했다.

또한 꽁꽁 숨겨 놓았던 마인들도 동원했다.

그러나 구대호법신마는 동원할 수 없었다. 천상련주 외에는 그들에게 명령을 할 수 있는 존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규율상 그들은 련주의 직속이었으며, 호법사자의 의미가 컸다. 때문에 각자의 세력을 일구어도 용서가 되었던 것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그들이 일군 세력은 천상련에 가입된 사파의 세력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수장인 구대호법신마들은 하나같이 천상련의 법에서 벗어난 존재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천상련주는 소중히 여겼다.

특히 일위장 곽호의 경우 친우나 형제처럼 생각했다.

그래서 오일상은 아예 그들에 대한 협력을 기대하지도 않았다. 다만 형식적으로나마 협조 공문을 보냈을 뿐이었다.

***

포호문주를 비롯한 일백 명의 몰살 사건에 대한 소문은 패도맹의 정보 단체인 신안에 의해 불과 열흘 만에 전 중원으로 퍼졌다.

전서구를 적극 활용한 결과였다.

신안은 이 소문을 퍼뜨리기 위해 무려 일천 마리의 전서구를 동원해야 했다.

그리고 애초에 작정하고 퍼뜨리는 소문이라 굉장히 잔인한 묘사가 뒤따랐다.

하지만 사람들의 뇌리에 박힌 것은 딱 한마디뿐이었다.

적제(赤帝)가 홀로 강호에 나왔다!

세상은 경악했다. 아니, 뒤집혔다고 하는 것이 더 제대로 된 표현이리라.

근래 가장 큰 화젯거리였던 검귀의 행적 따위는 완전히 잊힐 정도였다.

그리고 그것은 소문의 유포자인 적오의 의도이기도 했다.

그의 제자인 초운에 대한 관심은 직접적인 은원이 걸린 이들을 제외하고 대부분 사라졌다.

모든 게 의도한 대로 돌아가니 적오의 입장에선 기쁜 일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패도맹의 총사 마영은 머리를 쥐어뜯어야 했다.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요, 도 당주!”

“도움을 주라고 하지 않았소, 총사. 나는 분명 총사의 명에 따랐을 뿐인데 왜 이러는 거요.”

패도맹의 직속 정보 단체 신안의 당주인 도호성은 대총사의 잔소리에 귀가 아팠는지 한쪽 귀를 틀어막으며 답했다.

“도움을 주랬지 무덤을 파라 했소?”

“……하여튼 난 할 도리 다 했소.”

“으으으으……!”

마영이 제 화를 못 이겨 폭발할 듯하자, 도호성은 당황한 얼굴로 재빨리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도호성이 도망치듯 나가 버리자 화를 낼 곳이 없어진 마영이 이를 바드득 갈며 중얼거렸다.

“귀천대 이 새끼들은 대체 뭘 하는 거야! 맹주께서 쫓기고 계신데.”

마영의 염려와 다르게 귀천대는 이미 적오와 만나고 있었다.

“단주…… 아니, 맹주님. 얼굴이 좋아 보이십니다?”

귀천대주 소호가 싱글거리며 물었다.

적오는 피로 물든 자신의 몰골을 가리키며 되물었다.

“이게 지금 좋아 보이나?”

“다치신 데는 없지 않습니까.”

소호가 주변을 둘러보며 답했다. 적오의 주변에는 수십 구의 시신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소호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이놈들은 어디 놈들입니까?”

“반천련 쪽 같던데…… 잘은 모르겠군. 나중에 천상련 놈들도 좀 섞여 버려서 말이야.”

반천련과 천상련이 패도맹을 무서운 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마당에 그 맹주인 적제가 홀로 강호에 나왔다.

당연히 두 곳 다 가만있을 리 없었다.

“천상련 쪽 마인은 좀 특이하군요?”

적오가 만든 시신의 밭에서 마인의 유해를 찾아내 살피던 청년이 있었다.

그는 조유성이라는 이로, 새외 출신의 고수였다.

귀천대 내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 만큼 고수인 그는 천산마교의 후예이기도 했다. 아니, 정확히는 새외에서 몇 안 되는 조 씨 일족의 방계였다.

“네가 생각하는 마인과는 다르다. 마도와 마공은 엄연히 다른 것이니까.”

적오가 그를 향해 말하자 조유성 역시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는 저도 알고 있습니다. 단지 천상련 측의 마인이 보기 드문 경우라서 특이하다고 한 것이지요.”

“보기 드문 경우라……?”

조유성은 마도를 걷는 자다.

마도는 어디까지나 순리를 좇는다. 그게 그저 마(魔)라는 이름으로 감춰져 있을 뿐이다.

때문에 마공처럼 자아를 잃어버리거나 인성을 저버리지 않는다.

마도(魔道)가 마(魔)의 바깥에서 새장 속에 갇힌 새를 바라보듯 바라보는 것이라면, 마공은 그 새장 속의 새가 되거나 새장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조유성은 마(魔)를 아는 만큼 마공 또한 잘 알지만, 그것은 마공보다 높은 곳에 서서 관찰하는 것과 마찬가지라서 아는 것이다.

때문에 예로부터 마도를 걷는 자는 마공을 익힌 마인들에게 두려움을 주는 존재였다.

마의 근원을 속속들이 아는 자와 마의 부정적인 부분에 심취했을 뿐인 자 간의 차이 때문이었다.

그래서 마인의 마공은 마도를 걷는 자에겐 통하지 않는다.

한 번이라도 펼치는 즉시 그 구성이 낱낱이 파헤쳐지니 상극이라면 상극이었다.

그렇다 해서 조유성이 마인을 혐오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마도를 걷고 마를 이해하는 자로서 마인들을 동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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