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향 105화
옆에서 지켜보던 혈뢰검은 초운의 배짱에 잠시 감탄했다.
자신이었다면 적이 내미는 게 무엇이든 일단 의심하고 보았을 것이다.
헌데 그것을 망설이지도 않고 받아먹다니…….
그가 어린 나이임에도 거물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날 누구에게 데려갈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초운이 자신을 진맥하던 귀궁을 향해 물었다.
하지만 대답은 귀궁이 아닌 혈뢰검의 입에서 나왔다.
“말해주고 싶지만, 너무 많아서 대답이 어렵겠군.”
“많다니요?”
“검귀에게 원한이 깊은 자들이니 어쩔 수 없지. 그게 한두 명이겠나?”
초운이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무림공적이 된 이후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용서받을 수 없을 거라 예상은 했었다. 그렇기에 의외로 마음은 담담했다.
하지만 혈뢰검은 그가 말없이 조용히 있는 게 신경 쓰였는지 한마디 했다.
“원한이란 건 결국 이해득실이 어긋나 생기는 것이다.”
“…….”
“칼밥 먹고 사는 새끼들은 그게 무림공적이든 뭐든 간에 남을 죽이려 하면 나도 죽을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하는데 그걸 아는 놈들이 얼마 없다. 이 넓은 중원에서도…….”
초운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맥을 끝낸 귀궁이 일어서며 혈뢰검에게 말했다.
“별일이구려.”
“뭐가?”
“형님이 사냥감에게 쓸데없이 주절거리는 꼴을 다 보고 말이오.”
혈뢰검은 농담 말라는 얼굴로 피식 웃었다.
“됐고. 독은 좀 어찌 되었어?”
“생각보다 양호하니 의뢰자들에게 살려서 갈 순 있겠소.”
다행히 피독수의 효능이 잘 흡수된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가의 피독수다. 그것도 피독주를 만드는 원액인 것이다.
어지간한 해독약보다 훨씬 뛰어난 효능을 지니고 있으니 효과가 좋을 수밖에.
그가 당가의 독과 약을 어떻게 지니고 있는지 알 순 없으나, 한 가지 확실한 건 초운이 살았다는 것이다.
늘 그렇듯 살아 있는 한 기회는 오게 마련이다.
* * *
덥수룩한 수염의 장한이 분한 듯 이를 악물며 말했다.
“우리가 한발 늦었습니다. 낭인방의 망종들이 채 갔더군요.”
이를 듣던 백발의 아름다운 청년이 되물었다.
“그럼 죽었겠군……?”
“낭인들 얘기를 들어보니 살아 있다고 합니다.”
“음…….”
백발의 청년이 책상 위에 턱을 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 모습은 영락없는 절세가인의 그것이나, 아쉽게도 그는 사내였다.
잠시 후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검풍대를 보내게.”
“검풍대를 말입니까?”
“안 되나?”
“장로님들이 허락을…….”
수염의 장한이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백발의 청년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회주는 나일세.”
“……예.”
결국 장한은 굴복했다. 어쩔 수 없었다.
천상련과 그들이 앞세운 구대호법들에 의해 멸문당한 구대문파.
그 몰락한 구대문파의 구심점이 되어 살아남은 제자들을 끌어모으고 정의회라는 방파를 만든 것이 바로 눈앞의 이 청년이었다.
장로들이 뭐라 하든, 지금 이 정의회의 지존은 청년인 것이다.
수염의 장한이 밖으로 나가자 백발 청년의 굳었던 얼굴도 풀어졌다.
사람을 다루는 건 성격에 맞지 않은 짓이다.
늘 자유롭고 활동적이던 그가 이토록 큰 중책을 맡게 된 건 결코 원해서가 아니었다.
죽은 사부의 유지도 그러했고, 그저…… 그냥 둘 수가 없었다.
백발의 청년은 한숨과 함께 누군가를 떠올렸다.
엄청난 노력과 성실함으로 감탄하게 만든 사제였다.
화산파의 마지막 순간 당당히 그 악마와 맞서 싸우며 피운 검향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했다.
무림공적이 되지 않았다면 정의회의 한 축이 되어 구대문파 부흥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백발의 청년.
정의회의 회주인 그는 화산파의 장문제자였던 적륭자의 수제자로서, 어린 나이에 이십사수매화검을 펼쳐 내어 화산 역사상 최고의 천재라 칭송받은 이였다.
그의 이름은 유기.
무림공적인 초운의 사형이었다.
* * *
초운의 행적은 낱낱이 파악되고 있는 중이었다.
천검단에서 낭인방의 삼 형제에게 넘어간 것도 알려진 지 오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검귀라는 이름은 현 중원에서 가장 유명한 이름이었다.
그 존재감은 육왕칠사에 비할 바가 못 되지만 화제성만큼은 단연 최고였다.
천상련과 반천련, 패도맹의 싸움은 언제부터인가 고착화되어 있었다.
이대로 패권이 가려지지 않고 세 곳의 거대 방파가 수백 년을 이어간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랄까?
그러던 중에 다시 나타난 검귀는 화젯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그는 세상에 다시 나타나자마자 천상련의 구대호법신장 중 가장 막대한 공력을 지녔다는 현천마녀를 죽였다.
그녀를 죽이기 위해 반천련은 수많은 노력을 해 왔지만 그러한 노력들 중 제대로 보상받은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런 그녀를 검귀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데 필요한 제물로 선택했다.
물론 초운 자신은 그럴 의도가 없었지만 세상이 보는 눈은 그러했다.
세상의 눈에 그는 여전히 검귀라 불리는 사악한 무림공적이었고, 단지 그 칼끝이 마녀에게로 향했을 뿐인 것이다.
이 같은 소문들은 제자를 구하려는 적오자에게 그리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물론 현천마녀를 죽였다는 소식은 어깨를 들썩이게 할 만큼 즐거웠다.
제자의 발전을 싫어할 스승은 없는 법이니까.
하지만 낭인방에 넘어간 건 문제였다.
그는 무림맹 시절부터 낭인들과 꽤 교류를 했었다.
때문에 낭인들이 얼마나 개자식들인지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각지의 방파들이 초운을 잡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정황도 파악한 상태였다.
우선은 제자의 구명이 먼저였고, 그다음이 구출이다.
“그 순둥이가 사악한 살귀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초운과는 어릴 적 헤어졌다.
그렇다 해도 그는 알았다. 제자의 그 순둥이 병은 평생 가도 고쳐지지 않으리란 것을.
분명 그가 모르는 사연이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문제는 초운에게 집중된 세상의 이목이었다.
지금 제자를 쫓는 방파들은 하나같이 쟁쟁했다.
한두 군데라면 패도맹주인 적오 개인의 힘으로도 누를 수 있겠으나 열 곳, 스무 곳쯤 되면 말이 달라진다.
제아무리 절대고수라 해도 그 많은 무인들을 상대할 순 없는 것이다.
하지만 해답은 의외로 금세 나왔다.
적오가 다소 장난스러운 미소와 함께 중얼거렸다.
“스승이 제자에게 밀릴 수야 없지. 아직은 말이야.”
그는 대체 뭘 하려는 것일까.
四章
초운을 쫓는 방파 중 가장 많은 무인들을 투입한 곳은 바로 강서의 포호문(咆號門)이었다.
그곳은 강서에서 서서히 세력을 넓히는 중인 문파로, 반천련이 뒤를 봐주는 곳이었다.
반천련의 전신인 무림맹 시절부터 충성을 다하던 문파였으니, 무림공적인 검귀를 잡는 일에 빠질 리가 없었다.
특히 초절정의 고수로 소문난 포호문주 척상호가 직접 나설 정도여서, 포호문이 이번 일을 얼마나 중요시하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들은 짧지 않은 여정 끝에 귀주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일정이 패도맹의 정보 조직인 신안의 요원들에 의해 감시당하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포호문도들은 문파의 이름처럼 용맹하나 결코 선한 자들이 아니었다.
이들이 지배하고 있는 강서의 태화(泰和)는 양민들에게 있어서 지옥과도 같은 곳이었다.
작은 실수에도 무인들에게 목숨을 잃는 곳이 정상일 리 없다.
그런 그들이 반천련에 가입할 수 있었던 것은 힘없는 양민들의 고혈을 빨아 번 돈 때문이었다.
제물의 자격으로는 충분했다. 아니, 차고 넘친다고 볼 수 있었다.
그들을 지켜보던 적오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전장에서 보여주던 살소(殺笑)였다.
포호문주 척상호는 올해 서른이 된 젊은 문주로, 나이 스물여덟에 절정의 경지에 오른 인재였다.
그러한 경지에 이르기까지는 그 자신의 뼈를 깎는 노력도 있었지만, 그의 아비이자 포호문의 전대 문주인 척이환의 노력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아들의 무공에 도움이 될 영약을 사기 위해 주민들에게 고리로 돈을 빌려 주었다.
그리고 단 하루만 늦어도 재산을 빼앗았다.
재산이 없으면 광산으로 노역을 보내거나, 딸자식을 기루에 팔기도 했다.
그렇게 사람 같지도 않은 짓을 저질러 만들어낸 것이 그의 아들 척상호였다.
척상호가 그 같은 일을 모를 리 없었다.
그 또한 양민들을 상대로 그의 아비와 같은 일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설사 모른다 해도 상관없었다. 적오는 오늘 이들을 반드시 응징해야 했다.
그것도 가장 잔혹하고 압도적으로…….
* * *
포호문도 중 하나가 자신들의 행렬을 가로막은 한 도사를 향해 물었다.
“무슨 일이오?”
“시주 좀 해주시오.”
“중도 아닌데 시주 타령이오?”
“불문의 제자나 도문의 제자나 생활이 어려운 건 마찬가지 아니겠소. 사정 좀 봐주시구려.”
말투는 점잖은데 돈 안 주면 드러누울 기세다.
어쩔 수 없이 포호문도는 행렬 중간에서 말을 타고 오는 문주에게 이를 알렸다.
잠시 후 행렬의 가장 앞으로 말을 탄 사내가 나타났다.
그의 이름은 척상호로 포호문의 문주였다.
그는 오만한 얼굴로 길 한가운데 자리 잡은 도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품에서 은자를 하나 꺼내 도사의 발 앞에 던졌다.
“옜소. 가다 목이나 축이시오.”
그러자 도사의 얼굴에 시원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허리를 숙여 은자를 쥐었다. 그리고 척상호를 향해 말했다.
“돈은 고맙소만, 이것은 시주로 치지 않소.”
“도사가 실성을 했나, 돈 받았으니 어서 꺼지쇼!”
도사의 말에 포호문의 무사 하나가 나섰다.
그는 도사의 곁에 다가가 거칠게 도포를 잡는가 싶더니, 도사의 귓가에 대고 나직이 말했다.
“아이고, 도사님…… 죽고 싶지 않으면 그냥 가십시오. 저분이 뉘신 줄 알고……. 지금 성질이 많이 죽어서 그렇지, 자꾸 억지 부리시면 죽습니다, 죽어요…….”
무사의 손에 끌려가던 도사가 의아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자넨 조금 다르군?”
“예?”
“포호문의 제자들은 하나같이 포악한 말종들이라 들었네만.”
“어이쿠,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저는 무사가 아닙니다요.”
“아니다?”
“네, 무슨 검귄가 뭔가를 잡으러 가는데 무사들 잔심부름해줄 사람 필요하다 해서 끌려온 것입죠. 저 말고도 네 명이나 더 있습니다.”
“그래? 하마터면 큰 실수를 할 뻔했군.”
“그게 무슨…… 소……?”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으려 했던 무사, 아니 짐꾼 오 씨는 갑자기 몸이 굳어 가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