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향 103화
을마지는 절대경의 끝자락에 이른 초고수였으나 자식을 먼저 보낸 아픔은 평범한 양민과 다르지 않았다.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그리 허망하게 갈 줄 알았다면 아비 노릇이나 제대로 할 것을…….
자식을 위한다는 것이 되레 한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딸이 남긴 유일한 혈육만큼은 최선을 다해 키웠다.
천살신전을 짓고 은거하다시피 한 것 또한 손녀를 위한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손녀 또한 불치병에 걸렸음을 알게 되었다.
죽은 제 어미와 같은 절맥증이었다. 상태도 더 심했다.
그때만큼은 빛보다 빠르다는 검술도, 마르지 않는 내공도 소용없었다.
죄책감이 들었다.
대신 아프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어 안타까웠다.
백방을 수소문해 의원을 부르고 좋다는 영약은 다 먹여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손녀는 약관을 넘기지 못하고 죽을 것이 분명했다.
오직 소림의 대환단이나 무당의 태청신단만이 희망이었다.
두 영약 중 한 가지를 복용시키고, 절대경에 이른 고수가 실력 좋은 의원의 지도에 따라 내력을 불어넣어 준다면 손녀는 건강해질 수 있다.
하지만 을마지가 제아무리 초극의 고수여도 소림과 무당만은 넘보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천살신전의 살수들을 투입할 수도 없었다.
천살신전은 을마지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가 아닌 살수들을 보호하기 위해 지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살수들을 사사로이 이용한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배신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안타까운 시간을 보내던 중 마지막 희망마저 꺼져 버렸다.
몇 년 전 화산을 시작으로 구대문파가 차례차례 멸문해 버리고 만 것이다.
소림도 무당도 없으니 대환단이나 태청신단은 영원히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침통해 하며 살아갈 때 안면이 있던 천이각주 진명에게서 연락이 왔다.
바로 태청신단의 존재를 알려온 것이다.
그는 한 가지 의뢰를 완수해준다면 그 대가로 무당의 태청신단을 넘기겠다고 했다
하지만 을마지에겐 오래전 살수 일을 시작할 무렵부터 내세운 한 가지 불문율이 있었다.
의뢰인의 사연이 올바르지 않으면 결코 살행 의뢰를 받지 않는다는 것으로, 억울한 죽음을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 그가 지켜온 원칙이었다.
그런데 천검단의 검주 적운은 정의롭고 바른 자로 중원에서 명성이 자자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를 죽이는 것은 을마지가 스스로 내세운 원칙에 어긋나는 일인 것이다.
그러나 단 한 번, 이번 단 한 번만 어기기로 했다.
모든 것은 손녀와 아비 역할도 제대로 못해 주고 허무하게 떠나보내야 했던 죽은 딸을 위해서다.
그는 멀고 먼 북쪽에 있을 손녀를 그리며 중얼거렸다.
“조금만 기다리거라, 청아.”
마음이 급하다 해서 서두르면 실수를 하게 된다.
살수에게 흥분은 독과도 같다.
머리도 가슴도 늘 차갑게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늘 그러했듯 그는 목표물의 흔적을 조용히 쫓을 뿐이다.
천하제일의 살수는 서두르지 않고 조용히, 하지만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三章
절정경은 초입부터 그 중기까지 절정, 그리고 극에 이르면 초절정, 그렇게 둘로 나뉜다.
초운은 일반적인 기준으로 보았을 때 초절정이었다. 그리고 그에 따른 위력들도 초절정과 동일했다.
보통의 무인이었다면 그 상태에서 획기적인 각성과 함께 절대고수로의 길이 열릴 것이다.
하지만 초운은 달랐다. 남들이 초절정이라 부르는 것은 자신의 기준에선 절정의 중기 정도였다.
이는 사부인 적오자가 초운의 몸에 만들어 놓은 거대한 기초 때문이었다.
적오자는 제자를 기를 때 완벽한 기초를 중시했고, 그만큼 혹독한 수련을 시켰다.
그 결과 초운은 한때 절대고수인 흑마 곽호와도 잠시 겨룰 수 있을 정도로 강해졌다.
물론 그것은 진원진기를 깨트리면서까지 썼던 악독한 금기를 이용한 결과였지만, 보통의 무인이었다면 그러한 금기를 쓰더라도 곽호와 맞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초운은 절정이 아닌 일류의 경지에서도 절정경의 고수를 이길 수 있을 정도로 강했고, 절정경에 이르러선 절대경의 고수와 맞상대할 수 있었으며, 심지어 절대경에 이르러야 재현할 수 있는 검향을 재현해 내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흉내.
진짜 검향은 아니었다.
초운은 이미 몇 년 전 사문의 사형인 황현이 마경에 빠졌을 무렵 환검의 오의를 엿보았다.
그러나 사형이 마경에 빠져 버린 것에 대한 자책감으로 인해 그 오의를 잊고 다른 길을 갔다.
그리고 얻은 것이 바로 살검.
선천적인 선함으로 인해 살기를 키우는 일은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년간 기련산에 파묻혀 마음속의 망설임을 지울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살검을 얻기엔 충분했다.
초운이 망설임을 지우기 위해 했던 노력, 그리고 그가 얻은 살검은 극품의 살수들이 수련을 통해 얻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극에 이르면 어떠한 살의나 살기를 들키지 않고 살인을 저지를 수 있게 된다.
살수들은 이를 두고 무의경(無意境)이라 부르는데, 무공의 경지와는 다른 살수들만의 경지였다.
무의경이 극에 이른 살수는 이류의 무공으로도 절정고수를 암살할 수 있게 된다.
그러한 경지에 이르러 얻은 살검이기에 초운은 쉽게 버릴 수 없었다.
버리기 싫어 못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오의가 내면에 뿌리 깊게 박혀 버렸기 때문이다.
다행히 현천마녀와의 싸움으로 다시 환검의 오의를 기억해 냈다. 그러나 그것은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그 원인이 새롭게 만든 살검에 있다고 생각했다.
부상을 입고 죄수처럼 호송되는 처지였지만 살검을 지우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아니, 지우려 하면 할수록 그 경지는 더욱더 높아졌다.
스스로에게 묻는 검의 목소리는 그것을 더 좋아했다.
그렇게 조급해 하는 와중에 낭인방의 공격이 시작됐고, 지금은 벽호의 등에 업혀 도주하고 있는 중이었다.
벽호의 뒤를 받쳐 주는 천검단의 검주 적운은 뒤쫓아 오는 수십의 낭인을 베었고, 도도문의 성 장로는 벽호와 교대로 초운을 업고 경공을 펼쳤다.
초운은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어 벽호에게 물었다.
“나를 저들에게 넘기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헛소리를 잘도 삐약삐약거리는구나. 그렇게 죽고 싶냐?”
벽호가 툴툴대며 말을 이었다.
“낭인들은 현상금 사냥을 할 때 몸뚱이는 안 갖고 간다. 모가지만 소금에 절여 들고 가지. 정말 그 꼴이 될래?”
“그건 저도 싫군요. 하지만 저를 넘기면 당신들이 편해질 겁니다.”
초운은 그것이 합리적인 판단이라 생각하고 그에게 말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간단했다.
“천검은 임무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 현상금이란 것도 결국, 제가 만든 업보이니 저들 손에 제가 죽는다 해도 어쩔 수 없겠죠. 그러나 그 업보로 인해 당신들이나 저 낭인들의 생목숨이 끊어지는 건 안 된다고 봅니다.”
그러자 벽호가 피식 웃었다.
“멍청아, 저놈들이 우릴 죽일 수 있을 거라 보는 거냐? 우리가 이렇게 도주하는 건 힘이 없어서가 아냐. 놈들을 넓게 풀어 놓으려는 거지.”
사실이다. 이미 도주하던 천검들이 자신을 쫓는 낭인들을 각개격파하고 있는 중이었다.
“낭인들의 목숨도 목숨입니다.”
“헐……. 널 죽이려는 놈들을 동정하는 게냐, 지금?”
옆에서 듣던 성 장로가 물었다. 그러자 초운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그건 아닙니다. 다만…… 더 이상 제 일에 타인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군요.”
그를 알거나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은 항상 죽거나 다쳤다.
청연 할아버지도…… 사부님도, 사형제들도 모두 그랬다.
그들에겐 늘 미안했고, 그 미안함은 짐이 되었다.
기련산을 내려왔을 때부터 생각했던 거지만 그 짐을 더 늘리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 인연이란 놈은 늘 따라다녔다.
그때 벽호가 고개를 살짝 돌리며 말했다.
“내 살다 살다 낭인 놈들 동정하는 새낀 또 처음 보는군. 진짜 괴상한 새끼구나, 너?”
“…….”
“잘 들어. 낭인이란 족속은 돈이 걸리면 지 마누라랑 딸자식은 홍등가로 넘기고 아들은 반반하면 남색가에게, 반반하지 않으면 노비로 팔아먹고도 남을 개말종들이지. 네가 그런 놈들 업보 걱정하는 건 길가에 굴러다니는 똥을 걱정해 주는 거랑 같은 거다. 알겠냐?”
“표현이 과격하군요.”
“사실이니까.”
도도문의 성 장로도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비록 도둑질을 업으로 삼는 사파의 장로이지만 낭인들만큼은 꺼렸다.
돈을 위해서라면 마인에 못지않은 짓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는 것이 바로 낭인들인 것이다.
실제로 과거 마인 사냥 시절의 마인들 중에는 낭인 출신도 많았는데, 그들은 낭인 시절 하던 짓과 마인이 된 후 하던 짓이 거의 차이가 없었다.
그만큼 낭인들의 돈에 대한 집착은 병적이었다.
그때 물기에 젖어 질퍽거리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한 사내가 나타났다.
그는 바로 천검단의 검주인 적운이었다.
발걸음 소리가 그러했던 것은 그의 전신이 피에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스스로의 피가 아닌 낭인들의 피였다.
워낙 많은 이들을 베어버렸던 터라 어쩔 수 없었다.
몸에서 배인 혈향은 아마 몇 달 정도는 지나야 겨우 잊을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잠시 멈춰 선 벽호들을 향해 말했다.
“이 근처의 낭인들은 모두 처리했다.”
그러자 모두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천 명일 때야 무섭지 지금처럼 흩어져서 쫓아오면 날파리나 마찬가지였다.
“혈뢰검은 쫓아오지 않던가?”
“예. 똑똑한 자이니 자신에게 불리한 걸 알았겠지요.”
“아닐세. 그는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네. 오죽하면 그 돈 밝히는 낭인들 사이에서조차 전귀(錢鬼)로 이름 높겠는가. 게다가…… 광동삼호의 나머지 둘 또한 보통 놈들이 아닐세.”
광동삼호의 첫째인 광혈쌍부는 조금 모자라다고 소문이 나 있으나 절정경이란 경지는 머리가 나쁘면 오르기 힘든 경지였다.
때문에 그에 관한 소문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셋째인 귀궁은 어떤 의미에서 가장 무서웠다.
일단 그는 궁을 사용한다. 그런데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궁술을 무공으로 이끌어 낸 인간은 그가 최초라는 것이다.
궁술은 어디까지나 무공이 아닌 병기술에 불과하다.
내공을 실을 수도 없으며, 내공을 사용하더라도 오직 멀리 쏘아 보내는 일밖에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귀궁이란 자는 어찌 된 건지 화살에 내공을 실어 오랫동안 보전할 수 있었고, 그것은 천하에서 그 혼자만이 가능한 독보적인 기술이었다.
심지어 삼 장 이내의 거리라면 화살이 필요 없다는 소문도 있었다.
진위 여부는 확실치 않지만 기로 이루어진 화살을 사용한다던가?
궁술을 체계화시켜 궁무(弓武)라는 형태의 무공으로 발전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절정경에 이른 유일한 궁사(弓士).
그것이 바로 귀궁이었다.
만약 낭인이 아니었다면 무림사에 이름을 남길 천재로 일대종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는 낭인의 길을 택했다.
오백 보 이상 떨어져 있고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혈뢰검도 죽일 수 있다는 고수.
게다가 사냥꾼 출신이라 추적에도 능했다.
특급의 살수조차 그의 감각과 본능, 그리고 경험에 의지한 추종술을 벗어날 순 없었다.
정보에 민감한 도도문의 장로답게 성 장로는 광동삼호들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때문인지 그가 가장 먼저 표적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