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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향-95화 (95/217)

검향 95화

九章

한때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신비인이 있었다.

천상련의 호법신장인 그는 일월(日月)처럼 신비로운 행적으로 인해 일월신마라 불리었다.

허나 언제부턴가 그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그 특유의 잔혹함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그런 그의 별호가 일월신마에서 흑마(黑魔)로 바뀌게 된 계기는 일 년 전이었다.

천상련과 반천련이 만들어 낸 수많은 전장들.

그 전장에서 정체불명의 흑기(黑氣)를 전신에 두르고 반천련에 붙은 구파의 잔당들을 도륙하던 모습은 공포 그 자체였다.

그때부터 그의 별호는 흑마로 바뀌었고 그의 화산침공으로부터 시작된 이 전쟁을 흑마의 난이라 불렀다.

그런 그가 지금은 몹시 슬퍼하는 중이었다. 아니, 분노하는 중이었다.

“그 아이가…… 죽었다고?”

언제나 여유롭던 그의 얼굴은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아는지 모르겠으나 그에게 보고를 올리던 수하는 그가 내뿜은 엄청난 살기에 의해 질식사한 지 오래였다.

그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하지만 그의 눈가엔 이슬이 맺혀 있었다.

“큭…… 큭큭큭, 사요야…… 네가 정말 죽고 말았느냐? 이젠 이 세상에 없단 말이더냐?”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었다. 그녀를 울타리 안으로 끌어들인 것이 바로 자신이었다.

처음엔 병으로 죽어 가던 소녀가 안쓰러웠을 뿐이다.

겨우 사오 년의 수명만을 남겨 두었으면서도 자신을 사랑한다고 수줍게 고백하던 소녀가 너무도 안쓰러웠다.

아주 잠깐의 변덕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힘 있는 자의 변덕이었다.

그는 소녀를 살릴 만한 힘이 있었고 그 힘을 과시하고자 했다.

무엇보다 무정한 하늘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인간의 명운마저 바꿀 수 있음을, 더 이상 무정한 하늘에 의해 인간의 운명이 농락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

그렇게 그녀는 그가 처음으로 역천을 실행에 옮긴 대상이 되었다.

두려움에 떨면서도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절대적인 믿음을 보내던 소녀의 손길, 미소…… 모든 것이 이젠 과거의 기억일 뿐이다.

곽호는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한 방울의 눈물이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후회 또한 눈물을 따라 흘러내렸다.

후회…… 그 감성적인 소녀가 마녀가 되어버렸기 때문도 아니요, 살인에 미친 요녀가 되어서도 아니었다.

그녀가 그녀로서 오롯이 존재하기 위한 모든 감정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후회했다.

그녀를 살리고자 과시한 힘이건만 그녀를 죽인 거나 마찬가지였다. 아니, 죽인 것보다 더 나빴다.

이후 마정의 씨앗을 넘긴 제자들에게 그녀와 같은 정을 준 적이 없다. 또 다른 그녀를 양산해내는 일은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

다른 제자들에게도 어느 정도 동정심과 미안함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번천계라는 대의를 위해 계산된 희생이었다.

하지만 사요는 달랐다.

자신이 언제 다시 그 소녀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인가.

비록 마녀가 되어 미쳐 버렸더라도 그에게 그녀는 소중한 기억의 조각이었다.

더군다나 지금처럼 대법을 통해 선체(仙體)로의 변환을 억누르는 지금은…… 너무나도 소중했다.

그가 인간으로서의 조각을 잃어 가면 갈수록 대법은 무용해지기 때문이었다.

“의외였습니다. 그녀 정도라면 손쉬울 거라 생각해서 추천하였던 것인데.”

백색의 가면을 뒤집어쓴 청년이 그에게 말했다. 그의 시선은 태사의 앞에 쓰러져 있는 한 사내를 향해 있었다.

바로 사요의 죽음을 보고한 천상련의 무인이었다.

“휘유~ 정말 화가 많이 나셨나 보군요.”

백색 가면의 사내. 황현은 땀을 닦는 시늉을 하며 그에게 다시 말했다.

“저도 죽이실 생각이 아니라면 살기는 거두시지요, 스승님.”

그러자 곽호의 몸에서 뻗어 나온 살기가 점점 사그라졌다.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여유를 되찾았다.

“의외로구나. 초운이 사요를 죽이다니.”

“갑자기 끼어든 천검단이 아니었다면 분명 초운이 죽었을 겁니다. 게다가 초운을 죽이지 말아야 한다는 명령도 어느 정도 작용했었겠지요.”

곽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초운이 그녀를 이긴 것은 천운이나 다름없었다.

사요의 그 엄청난 내공을 토대로 펼쳐지는 소수마공은 자신이라 해도 쉽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한 사요를 초운이 이겨 낸 것은 천검단이라는 변수 때문이리라.

아니, 그리 생각하고 싶었다.

초운이 정말 사요를 죽일 만한 실력이라면 앞으로의 계획을 모조리 뜯어고쳐야 한다는 의미였으니까.

그에게는 확증이 필요했다.

“네가 한번 가 보겠느냐?”

그가 황현에게 묻자 황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가면 반드시 죽일 수 있지만 사양하지요.”

“왜냐? 넌 그 아이를 죽이고 싶어 했을 텐데…….”

“스승님과 같은 생각 때문이랄까요? 그 녀석 운이 좋아도 너무 좋지 않습니까. 그 운에 희생양이 되고 싶진 않습니다. 게다가 그 녀석이 죽게 되면 번천계는 처음부터 재조정되어야 합니다.”

“음…….”

확실히 황현은 초운이라는 싹을 없애고 싶었다.

그래서 일부러 자신도 상대하기 껄끄러운 그녀를 추천하였다. 그렇다고 자신이 그녀보다 못한 것은 아니었다.

분명 같은 마인이라도 실력 차는 존재한다.

하지만 상성이란 것도 있다.

극음의 기운인 소수마공에게 극양의 자전마공은 상극이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자전마공에겐 소수마공이 상극인 것이다.

만약 그녀와 그가 겨룬다면 짧은 시간 안에 양패구상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런 그녀를 이긴 초운을 찾아가는 것이 달가울 리 없었다.

물론 그녀처럼 가진 바 힘을 제대로 활용할 줄 모르고 무작정 강대한 내공을 뿌려대기만 하는 마인은 황현 자신과 다르다.

상성만 아니라면 십초 안에 그녀를 찢어 죽일 자신도 있는 황현이니 그가 초운을 진심으로 상대한다면 양상이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그는 모험을 원치 않았다. 싸움에서 운이란 큰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그가 초운을 찾아가야 할 시기는 스스로 정할 일이지 남이 정해줄 일이 아니다.

그는 조금 더 강해져야 할 필요성을 느끼는 중이었다.

마인으로서 강해지는 일은 뻔하다.

마인은 타인의 희생을 통해 강해진다.

더 높은 경지에 이를 수는 없으나 강력한 힘을 얻는 것은 가능하다.

그는 오랜만에 포식을 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스승이 그의 상념을 깼다.

“그렇다면 다음엔 누가 좋겠느냐.”

“우리가 줄어든다면 스승님의 힘이 줄어드는 겁니다. 다른 호법신장을 생각해 보십시오.”

“소월(少月)이 좋을 것 같다.”

곽호는 이미 생각해 둔 자가 있었는지 곧바로 답했다. 하지만 황현은 께름칙한 목소리로 말했다.

“귀면호리(鬼面狐狸)…… 입니까? 그라면 정말 확실한 자이지만 그는 원하는 게 너무 많을 겁니다.”

“우리 쪽의 기둥뿌리라도 떼어 달라면 줄 생각이다. 지금 중요한 것은 초운의 진정한 실력. 그게 정녕 운이었는지 아니면 진짜 힘인지…….”

“진짜 힘이라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곽호가 웃으며 답했다.

“내가 직접 나서야겠지. 초운을 확실히 죽여야 한다.”

이미 감정적으로 냉혈한이나 마찬가지인 황현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두려움을 느낄 수 없는 이가 두려움을 느껴 버린 것이다.

‘스승님, 당신은 대체…….’

황현은 자전마공의 완성이 가까워지면 질수록 자신감이 커졌다.

허나 조금 전 그 찰나의 두려움으로 인해 그 자신감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곽호를 따르는 삼인의 마인은 모두 승냥이다.

주인을 사랑하지만 주인을 뜯어먹을 수밖에 없는 본능을 지닌 승냥이인 것이다.

하루에도 수백 번씩 주인인 곽호를 죽일 생각을 한다.

마인은 결코 자신의 머리 위에 누군가를 두지 않는다. 그것이 마인의 본능이었다.

그래서 언제든 빈틈을 찾으려 했고 스승인 곽호 또한 그것을 즐기는 듯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스승이 일부러 보여 준 것들임을 방금 전에 깨달았다.

지금의 스승은 그가 일만 명의 정기를 빨아들여도 이길 수 없는 천외천의 존재였다.

승냥이는 아무리 강해져도 승냥이다. 승냥이는 결코 건재한 호랑이를 물어 죽일 수 없다.

황현이 느낀 것은 바로 그러한 것이었고 그것이 바로 마인의 한계임을 깨달았다.

이미 알고 있기는 했다.

무(武)의 이해가 아닌 타인의 희생을 바탕으로 쌓은 힘은 한계가 있다.

넓은 땅은 채울 수 있되 하늘에 이르는 산은 될 수가 없다.

일류고수는 아무리 내공이 높고 강해도 절정고수를 이길 수 없는 이치와 마찬가지였다.

분명 곽호는 마(魔)이다.

하지만 마인은 아니다.

그는 황현 자신과는 다른 어떤 것이었다.

황현은 가슴 속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두려움을 애써 막았다.

* * *

무림맹의 이인자인 총사 제갈정오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검주는 참으로 쓸데없는 짓을 했소.”

“처벌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반대편에서 술잔을 기울이던 천이각주인 진명이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그러자 제갈정오가 답했다.

“그랬다간 천검단을 잃게 되오.”

진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천검단을 잃게 되면 전선에 무리가 간다.

백월에서 백랑(白狼)들이라도 보내 주지 않는 한 일이 힘들어질 게 분명했다.

“이럴 때 백월 쪽에서 백랑을 움직여 준다면 좋겠는데…….”

제갈정오는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그러자 진명이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백랑들을 전선에 투입하지는 못하지만 다른 일은 시킬 수 있지 않습니까.”

“무엇이오?”

“백랑이란 대대로 백월성주를 수호하던 집단. 때문에 그들이 백월을 지키지 않고 전선으로 향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너무 당연한 소리를 하니 제갈정오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어떻다는 말이오?”

“그런 백랑들을 움직일 수 있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무슨…… 소리를…… 아?!”

제갈정오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다 뭔가 떠올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무릎을 쳤다.

“마인사냥이오?”

진명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하지만 사냥할 마인이 없지 않소.”

“없으면 만들면 됩니다.”

“만들다니……?”

진명은 술잔을 탁자 한가운데 놓으며 말했다.

“꿀에는 벌이 몰리는 법입니다. 그러나 그 꿀이 어디 있는지 벌들이 알 방도가 없지요.”

“그 방도를 우리가 알려주자는 얘기시오?”

“역시 총사께선 귀가 밝으시군요.”

“음, 그리되면 천검단도 위험해질 터인데…….”

“그들은 련의 명령에 절대복종합니다. 검주라는 존재만 없다면 말이지요. 그가 없다면 명령에 따라 이곳으로 귀환하게 될 것입니다.”

“그 검주도 반천련에 충성을 다하고 있소.”

“그건 그렇지만, 가끔 그 오지랖이 불편하시지 않았습니까.”

“…….”

확실히 그의 정의감은 과한 감이 있었다. 아니 천검단의 인물들은 모두가 그러했다.

그 병적인 정의감 때문에 당혹스러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정의감은 정치엔 필요 없는 감정이다.

반천련은, 아니, 제갈정오는 정의감 따윈 존재치 않는 도구가 필요했다. 그리고 천검단이 그 같은 역할을 해주길 원하고 있었다.

결정은 어렵지 않았다.

그 같은 위치에 있는 자는 갈등이 길어져선 곤란하다.

잠깐의 갈등이 천하정세를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이번 결정도 아주 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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