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향 94화
한쪽 눈을 찡그린 채 다른 쪽 눈으로 보석과도 같이 영롱하게 빛나는 마정의 씨앗을 살피던 천응이 중얼거렸다.
“이게 내 몸 안에 있는 것과 같은 거라지, 제갈청?”
회안의 마인은 여전히 대답이 없다. 그가 다시 말했다.
“이걸 흡수하면 좀 더 강해지려나? 신마님을 내 걸로 만들 수 있을 만큼.”
천응은 눈알을 굴리며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곧 고개를 저었다.
“마인의 한계란 명확한 것. 마인은 마정의 씨앗이 허락한 만큼만 강해진다. 마인으로서 정해진 숙명인 거야. 하지만 그 한계를 넘어서면 이미 마인이 아니게 되지. 역천이 아니라 순리에 들어서고 말아. 그럼 사요처럼 몸이 붕괴하게 될 테고……. 그러니 굳이 한계를 뛰어넘으려 노력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나는.”
마정의 씨앗에 대한 마음을 접은 천응은 산꼭대기에서 용검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렇지, 제갈청? 녀석이 많이 강해졌어. 저 녀석을 갖는다면 언젠가…… 신마님을 내 걸로 만들 수 있을 거야. 히히히.”
천응은 몸을 일으켜 그의 충성스러운 회안의 마인 제갈청의 등에 업혔다.
그리고 용검문 쪽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 감으며 말했다.
“자, 나를 위해 조금 더 강해지라고, 애송이. 그땐 너도 내 걸로 만들어 줄 테니까.”
제갈청의 신형이 순식간에 앞으로 튀어 나가더니 점이 되어 사라졌다.
그들이 서 있던 산꼭대기엔 바람 소리만 요란했다.
* * *
“이봐요! 부상 입은 사람에게 무슨 짓이에요!”
“비켜라, 계집! 너도 무림공적이 되고 싶은 게냐!”
벽호의 외침에도 추연희는 굴하지 않았다.
그녀는 의식을 잃은 초운을 결박 중인 천검단원들에게 큰소리로 말했다.
“무인으로서 부끄럽지도 않나요! 의식 잃은 사람을 함부로 끌고 가려 하다니! 싸우면 이길 자신 없어서죠? 그렇죠?”
“무슨 소리! 우리는 천검단이다! 우리로 말할 거 같으면……!”
그때 벽호의 말을 막는 이가 있었다. 천검단의 검주 적운이었다.
“미안합니다, 소저. 하지만 우리로선 어쩔 수 없군요. 그가 만약 결백하다면 반천련에서도 선처할 것입니다.”
사실 천검단의 일차 목표는 이유 불문하고 검귀를 척살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적운은 그럴 수 없었다.
만약 검귀와 현천마녀의 싸움을 보지 않았다면, 아니, 괴뢰사와 검귀 간의 원한 관계를 보지 못했다면 명령대로 척살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처음으로 윗선의 명령에 의문을 표했다.
아무리 보아도 검귀는 소문의 악당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를 반천련에 데려가기로 마음먹었다.
공정한 조사를 받게 하기 위해서였다.
자신에게는 그가 공정한 조사를 받게 할 수 있는 인맥과 힘이 있었다.
자고로 적의 적은 동지라 했다.
만약 그의 무죄가 밝혀진다면 분명 반천련의 힘이 되어줄 것이다. 무인으로서의 질투는 별것 아니었다. 세상의 안정과 평화, 그리고 정의를 위해서라면 자존심 따윈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만큼 그는 초운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보았다.
“추 소저라 했지요? 너무 큰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내 직접 이자를 도울 것이니.”
“하지만…….”
그녀는 그리 말하는 적운이 미덥지 못했다.
다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을 뒤집어엎고 살려준 것이 바로 초운이다.
그런 그를 비겁하게 끌고 가려 하는 사람들에게 믿음이 갈 리가 없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곁에 있던 복염강이 말했다.
“나도 도울 것이니 너무 걱정 마시오. 상황이 이렇게 되었지만 검주는 믿을 만한 사람이고, 또 자신이 내뱉은 말은 목숨을 걸고 지켜내는 장부요.”
“그래도 믿을 수 없어요……. 이런 비겁한 행위를 하는 자들을 어떻게 믿겠어요.”
“…….”
검주인 적운도 그랬고, 부단주인 벽호를 비롯한 모든 천검단원들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언제나 정의를 부르짖는 외골수인 그들로서도 정정당당하지 못한 이런 행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그녀의 코앞에 한 자루의 검날이 불쑥 튀어나왔다.
“꺄악!”
“어, 어? 놀라셨습니까, 소저?”
“검을 코앞에 가져다 대면 어떡해요! 죽는 줄 알았잖아요.”
“미…… 미안합니다.”
추연희는 문득 적운에게서 초운의 모습을 보았다. 고수란 작자들은 왜 이리도 어리바리하단 말인가.
마음속으로 한숨을 내쉰 그녀가 그에게 물었다.
“검을 내민 건 무슨 의미죠?”
적운이 그녀의 손에 자신의 검을 쥐어주며 말했다.
“이 검은 사문에 대대로 내려오는 철영검입니다.”
“헉!”
“허헉!”
뒤편의 천검단 쪽에서 헛바람을 들이키는 소리가 전염병처럼 이어졌다.
적운이 다시 입을 열었다.
“십영십검의 전승자에게만 내려지는 검이지요.”
십영십검이란 이름에 추연희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강호에 뜻이 없는 추연희라 할지라도 십영십검의 이름 정도는 안다.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아홉 가지 검공 중 하나 아니던가.
그런 유명한 검공의 전승자에게만 전해진다는 검이라면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몰랐지만 그 검에는 한 가지 비밀이 숨어 있었다.
바로 십영십검의 수련법과 운용법에 관한 것이다.
물론 그것은 전승자들밖에 모르는 비밀이었고, 적운이 그녀에게 그것을 말해줄 의무는 없었다.
“이걸 내게 주는 건가요?”
“……맡겨 두는 것이오.”
“……아깝네요. 팔면 돈이 좀…….”
그녀의 혼잣말에 적운이 당황하였는지 헛기침을 했다.
“허험, 험.”
“……잘 간직할게요.”
그가 정색하며 본론을 꺼냈다.
“만약 검귀가 공정한 조사를 받지 못한다면, 그래서 그의 목숨이 위태로워진다면 내 조사님들의 얼이 담긴 그 철영검에 걸고 맹세컨대 그를 반드시 구해내겠소.”
이렇게까지 나오니 그녀도 별수 없었다.
게다가 계속 막는다 해도 소용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천검단의 정예였고, 자신은 감숙에서 조금 잘나가는 표국의 외동딸일 뿐이다.
이들이 이렇게나마 예의를 차리는 것도 기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작별 인사 정도는 할 수 있게 해주세요.”
“음……. 아직 깨어나지 못했습니다만.”
“그냥 하려는 거예요.”
적운이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대답을 대신했다.
그녀는 결박된 초운에게 다가가더니 자신의 소매를 찢어버렸다.
“이봐요. 이름도 안 알려주고 그냥 가다니 정말 끝까지 어리바리하군요.”
“…….”
그녀는 찢어진 소매에 침을 묻히더니 그의 얼굴에 묻은 피를 정성스레 닦아주었다. 그 모습은 마치 누나가 어린 동생을 챙겨 주는 듯했다.
“꼭 돌아와요. 당신이랑 할 말이 많으니까. 꼭 돌아와요. 내가 어디 있는 줄은 알겠죠?”
초운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그녀의 손이 멈췄다. 이젠 더 이상 닦아 줄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신은 정말 바보에다 어리바리하고 멍청하기까지 하지만…… 그래도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저는 그렇게 믿어요. 그러니…… 꼭 돌아오세요.”
“소저, 이만 끝내시죠.”
적운이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가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그때였다.
“……초…… 운.”
“응? 당신……! 당신! 깨어난 거예요?”
깜짝 놀란 추연희가 다시 허리를 숙이고 그를 흔들었다.
“으…… 으, 그만…… 좀…… 흔들어요. 또…… 기절하겠네…….”
“아, 미, 미안해요! 근데 좀 전에 뭐라 했죠? 초 뭐라고 한 거 같은데.”
초운이 그런 그녀를 향해 희미한 미소를 보여 주었다.
그녀는 순간 멍한 표정이 되었다. 그의 그런 미소를 본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말했다.
“내…… 이름이에요. 초운…….”
그녀의 얼굴에 환한 웃음꽃이 피었다. 문득 초운은 그 미소에서 매화를 보았다.
이젠 꿈에서만 볼 수 있는 화산.
육합구궁검을 어렵사리 풀어내고 큰대자로 누워 쉬던 어느 가을날.
저녁노을에 붉게 물든 매화 꽃잎은 하늘을 가득 채울 것처럼 온 세상을 뒤덮었다. 그녀의 미소는 바로 그때의 매화를 닮아 있었다.
이상하게도 악몽을 꿀 때와는 다르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초운 역시 그녀를 향해 웃어주었다.
“또 봐요.”
결국 그는 천검단과 함께 떠났다.
추연희는 그런 그들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지켜보았다.
그런 그녀를 복염강이 위로했다.
“너무 걱정 마시오.”
“……아저씨.”
그녀가 애처로운 눈빛으로 복염강을 바라보며 불렀다.
복염강은 이 소저가 정말 상심이 크구나 하는 안타까운 마음에 아저씨란 소리에도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말해 보시오, 소저. 이 복모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돕겠소.”
검귀를 잡은 것은 천검단이니 호송은 그들의 임무였다.
칠금인들은 이대로 반천련에 복귀를 하거나 강호를 떠돌아도 상관없었다
어떤 식으로든 성천궁과 반천련에 이득이 된다면 말이다. 그래서 그녀를 위해 작은 도움이라도 주고자 내뱉었던 말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천추의 한이 될 줄이야…….
귀가 쫑긋해진 그녀는 복염강 모르게 눈을 빛냈다. 다시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바라본 그녀가 두 손을 모으며 말했다.
“아저씨, 정말인가요? 정말 도와주실 건가요?”
“물론이오. 이 복모는 한 입으로 두말을 하지 않소.”
원하는 대답을 들었는지 그녀의 애처로운 눈빛이 능글맞은 웃음으로 교체되었다. 그것도 아주 순식간에.
생사를 오가는 강호 경험만 어언 이십 년. 복염강은 뭔가 불길한 미래를 예감하고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더니 양손을 입에 모아 큰 소리로 외쳤다.
“이것들 봐요! 짐은 무사한가요?”
“예에~ 아가씨! 쟁자수 양반들이 잘 숨겼습니다! 하나도 안 부서졌어요!”
“흐흐흐흐.”
그녀의 웃음소리가 복염강의 귀를 찔렀다. 그녀가 말했다.
“아저씨 분명 일구이언하지 않는다 했죠?”
“그…… 그렇소만.”
끈질기게 살아남은 표사들이 하나둘씩 그녀의 주변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그녀는 표사들이 다 모이자 득의의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향해 말했다.
“이봐요. 다들 이분 대협께 인사 올려요. 성천궁의 칠금인 알죠? 이분은 그 칠금인에서 가장 센 사람이에요. 그런 분이 우릴 해남도까지 데려다 주신대요!”
“커헉!”
복염강이 신음을 내뱉었다. 당했구나,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이었다. 그는 추연희를 만류하려 했다.
“소저…… 그건 좀…….”
“일구이언?”
“…….”
그녀의 한마디에 모두의 시선이 복염강에게로 향했다. 다들 말은 안 했지만 이렇게 묻는 것 같았다.
‘일구이언?’
결국 복염강은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이날 상운표국에 표행무사가 한 명 추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