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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향-93화 (93/217)

검향 93화

천검단원들은 더 이상 그녀를 뒤따르지 않았다.

전각의 잔해 아래에서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그녀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안 것이다.

언제 왔는지 잔해의 반대편에선 초운과 추연희도 서서 그녀의 최후를 지켜보고 있었다.

잔해의 꼭대기까지 겨우 기어간 사요는 자신의 오른팔이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

오른팔이 잘게 부서져 모래가 되어 흩날리는 데도 그녀는 그걸 황홀한 눈빛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였다.

“사요…… 사요…… 사요……!”

양팔이 없는 한 노인이 무릎으로 기다시피 하며 걸어오고 있었다.

팔의 절단면에서 피가 흘러나옴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팔을 지지대로 삼아 잔해의 언덕을 올랐다.

그는 용초국이었다.

그 뒤를 복염강과 칠금인들이 착잡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는 잔해의 언덕에 올라섰다. 겨우 지혈한 양 팔에선 다시 피가 흘러나왔다.

그는 멍하니 북쪽을 바라보는 사요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사요…… 내가 왔소.”

“……상공, 오셨군요.”

사요가 행복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답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의 몸은 모래처럼 잘게 흩날리는 중이었다.

“사요…….”

용초국은 그녀가 자신을 알아보는 듯하자 기뻐했다. 하지만 그 기쁨은 이내 사라지고 말았다.

“곽 상공…….”

사요가 부르는 것은 결코 자신이 아니었다. 용초국의 사랑이 진짜 사랑인 줄은 아무도 모른다.

그 자신조차 알 수 없다.

그는 마공에 의해 그녀의 노예가 되고 말았으니까.

반쪽짜리라도 마인인 이상 인성이 올바를 리 없다.

그가 자식들의 죽음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했던 것이 그 증거였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마인이 아니었다.

광기에 사로잡혀 있던 그의 눈빛도 어느 순간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가 팔꿈치밖에 남지 않은 팔로 그녀를 보듬어 안았다. 그가 흘린 피로 그녀의 하얗게 샌 머리가 붉게 물들었다.

그가 말했다.

“……그렇소, 내가 왔소.”

“아아…… 상공…… 나의 곽 상공…….”

그녀가 그를 보듬어 안았다. 하지만 안으려는 순간 남은 팔마저 부서지며 모래가 되었다.

이를 지켜보던 추연희가 안타까운 마음에 입을 가렸다.

초운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볼 뿐이었다.

사요는 사라진 자신의 양팔을 번갈아 바라보며 배시시 웃었다.

“곽 상공…… 저는 당신을 안아 드릴 수가 없네요…….”

“괜찮소. 함께 있으니까.”

그 말과 함께 그는 그녀를 더욱 힘주어 안았다.

그리고 마지막 힘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치직---! 치지지직---!

전각의 잔해는 대부분 나무로 이루어져 있다. 용초국이 일으킨 삼매진화는 그들을 중심으로 천천히 타오르기 시작했다.

“어? 어! 검주! 저건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벽호가 깜짝 놀라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하지만 적운은 그런 그를 저지하며 말했다.

“저대로 두어라.”

“하지만…… 이것 봐요, 복씨! 당신의 임무는 살아 있는 마인을 데려가는 것이 아니오?”

벽호가 복염강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복염강 또한 말없이 그들을 지켜볼 뿐이었다.

칠금인과 천검단. 이 두 곳의 수장이 아무 말도 없자 벽호도 더 이상 나설 수 없었다. 그런 그의 어깨를 도도문의 장로 성수가 토닥였다.

잔해를 중심으로 그들의 몸이 점점 타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둘 중 어느 누구도 아파하지 않았다.

비록 그녀가 생각하는 것은 저 북쪽에 있을 누군가였지만 용초국은 그것만으로도 족했다.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도 좋았다. 자신이 사랑하면 되니까. 그녀와 함께할 수 있다면 지옥이라도 좋았다.

삼매진화의 불길이 그의 피와 살을 태웠다. 고통 속에서도 그는 지극히 행복했다. 마지막 순간 그녀는 자신의 품 안에 있다.

그는 그녀를 더욱더 꼭 안았다. 그녀의 몸이 열기에, 그리고 자신의 힘에 의해 부서지고 있었다.

탁, 탁, 타탁!

열기에 의해 불꽃이 튀는 소리가 사람들의 귀를 시끄럽게 했다.

삼매진화의 불길은 겨우 일각여의 시간 동안 타올랐을 뿐이다.

이것은 인간이 만들어 낸 가장 순수한 열화로 시전자가 죽어버린다면 그리 오래가지 않아 사라진다.

불길이 사그라지자 남은 것은 재로 변해 버린 두 남녀의 시신뿐이었다.

“왜 다들 감상적이 된 건지 모르겠네. 그래 봤자 인간을 고깃덩이 취급하는 마인 둘이 죽었을 뿐인데 말이야.”

누군가 말했다. 정확히는 한 소년이었다.

그는 천검단과 칠금인 사이에 턱을 괴고 쪼그려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회색의 눈동자를 가진 사내가 서 있었다.

“너는…… 누구지?”

적운이 놀란 마음을 애써 감추며 물었다.

소년이 그런 그를 향해 씩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답하려 했다. 하지만 소년을 대신해 소년의 이름을 불러 주는 이가 있었다.

“천응!”

엄청난 살기와 함께 무시무시한 검격이 소년의 정수리로 떨어졌다.

챙---!

회색 눈동자를 지닌 사내. 회안마인 제갈청의 팔이 검격을 막아 냈다. 그것도 아주 간단히.

천응이란 이름의 소년이 자신을 향해 검을 날린 청년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정말 오랜만이네, 초운.”

“천응…….”

검을 거두고 뒤로 물러난 초운이 소년의 이름을 다시 한 번 입에 올렸다.

이에 주변인들의 얼굴이 모두 사색이 되었다. 천응이라는 이름의 무게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천상련의 구대호법신장 중 하나이자 괴뢰사(傀儡士)라 불리는 마인(魔人).

천상련과 반천련 간의 전선에서 희대의 괴뢰술로 반천련의 고수들을 농락한 괴물이 지금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초운의 얼굴이 악귀처럼 변해 갔다. 잊으려 했던 살기가, 버리려 했던 살의들이 다시 한 번 몸 밖으로 뻗어 나오기 시작했다.

八章

“잘 봐. 저 사람들은 너 때문에 죽는 거야.”

“…….”

“애당초 네가 저 황현이라는 녀석과의 ‘약속’을 지켰다면 녀석이 저런 괴물이 되었을까? 킥.”

삼 년 전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고 있었다. 그 덕에 초운이 애써 지우려 한 살기가 다시 피어올랐고, 이는 그가 만든 살검을 다시 되살리고 말았다.

추연희는 그런 그의 모습을 생소한 듯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대체 눈앞의 저 소년과 무슨 원한이 있기에, 저 어리바리한 순둥이가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녀는 그저 그 생각뿐이었다.

쪼그려 앉아 있던 천응이 일어서더니 아직 불길이 조금 남아 있는 전각의 잔해에 올라섰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를 제지하지 못했다. 회안의 마인이 내뿜는 살기가 그들을 옭아매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응이 무서운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저 회안의 마인 이었다.

초혈마공을 연성한 꼭두각시.

마인답게 무(武)에 대한 경지는 일류고수 정도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힘과 속도, 내공 등은 앞서 현천마녀 사요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절대고수에 필적한다.

구대호법신장 급인 것이다.

게다가 마인들은 하나같이 부족한 경지를 보충할 만한 괴이한 특성이나 기술들을 가지고 있다.

현천마녀 사요가 머리카락을 칼이나 암기처럼 조종하고, 모든 것을 얼어붙게 만드는 소수마공을 익혔듯 초혈마공의 제갈청은 피를 매개로 한 특별한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술에는 반천련을 대표하는 고수들인 천중팔성들도 고전했다.

천응은 그런 무서운 마인을 조종하는 것도 모자라 절정고수 하나를 눈 깜짝할 사이에 실혼인으로 만들어 버린다.

하나도 상대하기 까다로운 판에 이 둘이 모이면 무적이나 다름없었다.

현천마녀는 차라리 편했다. 무지막지한 내공과 소수마공을 지니고 있었지만 어쨌든 홀로 행동하니까.

그러나 천응과 제갈청은 늘 붙어 다닌다.

‘저 괴물을 상대하려면 천중팔성 중 하나가 있어야 한다.’

그리 생각한 적운은 분한지 입술을 깨물었다.

순수하게 무공으로만 겨룬다면 저 정도 마인은 빠르고 힘만 센 일류고수에 불과했다.

무공뿐이라면 적운 혼자서라도 상대할 수 있다.

하지만 마인에겐 무공이 다가 아니니 문제다.

그래서 현천마녀를 상대할 때도 검진의 도움을 받으려 한 것이다.

그런데다 천응은 자신과 같은 절정고수를 마음대로 조종하는 괴이한 기술을 사용한다.

마음만 먹으면 천검단과 칠금인들을 서로 죽이게끔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아무래도 상성이 맞지 않았다.

사요와 용초국, 두 시신 앞에 선 천응은 한참을 바라보더니 피식 웃었다.

그리고…….

퍼석---!

그의 발길질 한 번에 두 시신은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사요를 살리지 못했으니 ‘마정의 씨앗’이라도 가져가야 덜 혼나겠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천응이 맨손으로 시신의 재를 뒤적였다.

그러자 검은 구슬이 하나 나왔다.

“흠. 많이 작아졌네.”

낮은 한숨을 쉰 그는 소매 안에 구슬을 집어넣고 주변을 넓게 둘러보았다.

많은 이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가득했다.

마음만 먹는다면 손 한 번 까딱하는 것만으로 이들을 조종하여 서로 양패구상시킬 수 있다.

오랜만에 피가 보고 싶어졌다. 어려 보이긴 하나 그 역시 수십 년을 살아온 마인.

결코 정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살육의 본능으로 들끓던 피가 다시 차가워진 건 그의 시선이 초운에게 멈추어 섰을 때였다.

‘아니지, 아니야. 신마께 미움 받으면 곤란하지.’

사실 미움 받더라도 상관은 없다.

오히려 그것조차 즐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미움 받는 것에 대해 예전부터 궁금해했었으니까.

하지만 미움을 넘어선 분노까지 받아 내야 한다면 곤란했다.

어쩌면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고통에 익숙한 마인조차 견디기 힘든 고통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애송이, 조금은 강해진 것 같네. 하지만 네 사형을 저승으로 돌려보내는 건 아직 무리라는 건 알고 있겠지? 자전(紫電)의 힘을 완성한 그는 나조차도 모르는 기술을 쓴다고. 위험해, 아주 위험해.”

초운은 대답 대신 이를 갈았다. 황현과의 이별이 떠오른 탓이다.

그리고 눈앞에 그와의 강력한 접점이 나타났다. 사형을 데려갔던 마인이 직접 나타난 것이다.

초운은 그를 향해 검을 겨누며 말했다.

“지금 나를 죽이지 않으면 후회할 거야.”

“뭐……?”

반문하던 천응이 비웃기 시작했다.

“아하…… 아하하하, 하하하하하하!”

눈물까지 찔끔 흘리며 웃던 그가 돌연 웃음을 멈추고 말했다.

“후회…… 라?”

그가 입을 엶과 동시에 아주 엷은 파공음이 초운의 귀를 찔렀다. 위기를 느끼고 급히 피해 보았지만 이미 늦었다.

휘리릭-!

금색의 기(氣)로 만들어진 실(絲).

고도로 압축되어 유형화된 이 실은 초운의 몸을 꽁꽁 묶어 허공에 띄웠다.

실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면 다들 초운이 허공에 홀로 몸을 띄운 줄 알았을 것이다.

초운은 움직일 수 없었다. 마치 상대방의 꼭두각시라도 된 것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천응이 그런 그를 향해 말했다.

“지금도 후회 중이야. 나의 괴뢰술에 이렇게까지 저항하는 것만 봐도 그렇고. 보통은 완전히 꼭두각시가 되어버리는데 넌 그저 묶어 두는 게 다란 말이지.”

“그…… 러니…… 지. 금…… 죽여……!”

초운은 천응의 금제에서 벗어나려 애썼다. 하지만 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

천응은 갈등하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저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딱-!

하는 소리와 함께 초운이 땅에 떨어지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역시 안 되겠어. 사요도 못 살렸는데 너를 죽이기까지 하면 신마께서 굉장히 화를 내실 거 같아.”

그 말과 함께 천응은 등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회안의 마인이 자연스레 뒤따랐다.

“이놈!”

초운이 처로를 들어 무턱대고 살검을 펼쳤다.

그가 새롭게 정리한 십사수매화검과 이십사수매화검의 연환이 무섭게 터져 나왔다.

따다다다다당-!

천응의 일 장 앞에서 불꽃이 튀었다. 바로 회안마인이었다. 그의 양손은 뭘로 만들었는지 초운의 유형화된 검기를 모조리 막아 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도 기본은 사람인지라 피부가 베이며 피가 흘러나왔다.

순간 제갈청의 붉은 피가 허공으로 튀더니 초운의 검에 닿았다. 회안마인의 회색 눈이 맑게 빛났다.

쩡-!

엄청난 충격이 초운의 검신을 때렸다. 아니, 그것은 폭발이었다.

그 충격으로 초운은 무려 칠 장이나 날아가서 용검문의 남아 있는 벽에 박혔다.

“쿨럭!”

피를 한 사발이나 토해 낸 그가 벽에서 튀어나와 다시 오행매화보를 펼치려 했다.

하지만 천응과 회안마인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제길……!”

허탈한 마음 때문이었을까. 초운은 한쪽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아 버렸다. 그리고 곧 의식을 잃었다.

희미한 시야에 추연희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다시 눈앞이 깜깜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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