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향 92화
초운의 몸은 성한 곳이 없었다.
압력에 의해 피부가 터져 나가고 그 와중에 서리가 일어나 그의 몸을 때렸다.
전신이 찢어질 듯한 고통이 호흡마다 찾아왔다.
그 와중에 어린 시절 사부의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못난 놈! 내 그리 가르쳤더냐!”
“헤헤헤.”
자연히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저 마녀 또한 미소 짓고 있었다.
특이하게도 처음 대면했을 때와는 다른 진짜 미소 같았다.
이제 남은 거리는 이 장여.
처로의 길이까지 생각한다면 이제 남은 거리는 약 다섯 발자국 정도였다.
그 거리가 지나면 마녀는 확실히 죽는다.
파리 한 마리 죽이지 못하던 소년은 이제 청년이 되어 사람의 목숨을 거둔다.
사부가 자신을 본다면 용서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화산의 제자로서 수많은 살인을 저질렀다.
비록 무림공적이 되어 쫓기면서 저지른 일이었지만 평생 그 죄악에서 벗어나긴 힘들 것이다.
다시 한 발짝.
그는 마녀와 눈이 마주쳤다. 무척 아름다운 눈동자였다. 그녀는 지금 뭔가에 대해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방해받고 싶지 않은 듯했다.
다시 한 발짝 다가갔다.
이번엔 그녀의 냉기가 아닌 압룡진의 검기가 그를 베었다.
압룡진 자체가 마녀를 상대하고 있었으니.... 당연한 얘기지만 그녀에 가까워질수록 쉽게 표적이 된다.
하지만 초운은 개의치 않았다.
다시 한 발을 떼었다.
정신이 몽롱했다.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어려웠다.
검을 든 자신은 더 이상 청년이 아니었다.
사부에게 검을 배우던 작은 소년이었다.
푸른 도포를 입은 사부가 환영이 되어 곁에 섰다.
그가 자신에게 이십사수매화검을 처음 보여 주던 날인 듯했다.
사부가 자신의 옆에서 검을 펼치기 시작했다.
도도히 흐르는 강물.
처음 본 이십사수매화검은 강물을 연상시켰다.
초운은 자기도 모르게 환영 속 사부를 따라 이십사수매화검을 펼쳤다.
어린 자신의 검은 바람과 만나 질풍이 되었고, 사부의 검(劍)은 그림자를 먹고 어둠이 되었다.
그날의 기억이 맞는 걸까?
사부는 분명 저런 검을 펼치지 않았다.
환영 속 사부가 펼치는 것은 십사수매화검도, 이십사수매화검도 아니었다.
자신의 몸이 점점 커졌다.
사부의 몸은 점점 작아졌다.
사부의 검 놀림을 따라 다시 움직였다.
어느덧 마녀나 압룡진은 남의 얘기가 되어 있었다.
그를 지켜보던 적운의 눈에 경탄의 빛이 떠올랐다.
“움직인다……. 압력을 벗어났어…….”
초운은 자신이 이미 3년 전에 깨우쳐 놓고도 잊고 있던 것을 깨달았다. 환영으로 나타난 사부는 그것을 알려 주고 싶었던 것 같았다.
변화의 중심에서 근원이 된다.
거대한 기운이 산재한 이 검진에 갇혔다 하더라도 결국 스스로를 변화의 근원으로 만든다면 어떤 힘에도 굴할 필요가 없다.
마녀 사요는, 사요라는 이름의 촛불이 다 되었음을 알았다. 그러나 스스로 꺼지고 싶진 않았다.
마지막까지 맹렬히 타오르고 싶었다. 만약 사그라진다면 그것은 나 스스로가 아닌 타인에 의해서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초운은 딱 적당한 상대였다.
그녀의 소수가 초운에게로 향했다.
삼 년여 간 후회 속에서 살의를 갈고 닦았다.
더 이상 망설임과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 도문의 검을 살검으로 바꿨다.
그건 잘못된 길이었다.
잘못된 길이기에 환영 속의 사부는 자신을 꾸짖는 것이다. 그것을 깨닫자 환영 속의 사부는 더 이상 사부가 아니었다.
자기 자신이었다.
초운이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처로, 네가 내게 말을 걸었구나. 가르쳐 주었구나.”
초운은 자기가 다시 검의 목소리를 들었음을 알았다.
조금, 아주 조금이지만 알 것 같았다.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못할 것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자신감도 없었다.
그저 검을 풀어 낼 뿐이다. 그의 손끝에서 매화검류의 오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칠절매화검류(七絶梅花劍流).
이식(二式).
향류천리(香流千里).
진한 매화향이 마녀 사요를 감싸고 천검단원들을 감쌌다.
파괴의 기운을 틀어막아 주던 압룡진이 그 껍질을 깨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파괴는 없었다.
향류천리의 부드러운 기운이 현천마녀와 천검단원 사이의 기운을 모조리 중화시켜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의 검 끝에 말려든 기운은 나선의 용오름이 되어 하늘로 빨려들듯 올라갔다.
적운도, 그리고 천검단도, 현천마녀 사요도 그 모습을 그저 멍한 얼굴로 지켜볼 뿐이었다.
변화의 극에 이른 환검의 오의.
설사 수십 년 전 명맥이 끊긴 전설의 매화검수들조차 칠절매화검의 향류천리로 이런 용오름을 피워 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렇듯 초운의 매화검은 화산의 기나긴 역사 속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향기를 피어내기 시작했다.
압룡진에 모여 있던 파괴적인 기운들이 하늘에 닿는 거대한 용오름으로 화해 사라져 버린 것을 많은 사람들이 보았다.
이는 오늘 벌어진 혈사보다 더 유명해져 중원 만 리에 퍼져 나갈 것이다.
이런 대단한 일을 벌인 장본인.
초운은 그저 멍하니 서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순간으로 절대의 경지에 들어서느냐 마느냐 하는 갈림길과도 같았다.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천검단원은 그를 막아야 한다.
하지만 조금 전의 용오름을 보고난 뒤였는지라 어느 누구도 초운을 방해해야겠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심지어 검주인 적운까지 그러했다.
초운은 잡힐 듯 잡히지 않던 실마리를 발견하자 가슴이 떨렸다. 그러나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순간적인 각성이라 반쯤 잃어버렸지만 그 반이라 할지라도 중요했다.
대오각성을 하는 자일지라도 깨달은 것들을 모두 다 얻는 경우는 없다.
하지만 일 푼이라도 더 얻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방해받지 않는 게 제일 중요했다.
마음속 후회들이 조금씩 희석되고 있었다.
그러나 살의는 그대로였다.
이것을 지우지 않는 한 다시 칠절매화검에 이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살의를 지우는 것은 완벽한 관조가 가능한 지금 뿐이었다. 웬일인지 사방의 적들도 그를 방해하지 않으니 아주 적기였다.
그러나 각성의 인연이 그리 쉽게 오는 것은 아니었다.
“어리바리!”
누군가의 뾰족한 외침이 초운의 심사를 어지럽혔다. 그래도 아직은 참을 만했다.
그러나 그 이후가 문제였다. 한 여인이 초운의 귓가에 대고 고막이 터져라 외친 것이다.
“이. 봐. 요!”
“억!”
초운은 정말이지 태어나서 지금까지 타인에게 짜증을 부려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짜증이 울컥 솟아났다.
그는 자신을 부른 여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짜증은 도로 들어갔다.
바로 죽은 줄 알았던 그녀. 추연희가 멀쩡한 모습으로 살아 돌아온 것이다.
“왜? 또 어리바리라 부르니까 짜증 나요?”
그녀는 과연 알까? 절대고수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자기 대신 발로 뻥 차 줬다는 걸.
하지만 아쉽지 않았다.
길을 알기 때문이었다. 방향을 잘못 잡았을 뿐, 길이 올바르다면 다시 못 갈 것도 없었다.
초운은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손목을 잡고 끌어당겼다.
“어머……?”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눈을 굴렸다.
너무 놀라 당황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사내에게 손목을 잡힌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살아 있어 줘서 고맙습니다.”
“그, 그래요.”
그녀는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했다. 그러나 둘 사이의 어색함은 이내 깨지고 말았다.
“멈추어라!”
초운이 돌아보니 천검단의 검주인 적운과 나머지 단원들이 한 여인을 둘러싸고 있는 중이었다.
잠깐 동안 머리가 하얗게 새어버린 그녀는 바로 사요였다.
이미 모든 마기를 소모했고 마공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마정의 핵까지 깨졌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의 힘없는 발걸음에 맞춰 천검단도 함께 움직였다. 그들에겐 검귀를 잡을 여력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나마 힘이 다 떨어진 마녀라도 잡아야겠는데, 그녀가 정말 이빨이 빠진 독사인지는 어느 누구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아무도 섣불리 달려들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성질이 불같은 천검단의 부단주, 벽호가 나섰다.
“네 이년!”
퍽---!
혹시나 해서 주먹에 진기를 거의 실지 않았다. 그런데도 마녀 사요는 힘없이 쓰러졌다. 벽호가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사요는 어딜 그리 가고픈지 다시 힘겹게 일어서더니 걸음을 옮겼다.
이미 그녀의 아름답던 피부 곳곳에서 균열이 일어나고 있었다. 마공의 부작용이랄까.
몸이 조금씩 석화되어 바스라지고 있는 것이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몸을 스쳐 지나갔다.
하얗고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에 따라 그녀의 몸이 부서지며 흘러나온 모래도 함께 날렸다.
한 인간이 죽어 가고 있음에도 그 모습은 너무도 아름다워 모든 이들을 도취시켰다.
벽호나 천검단도 그녀에게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는지 더 이상 핍박하지는 않았다.
“으으으…… 으아아아아!”
“으윽! 가만히 있으시오!”
용초국을 잡고 있던 칠금인 중 하나가 당황하며 외쳤다.
복염강은 천검단에 둘러싸여 점점 스러져 가는 사요의 모습을 착잡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다가 용초국의 난동에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인가.”
“이자가…… 자꾸 도망치려 합니다.”
마공과 마인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해 온 성천궁은 마인의 마기를 잠시나마 억누를 수 있는 포승줄을 개발했다.
그것의 이름은 마금사(魔禁絲)로, 지금 용초국의 상반신을 꽁꽁 묶어 놓은 은색의 가느다란 줄이기도 했다.
복염강은 용초국과 사요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곧 씁쓸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풀어주게.”
“네? 그게 무슨……!”
“반쪽짜리 마인이라 힘도 없지 않은가. 잠시 동안 풀어주게. 작별 인사 정도는 하게 해 줘야지…….”
그러자 칠금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가 용초국의 몸에 묶인 마금사를 풀어주자 용초국은 사요를 향해 나는 듯이 달렸다.
얼마 전 초운에 의해 양팔이 잘려 나간 데다 출혈이 심했기에 기운도 거의 없을 텐데 그는 매우 재빨랐다.
그러나 불과 이십여 장의 거리임에도 넘어지고 일어서길 수십 번. 급기야 나중에는 무릎으로 기어서 갈 정도였다.
사요는 그가 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북쪽을 향해 걷고 또 걸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녀로 인해 폐허가 되어버린 용검문의 전각 한 귀퉁이에서 멈추어 섰다.
전각 또한 기둥 몇 개만이 남아 있을 뿐 나머지는 나뭇조각이나 다름없는 잔해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작은 동산과도 같이 쌓여 있었으니 쓰레기장이 따로 없었다.
일부러 멈추려 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가려던 길에 전각의 잔해가 있었을 뿐이다.
장애물이 생기자 그녀는 더 이상 걷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모래가 허물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왼쪽 다리가 잘게 부서져 나갔으니 더 이상 걷는 것은 무리였다.
그런데도 그녀는 그 잔해의 동산을 넘으려 했다. 기어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