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향 89화
“왜 이런 짓을 벌였지? 내가 검귀인 것을 모두가 알고 있던데……. 나를 목표로 삼았다면 굳이 이런 번거로운 짓은 하지 않아도 되었을 터…….”
초운의 물음에 그녀는 싱그러운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이곳에서 내가 한 일들은 모두 개인적인 취미이자 수련의 일환이었어. 기왕 일 하는 거 즐겁게 하는 게 좋지 않을까? 그리고…….”
사요는 말끝을 흐렸다. 대신 뱀처럼 차가운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음…….”
살기가 소낙비처럼 온몸을 적시는 듯했다. 초운은 자하기를 다스려 그녀의 살기에서 벗어났다.
그녀가 다시 말했다.
“난 널 죽이고 싶었거든.”
“날 죽이는 게 목적 아니었나?”
“설마? 그랬다간 ‘그’에게 혼나는걸.”
“그?”
초운이 되묻자 그녀가 눈웃음을 지어주며 답했다.
“너를 아주 사랑하는 분이시지.”
그녀가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지난 삼 년여 간 자신을 포기하지 않은 것은 반천련뿐만이 아니었다.
천상련, 그리고 그곳의 호법신장인 곽호.
지금처럼 수준 높은 마인을 보낸 것은 처음이었지만 그래도 언제나 자신의 행적을 쫓아 마인들을 보내 왔다.
그리고 초운은 그런 마인들을 모두 도륙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초운이 검을 들자 사요는 귀엽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머, 네가 날 이길 수 있을 것 같니?”
초운이 고개를 저었다.
“난 이기려는 게 아니다. 죽이려는 것이지.”
초운의 말에 그녀의 미소는 더욱더 진해졌다.
바람도 없는데 그녀의 머리카락이 하늘하늘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샤아아아악!
초운과 그녀의 거리는 얼핏 봐도 오 장여에 달했다. 헌데 그녀의 머리카락이 엄청나게 길어지더니 순식간에 오 장여 거리를 좁혀 초운에게로 향했다.
이 갑작스럽고도 괴이하기 그지없는 공격에 초운은 대경실색하며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머리카락은 계속해서 쫓아오고 있었다.
칠 장, 구 장, 십이 장, 십오 장…….
그래도 기세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고 계속 물러난다 해도 그만큼 더 늘어날 것 같았다.
초운은 머리카락에서 심상치 않은 기세를 느끼고 용초국의 장력에 의해 부서진 전각의 잔해 뒤편으로 숨었다.
잔해뿐이라 해도 이층 높이라서 초운의 몸을 숨겨 주기엔 충분했다.
하지만 머리카락의 주인은 전각의 잔해 따윈 안중에도 두지 않는 듯했다.
파파파파팍-!
이층 남은 건물이 날카로운 검에 잘린 것처럼 그대로 썰려 나갔다. 재빨리 주저앉지 않았다면 초운의 운명 또한 마찬가지였으리라.
그런 그를 향해 멀리서 그녀가 말했다.
“죽이진 않을게. 그분의 명령이 확고하니까. 하지만 팔다리 자르지 말라는 소리는 안 하셨으니까.”
머리카락은 아홉 가닥으로 나뉘며 계속해서 초운을 핍박했다.
파팍-! 파파팍-!
머리카락에 걸리는 모든 것은 잘려 나가거나 박살이 났다.
일 각 이상 이곳저곳 피해 다니다 보니 이젠 용검문이 있던 장원의 형상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피해는 근처에 있던 민가에까지 이어지는 중이었다.
상운표국의 표사들이 근처 민가의 주민들을 대피시키긴 했지만 늦은 감이 있었다.
안타깝게도 거리 곳곳에는 그녀의 머리카락에 몸통이 동강난 시신들이 널려 있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백 명이 넘는 양민들이 죽어 나갔으나 초운은 동요하지 않았다.
아니, 적어도 표정만은 침착해 보였다.
‘나 때문에 사람들이…… 아니! 아니다! 후회는 나중에 해도 돼. 지금은 저 마녀를 죽여야 한다.’
초운은 검기를 이용해 머리카락을 잘라 버리기로 했다.
매화검류(梅花劍流).
십사수매화검(十四手梅花劍).
제십식(第十式).
칠매쟁수(七梅爭秀).
초운이 매화검류라는 이름으로 재정립한 십사수와 이십사수매화검. 그중 십사수의 열 번째 식이 처음으로 이 세상에 선을 보인다.
이젠 검에서 흘러나오는 매화향이 좀 더 자연스러웠다.
초운의 매화검이 기존의 화산매화검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살상력.
일곱 송이의 매화검기가 투명하게 피어나 마녀의 머리카락을 찢어발겼다.
초운은 찢겨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뒤로하고 그녀를 향해 천천히 다가가고 있었다.
십오 장, 팔 장, 삼 장, 이 장…….
이윽고 일 장 앞까지 다가가게 되자 초운은 살의를 더 크게 일으켰다. 그러나 이상한 위화감에 그녀를 바라보았다.
주 무기라 할 수 있는 머리카락의 대부분을 잃었음에도 그녀의 얼굴에선 여유가 가득했다.
“뭐…… 지?”
순간 섬뜩한 기운이 등 뒤로 다가왔다.
초운은 급히 자신이 현재 가능한 최고의 몸놀림으로 허공을 향해 솟구쳤다.
그러자 그가 찢어발겼다고 생각한 머리카락들이 가느다란 장침으로 변하여 초운이 서 있던 자리의 발치에 박혔다.
초운이 높은 곳에서 바라보니 그의 매화검법에 당한 모든 머리카락이 허공에서 그녀를 빙빙 돌며 지키고 있었다.
바닥에 내려온 초운이 그녀를 향해 말했다.
“애초에 자기 머리카락이 아니었군.”
“그래. 몇 년에 걸쳐 모은 기념품 같은 거야.”
초운은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았다. 아마도 자신이 살해한 이들의 머리카락을 모았다는 뜻이리라.
“아, 맞아. 이 머리카락 중에는 네가 그리워하는 사람의 것도 있을 거야.”
순간 초운의 몸이 일시적으로 굳었다. 사요가 히죽거리며 말을 이었다.
“아마 그 아이의 이름이 추연희였던가?”
였던가, 라고 하는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니, 끝나기도 전에 초운이 무서운 눈빛으로 달려들었다.
그녀는 황급히 머리카락을 날려 그를 공격했다.
머리카락으로 만들어진 장침이 그의 왼쪽 어깨를 꿰뚫고 여전히 긴 머리카락은 그의 목을 자르려 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오직 살의로 가득 찬 눈빛으로 그녀를 향해 검초를 펼쳤다.
그녀는 초운이 점점 강해지자 더 이상 노는 기분으로 임할 수 없었다.
순간적으로 그에게 추연희라는 이름을 꺼낸 것을 후회할 정도였다.
사요는 무려 삼십 장을 넘게 후퇴해야 했다.
초운은 눈앞을 가로막는 것을 닥치는 대로 베며 민가의 건물을 관통했다.
그녀는 그런 초운을 막기 위해 내공으로 머리카락을 더욱 날카롭게 만들어 쉴 새 없이 공격했다.
부서진 벽을 뚫고 머리에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초운이 튀어나오고 그 뒤를 따라 사요가 나온다.
서로 순서가 뒤바뀌는 경우도 많았다.
초운은 분노하고 있으나 머릿속은 지극히 차가웠다.
그녀를 쉴 새 없이 몰아붙이면서도 어떻게든 승기를 완전히 잡아낼 궁리를 하고 있었다.
몸에 상처가 쌓이고 선지피가 후드득 떨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추연희 그녀가 겪었을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 생각한 것이다.
“왜! 대체 왜 사람들을 죽이는 거냐! 너희 마인들은 사람 목숨을 뭐라 생각하는 거야!”
분노한 그가 절규하듯 외쳤다.
검 끝에서 진한 매화향이 쉴 새 없이 피어 나오고 사방은 그가 일으킨 검기로 돌가루가 튀었다.
그러나 그 돌가루마저 그의 검기에 조각났다.
그녀가 머리카락들을 이용해 그의 검기를 일일이 다 막아내며 말했다.
“그저 공포에 질린 인간들의 얼굴이 보고 싶을 뿐이야. 그게 아니면 난 살아 있다 느낄 수 없거든.”
그녀는 어떠한 경우에도 타인에게 공감하지 못했다. 때문에 자신의 이러한 마음을 남이 이해 못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겨우 네 만족을 위해 타인을 제물로 삼았단 말이냐?”
초운은 과거 곽호가 자신에게 행했던 일들이 떠올라 더욱더 분노했다.
평소 타인과의 관계에 선을 긋고 회피하던 그였으나, 사람을 가장 그리워하는 것도 그였다.
이젠 꿈속에서밖에 볼 수 없는 화산에서 그는 사랑을 배웠다.
그래서 그는 그런 사랑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을, 인간을 아꼈다.
그런 그였으니 자신에게 끝없이 다가와 준 추연희의 흉사에 분노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이미 반경 오십 장 안에는 양민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만한 소동, 아니, 재앙이 벌어지고 있는데, 집 안에 있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초운은 저 마녀를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모든 기량을 동원하여 철저하게 죽일 생각이었다.
그때 사요가 그를 향해 말했다.
“왜…… 그녀가 죽었다고 하니? 옛날 생각이 나기라도 해? 너 때문에 어린 사제들이 죽었던 그 일 말이야.”
뿌드득-!
처로를 쥔 손에 자기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너는 약해. 너무도 약해. 왜 자기 자신이 아닌 타인을 사랑하지? 왜 남의 죽음에 분노해? 왜 남의 슬픔에 아파해? …… 왜 신마께선 나보다 너 같은 걸 더 사랑하시는 거지?”
“…….”
스스로 신마라는 이름을 되뇌던 그녀의 안색이 처음으로 변했다. 냉혹한 얼굴을 한 그녀가 초운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괴물은 괴물과 살아야 해. 그러니 나랑 함께 가. 만약 이 손을 잡지 않으면 난 널 죽여 버릴 거야.”
“……난 괴물이 아니야.”
“신마께선 널 괴물이라 하셨어. 그러니 내 손을 잡아.”
초운은 대답 대신 검에서 유형화된 자색의 검기를 피워 올렸다.
그녀가 내밀었던 손을 조용히 거두며 말했다.
“이젠…… 널 죽이겠어. 신마께서도 내 노력을 이해해 주실 거야.”
스스로는 타인을 이해 못하면서 신마 곽호만큼은 자신을 이해해줄 거라 믿는 그녀는 다시 가식적인 미소를 지었다.
장침으로 화해 그녀의 주변을 소용돌이치듯 휘돌던 머리카락들이 하나둘씩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모든 머리카락이 바닥에 떨어지자 그녀는 양손을 강시처럼 쭉 뻗었다.
그러자 그녀의 양손이 투명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초운은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러나 강호 경험이 많은 사람이라면 그것이 전설 속의 소수마공(素手魔功)임을 알 것이다.
오랜 옛날 북해빙궁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북해빙궁의 빙령(氷靈)이 없다면 어린 소녀에게서 강력한 순음지기를 빨아들여야만 연성할 수 있다는 저주받은 마공.
이것은 음양화합을 통해 인간의 정기를 흡수하여 공력을 높이는 음양환희대법과 함께 그녀가 익힌 두 가지 마공 중 하나였다.
음양환희대법은 이 소수마공을 연성하기 위한 도구였다.
그녀가 머리카락으로 상대를 공격하는 것 또한 막대한 내공으로 상대를 압도하기 위해 만든 응용에 불과했지 무공이라 부르긴 어려웠다.
그러나 지금 그녀가 보여 주는 소수마공은 상승의 무공에 맞먹는 고절한 마공.
사요는 지금까지 초운을 봐주면서 싸워 온 것이다.
살아 꿈틀대던 그녀의 머리카락도 잠잠해졌다.
모든 공력을 양손에 모았기 때문이다.
지직…… 지지직.
그녀의 두 손은 스스로 하얀빛을 내며 주변 공기를 얼어붙게 했다.
자기 손을 들여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사요가 초운에게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죽어…….”
빙혼수(氷魂手).
그녀가 왼손을 한 번 휘두르자 스스로 밟고 있던 땅을 시작으로 일직선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초운은 황급히 피했으나 소매 끝이 얼어붙으며 부서졌다.
“무서운 냉기.”
기련산의 겨울 날씨보다 더 추울 것 같았다. 아니, 추운 걸로는 끝나지 않으리라. 피와 살이 얼어붙고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빙마해(氷魔海).
그녀가 오른손을 휘둘렀다. 좌에서 우로 가볍게 휘둘렀을 뿐이건만 해일과도 같은 냉기가 흘러나왔다. 그러자 그녀를 중심으로 넓은 부채꼴 모양의 빙지(氷地)가 생겨났다.
뚫고 들어갈 방법이 없었다. 사정거리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얼어붙을 것이고 운 좋게 피하더라도 냉기가 심맥을 얼어붙게 하는 것은 피할 수 없을 테니까.
초운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였다.
사요의 뒤편에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천검(天劍)!”
단 한마디였으나 목소리에서 어마어마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에 화답하듯 또 어딘가에서 수십의 인원이 동시에 외쳤다.
“참악(斬惡)!”
초운에게 있어서 이 같은 구호는 낯선 것이 아니었다. 이미 몇 차례 들어 적도 있었다.
그가 긴장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천검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