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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향-84화 (84/217)

검향 84화

초운은 용검문에 들어설 때부터 괴이한 기운을 느꼈다.

분명 처음 느껴 보는 낯선 기운이었지만 예전부터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은 익숙함이 혼재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기운은 결코 선한 것이 아니었다.

자하신공이 만든 선기(仙氣)가 불쾌함에 흔들릴 정도였으니까.

해고령에서 혈월이란 자를 만날 때도 이렇지는 않았다. 이는 곧 순리에 역행하는 기운이 용검문 전체에 드리워져 있음을 뜻했다.

그렇다는 것은…….

“마기(魔氣)…… 인가?”

그가 중얼거리자 옆에서 있던 호무영이 그에게 말했다.

“방금 뭐라 했는가?”

“아닙니다. 그냥 혼잣말이었습니다.”

호무영이 피식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싱겁기는. 이곳 총관에게 자네 방은 표두 급으로 따로 내주라 부탁했으니, 짐을 풀고 대장간을 찾아보게.”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가 다시 말했다.

“자네에게 빚진 것들을 생각한다면 아직 멀었네.”

호무영은 초운을 은인으로 생각했다.

유석운을 죽이고 혈월을 물러나게 했으니 결과적으로 자기 목숨을 살려 준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절정고수로서 피 같은 조언까지 해주었다.

그 덕에 현재 호무영은 절정경의 초입을 넘어설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었다.

표행이 끝나고 고향에서 몇 년 더 정진한다면 스스로를 절정경의 고수라 자부해도 좋을 것이리라.

그러니 뭔들 퍼 주고 싶지 않겠는가.

초운은 하인들을 따라 용검문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과연 귀양 최고의 문파답게 전각도 많았고, 전각마다 방도 많았다.

그는 모르고 있었지만 규모 면에선 과거 무림맹의 귀주지부, 아니, 지금은 반천련의 귀주지부에 필적한다는 게 바로 용검문이었다.

‘잘못 돌아다니다간 길을 잃을지도 모르겠구나.’

그때였다. 뾰족한 바늘을 미간 앞에 두고 있는 것 같은 답답함이 그의 가슴을 조여 왔다.

차가워진 눈빛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십 장 밖의 한 전각이 들어왔다.

전각의 현판에는 신여각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전각의 가장 꼭대기 층.

그곳에서 한 여인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초운은 그 여인이 자신을 바라보며 웃고 있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녀가 바로 용검문에 들어오자마자 느낀 마기의 주인임을 깨달았다.

“먼저 건드리지 않는다면 나도 건드리지 않겠어.”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게 조용히 중얼거린 초운은 다시 하인에게 시선을 돌리며 걸음을 옮겼다.

전각의 여인 사요는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감이 좋은 편인 것 같네.”

그러자 어둠 속에서 누군가 대답했다. 목소리가 꽤 앳된 것이 마치 소년 같았다.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나른한 음색이었다.

“아~아~ 그럴 거야. 아무래도 자하신공을 익혔다고 하니까. 그나저나 삼 년 전보다 더 강해진 것 같네. 그땐 애송이였는데.”

“자하신공? 실전되었을 텐데?”

사요가 조금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침상에 누워, 공을 천장으로 던지며 받는 걸 즐기던 누군가의 인영이 다시 답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신마님이나 백면(白面)의 말로는 확실하다더라고.”

창 아래로 초운이 사라진 방향을 계속 바라보던 사요가 말했다.

“신마님은 왜 저런 녀석에게 관심이 많은 걸까?”

“글쎄……. 혹시 사랑 아닐까? 키히히히.”

어둠 속의 인영이 장난스럽게 대답하며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으지직!

창틀에 올라가 있던 사요의 손이 창틀을 쥐어뜯었다.

고개를 살짝 돌려 어둠 속의 인영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은 살의로 가득 차 있었다.

“아, 화 좀 내지마. 장난이니까. 만약 정말 그랬다면 내가 가만있었겠어?”

“…….”

사요는 창밖으로 주먹을 내밀고 손바닥을 서서히 폈다. 그러자 부서진 창틀의 조각이 가루가 되어 바람에 흩날렸다.

어둠 속의 인영이 그녀에게 말했다.

“신마님의 명을 어겨선 안 돼. 그랬다간 정말 크게 혼날 거야.”

사요는 대답하지 않았다. 말한 당사자 또한 대답을 바란 게 아니었다. 사실 조금은 부추기는 면도 강했다.

그로서도 사요라는 경쟁자가 신마로부터 떨어져 나가길 원했으니까.

“하여간 알아서 해. 난 분명 경고를 전했으니. 우리 ‘제갈청’이랑 놀아야겠어.”

어둠 속의 인영의 기척이 사라졌다. 홀로 남은 그녀가 중얼거렸다.

“처벌은 두렵지 않아. 미움 받는 게 두렵지…….”

그녀의 눈동자에 처음으로 감정 비슷한 것이 떠올랐다.

* * *

처음 그에 대해 들었을 때 백희는 그를 하늘이 자신에게 보내 준 구원자라 생각했다.

무공을 모르는 그녀는 그가 얼마만큼 강한지 몰랐다. 그저 표사들에게서 초운이 용검문주의 친우이자 상운표국주인 추운백보다도 강한 고수라는 정도만 들었다.

용검문주와 상운표국주가 동수라는 소리는 귀에 딱지가 붙을 정도로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들을 뛰어넘는 고수라면 분명 사요 같은 요괴도 해치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단순한 계산이었지만 그녀로서는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 날부터 그를 쫓았다.

하지만 추종술에 추자도 모르는 그녀가 무림고수인 초운을 미행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초운은 그 끈질긴 반천련의 추적자들로부터 3년이나 쫓기면서 단 한 번도 잡힌 적이 없었다.

결국 뒤를 잡힌 것은 그녀였다.

“왜 내 뒤를 쫓지?”

“꺄악~!”

골목길에 숨어 인파 속에서 초운의 뒤통수를 찾던 백희는 갑자기 들려온 그의 목소리에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다…… 당신은 귀신인가요? 어떻게 갑자기 뒤에서…….”

“지붕을 타고 뒤로 넘어왔어. 대답이 됐지? 그럼 이제 말해 봐. 왜 나를 쫓은 거야?”

그녀는 아직 약관도 안 된 소녀였기에 초운은 자연스레 말을 놓았다. 그렇다고 위협하는 것도 아니었다.

평소의 그 잘생기고 순진한 얼굴을 들이대며 부드럽게 물으니 백희는 자기도 모르게 경계심을 풀고 있었다.

“저, 저는…….”

하지만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무턱대고 부탁을 하기엔 너무 염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마음과는 다른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정말 솜씨 좋은 대장간을 알고 있어요!”

“아, 그래, 그러고 보니 널 본 것 같구나. 넌 분명 용검문의 하녀였지? 웃어른이 보내신 건가?”

그런 일은 없었지만 백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표사들과 이야기하며 초운에 대해 몇 가지 알아 두었던 게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정말 좋은 대장간을 알고 있기도 했다.

초운 또한 비록 하루를 머물렀을 뿐이나 이미 용검문의 과도한 접대를 받아 보았기 때문에, 충분히 그러리라 짐작했다.

어차피 검날을 두드리려면 좋은 대장간이어야 한다.

그는 어차피 용검문에 머물기로 한 거,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디로 가면 되지?”

“저…… 저를 따라오세요.”

그렇게 둘이 향한 곳은 도시 외곽에 위치한 허름한 대장간이었다.

이곳까지 오면서 초운은 시설이 더 좋아 보이는 대장간을 다섯 군데는 지나쳐 왔다.

그러나 아무런 의심 없이 백희의 뒤를 따랐고 도착하고 나서 본 대장간의 허름한 모양새에도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안쪽에서 들려오는 규칙적인 망치 소리에 감탄하기까지 했다.

그가 쇠를 볼 줄 아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소리에서 느껴지는 경지는 읽을 수 있었다.

자신만의 길(道)을 개척하여 경지에 이른 자를 구분 할 수 있을 만큼 초운의 공부가 깊어진 탓이다.

백희는 도착하고 나서 왠지 조금 머뭇거리다 초운에게 말했다.

“이곳이니…… 들어가 보세요.”

“너는 안 들어가?”

“……그냥 밖에서 기다릴게요.”

그때 망치 소리가 멈추며 대장간 안쪽에서 걸걸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희냐? 왔으면 들어오지 않고.”

백희의 얼굴이 순식간에 울상으로 변했다.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대장간 안으로 발을 디뎠다. 초운이 그 뒤를 따랐다.

대장간 안에는 어깨가 굉장히 두꺼운 건장한 체격의 노인이 붉게 데워진 검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옆에는 제자로 보이는 중년의 사내가 긴장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노인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틀렸군.”

그리 말한 노인은 집게로 쥐고 있던 검날을 물통에 집어넣었다.

물이 증발하며 하얀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아니, 사부님, 그 아까운 것을 어찌…….”

“이딴 건 다시 녹여서도 못 쓰니 산에 가서 묻어라.”

“으으, 하지만…….”

제자는 아까웠는지 아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지금 물에 담가 버렸으니 끝난 게야. 잊었느냐?”

“휴…… 아닙니다. 묻어 두고 오겠습니다.”

제자가 검날을 들고 나가 버리자 노인은 백희를 바라보았다.

“향이는 잘 있느냐?” 백희가 화들짝 놀란 얼굴로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장간이 비록 덥다지만 그녀는 식은땀을 너무 많이 흘렸다.

의심스럽지도 않은지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투덜대듯 중얼거렸다.

“못된 년, 어미아비 없는 것을 업어 키워 놨더니만 할아비한테 찾아와 보지도 않고.”

향이는 노인의 손녀로 얼마 전 백희를 따라 용검문의 하녀로 들어간 아이였다.

백희가 대장간에 도착해서도 막상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린 이유이기도 했다.

소녀는 사요에게 정기를 다 빨려 죽었고, 그 시신을 용검문의 심처에 묻어 처리한 것이 바로 백희였기 때문이다.

백희의 죄책감은 배가 되었다. 그녀는 이곳에 있기가 너무 괴로워서 초운의 등을 밀며 말했다.

“포 할아버지, 이분을 잘 부탁드려요. 용검문의 손님이신데 검을 조정하신대요.”

그녀는 노인의 대답을 채 듣기도 전에 도망치듯 나가 버렸다.

백희가 가 버리자 난처해진 초운은 어색한 얼굴로 노인에게 인사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노인은 늘 불꽃으로 향하던 부리부리한 눈을 초운에게로 향했다.

초운은 그 눈빛을 아주 담담히 받아 냈다.

그렇게 일각이 흐르자 노인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초운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노인의 손바닥과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눈을 깜빡이자 노인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검을 내놔 봐.”

“아, 예.”

초운은 검집째로 노인에게 넘겼다. 노인은 처로를 뽑아 들고 이리저리 살피더니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 만들었군. 헌데 형태를 보아선 화산의 것인데…….”

“네, 화산의 속가이지요.”

사실 정식으로 도적에 이름이 올라간 도사였지만 쫓기는 마당에 그런 것을 일일이 밝힐 필요는 없었다.

“음, 미안하네.”

“괜찮습니다.”

무엇이 미안한지는 초운도 잘 알고 있었다. 아마 화산의 멸문 때문이리라.

초운은 노인이 마음에 들었다. 손잡이를 줄로 꽁꽁 묶어 놓아서 화산의 검인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헌데 검날만 보고 화산검을 알아챈 것이다. 실력 있는 장인임을 스스로 증명하였으니 마음에 들 수밖에.

“워낙 솜씨 좋은 양반이 손댄 듯하니 내가 더 손댈 것도 없겠군. 이가 몇 군데 나갔으니 날이나 좀 갈아 드리겠네.”

“예, 부탁드립니다. 헌데 돈은 어느 정도…….”

초운이 품에 손을 집어넣으며 돈을 꺼내려 하자 노인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 되었네. 오랜만에 좋은 검을 보았고, 이 나간 거 봐주는 게 뭐 대수라고 돈을 받겠나.”

“그래도 제 마음이 불편합니다.”

초운이 은전을 꺼내며 고집을 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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