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향 83화
보름 후.
백희는 침울한 얼굴을 애써 펴며 어딘가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녀가 향하는 곳은 바로 어린 시절부터 친하게 지낸 한 소녀의 집.
대대로 대장간을 했다는 이 집은 가난하긴 해도 한때 귀양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훌륭한 곳으로, 현재 귀양에 있는 모든 대장간 주인들은 이곳에서 배워 대장간을 차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제자들이 저마다 대장간을 차리고 저렴한 가격으로 경쟁을 하니, 이곳처럼 옛 방식을 고수하고 높은 가격을 제시하는 대장간은 꾸려 나가기 어려운 상태였다.
당연한 얘기지만 가세가 기운 지 오래.
지금은 입에 풀칠하는 것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대장간 안으로 들어서니 한 노인이 백희를 맞았다.
대장간의 주인인 포씨였다.
“오랜만이구나. 용검문의 하녀로 들어갔다더니 잘 지내느냐?”
“네, 할아버지. 그런데 혹시 금향이 있어요?”
“안에 있다. 들어가 보거라.”
“네…….”
백희의 안색이 다시 침울해졌다.
그녀가 없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때 대장간의 안채로 들어가려던 백희를 포씨가 잡았다.
“그런데 희야.”
“네?”
백희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안색이 안 좋구나. 어디 아픈 게냐?”
“아니…… 아니에요. 그럴 리가요.”
“일이 힘들거들랑 당장 때려치우고 나와서 시집이나 가거라. 내 좋은 놈을 하나 소개시켜 주마.”
평소였다면 포씨의 농담에 농담으로 대응했겠지만 지금 그녀에겐 그럴 여력이 없었다.
“아뇨, 일은 어렵지 않아요. 저는 괜찮아요, 할아버지.”
백희는 그 말과 함께 등을 돌려 안채로 사라졌다.
포씨는 그런 그녀의 등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 * *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사요는 발등을 움직여 바닥에 무릎 꿇고 있는 용검문주의 턱을 들어 올렸다.
불과 몇 달 사이에 십 년은 더 늙어 보이는 용검문주는 그녀의 발에 입맞춤을 하고 있었다.
“상공, 제가 부탁한 건 끝났겠지요?”
“그…… 그래, 그들은 분명 걸려들 걸세. 그러니 제발…….”
그녀의 발을 정신없이 핥아 대던 용검문주가 애처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사요의 길고 부드러운 다리가 용검문주의 목을 감쌌다.
“좋아요. 일을 잘했으니 선물을 드릴게요, 상공.”
용검문주의 눈빛이 더욱더 탁해졌다. 그의 얼굴은 앞으로 느낄 쾌락에 대한 기대감으로 젖어 있었다.
“사, 사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것인지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덮쳤다.
침대로 넘어지던 그녀가 그의 목을 감쌌다.
그녀의 입에서 달콤한 비음이 새어 나오고 뜨거운 열락이 방 안을 데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용검문주의 어깨너머로 천장을 바라보던 그녀의 얼굴은 지극히 차가웠다.
얼음으로 사람 얼굴을 조각하더라도 그녀보다는 사람다울 것이다.
하지만 입에선 쾌락에 들뜬 신음이 흘러나왔다.
‘지겨워…….’
그녀는 그 단어를 내뱉지 못했다.
아니, 말한다 해도 이미 자신의 배 위에서 날뛰는 이 사내는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그는 이미 철저한 노예였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미 용검문의 전력의 팔 할 이상은 그녀의 손아귀에 들어와 있는 상태였다.
그녀에게 남은 일은 앞으로 있을 싸움을 위해 내공을 계속 모으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을 거칠게 탐하는 용검문주를 살짝 떼어내고 밖에 있는 자신의 시비 백희를 불렀다.
“데리고 들어오너라.”
용검문주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방문을 쳐다보았다.
잠시 후 인기척과 함께 백희가 들어왔는데 그녀는 열대여섯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
소녀는 겁먹은 얼굴로 방 안을 살피다 사요와 눈이 마주쳤다.
사요는 소녀가 아주 마음에 들었는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를 향해 용검문주가 물었다.
“사요, 저 아이는 뭔가?”
“선물을 드리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저 아이는 문주님을 위한 선물이랍니다.”
“허, 허험.”
용검문주가 헛기침을 터뜨렸다.
“지금 부끄러워하시나요? 호호호.”
“……아닐세. 허허허허.”
용검문주가 그녀의 나신 위로 다시 한 번 쓰러졌다.
그녀는 백희에게 눈짓으로 나가라고 신호를 보낸 후 소녀에게 말했다.
“이리 오너라.”
소녀는 사요의 눈부신 외모에 취한 듯 멍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그녀의 요구에 얼굴을 붉히며 다가갔다.
잠시 후 소녀는 나신이 되었고 넓은 침대 위에선 세 남녀가 알몸으로 뒹굴기 시작했다.
문을 닫고 밖으로 나온 백희는 문 앞에 쪼그려 앉은 채 귀를 막고 눈을 감았다.
눈물이 계속 흘러나왔다.
죄책감 때문이었다.
아마 새벽이 되면 방 안에는 싸늘히 식은 소녀의 시신만이 남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시신을 치우는 것은 백희의 몫이었다.
벌써 한두 명이 아니었다.
그녀의 비밀을 알아버린 이후 보름 간 열 명이 넘는 소녀들을 그녀에게 바쳤다.
소녀들의 부모들은 자기 자식들이 이곳에서 호의호식하며 잘 지내는 줄만 알고 있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밝혀질 게 뻔했다. 몇 달이고 연락이 닿지 않으면 부모로서는 의심이 들 수밖에 없다.
지옥이 따로 없었지만 누구에게도 밝힐 수 없었다.
그 소녀들과 똑같은 꼴이 될까 봐 너무 무섭고 두려웠다. 백희의 그 같은 두려움은 상운표국이 당도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곳에서 희망을 보았다.
아주 작은 희망이었고 이렇다 할 확신도 없었지만.
그녀는 그 희망에 모든 것을 걸어 보기로 하였다.
* * *
상운표국의 표사들은 귀양에 들어서자 환호했다.
따듯한 물에 몸을 담글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런 표사들을 향해 추연희가 말했다.
“오늘부터 나흘간 용검문에서 지내게 될 거예요. 아무쪼록 예의를 지켜 주길 바랍니다.”
“죽으라면 죽는 시늉도 하겠습니다!”
누군가 그리 외치자 다들 크게 웃었다. 추연희도 부드럽게 웃었다.
용검문은 상운표국과 아주 깊은 관계로 용검문주 용초국과 상운표국주 추운백은 과거 관현사라는 불가의 사찰에서 속가제자로 동문수학한 사이였다.
관현사는 소림과 같은 불가의 문파였는데 그 규모는 작아도 무공의 깊이는 명문정파 못지않은 훌륭한 문파였다.
그런 곳에서 추운백과 용초국은 무공을 익혔고 훗날 독립하여 추운백은 감숙에서 상운표국을, 용초국은 귀주에서 용검문을 세웠다.
그들은 관현사의 속가제자 시절부터 무척이나 사이가 좋았기 때문에 독립한 이후에도 인연을 쭉 이어 나갔다.
추운백이 표행을 이끌고 귀주를 지날 때면 늘 들르는 곳이 용검문일 정도였다.
추연희 역시 용검문주를 용 숙부라 부르며 친근히 대했다. 그렇기 때문에 용검문에서 머무르려 한 것이다.
사실 해남도까지의 여정을 생각한다면 이곳에서의 나흘은 위태롭다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곳에서 표행을 재정비해야 했다.
초운의 공백을 메우려면 용검문의 지원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표물의 중요성에 비해 표사들이 너무 적었다.
이대로 초운이 사라진다면 해남도까지 무사히 도착하리란 보장이 없었다.
해고령에서 살아남은 유석운 측의 표두와 표사들을 모조리 해고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하지만 경험 많은 두 명의 표두들이 용검문을 떠올렸고, 무사들을 빌릴 수 있으리란 확신이 있었다.
표국주인 추운백도 여러 번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아는 용 숙부라면 부탁을 들어주리란 확신도 어느 정도 있었다.
그녀는 표사들과 함께 걸어오는 초운을 향해 말을 몰았다. 그리고 그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당신은 곧바로 떠날 건가요?”
이미 귀양에 들어섰을 무렵 호무영에게서 약속한 신분패 세 개를 다 받아 냈으니 그가 표행에 남아 있을 이유는 없었다.
그가 고개를 젓더니 검을 들어 보이며 대답했다.
“대장간에 들러야 하고 알아볼 것이 있어 며칠 머무를 계획입니다.”
그녀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럼 잘됐네요! 우리랑 함께 용검문에서 머물러요.”
“그런 폐를 끼칠 수는 없습니다.”
추연희는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몇 달을 함께 한 정이 있는데 이제와 정나미 떨어지게 굴 거예요?”
“…….”
“내 말대로 하세요.”
“……네.”
초운은 한숨을 쉬며 답했다. 어차피 가진 돈이 많지 않아서 숙소를 찾는 것도 힘들 것이다.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귀양에 들어서긴 했지만 용검문까지는 반 시진은 더 가야 한다.
초운과 추연희는 나란히 걸으며 대화를 했다.
언제나처럼 주로 추연희가 물으면 초운이 대답하고 대답이 시원찮으면 추연희가 화를 내며 억지를 부리는 순이었다.
표두나 표사들도 이젠 그들의 관계에 익숙해졌는지 담담해 보였다. 초기에는 추연희의 저런 모습에 걱정을 많이 했다.
누가 뭐래도 초운은 무림공적이었다. 그것도 반천련의 무인들을 홀로 도륙한 무서운 검객인 것이다.
삼두육비의 괴물에 광인(狂人)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건만 개의치 않고 놀리는 그녀의 행태에 표사들은 가슴을 쓸어내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목숨을 내놓고 사는 듯 보일 정도였다. 겁이 없는 것을 떠나 그녀 스스로가 무인이면서도 무인이라는 존재의 괴팍함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게 티격태격하는 그들의 대화를 볼거리 삼다 보니 표행은 어느새 용검문에 도착해 있었다.
가장 먼저 표사들을 반긴 것은 역시나 용검문의 문주인 용초국이었다.
근엄한 인상의 오십 대 사내는 십 년 만에 본 추연희를 단숨에 알아보고는 손을 잡았다.
“연희야, 정말 많이 컸구나.”
“숙부님은 흰 머리가 무척 많아지셨네요?”
그녀는 아비인 추운백을 떠올리며 말했다.
추운백은 병상에 누워 오늘 내일 하는데도 아직 머리만은 검었다. 그런데 눈앞의 용초국은 머리색도 머리색이었지만 얼굴 자체가 너무 삭아 있었다.
단단한 체구만 아니었다면 칠십 대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용초국이 허허 웃으며 답했다.
“원 녀석도. 원래 이 숙부가 겉늙어서 그렇다. 어릴 때부터 그러더니 여전히 직설적이로구나.”
그의 대답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쉽게 납득이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십 년 전의 그는 자신의 아비인 추운백보다 더 젊어 보이는 동안이었기 때문이다.
그랬던 그가 불과 십 년 만에 이렇게까지 늙었다?
상식적으로 믿기 힘들었다. 하지만 전혀 내색하지는 않고 그의 세 아들과 두 딸, 그리고 두 명의 사위와 차례로 인사를 나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