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향 82화
四章
3년 전의 그 일은 실로 참사였다.
수백 명의 무인들이 단 한 명의 마인의 손에 모조리 타 버린 터라 온전한 시체는 단 한 구도 찾을 수 없었다.
운 좋게 살아난 몇몇 목격자가 아니었다면 이 일은 그저 알 수 없는 기사로 남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한 명의 마인과 한 명의 무림공적이 탄생했다.
무림맹의 총사가 직접 밝힌 무림공적의 행태는 악독한 것이었다.
그는 놀랍게도 명문정파인 화산의 이대제자 출신으로 마인을 두둔하는 것도 모자라 다 죽어 가던 마인이 다시 살아날 수 있게 도왔다.
골백번 죽어도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로부터 1년여간 초운은 쫓겨 다녔다.
무림맹과 사파의 백월성, 성천궁, 그리고 그들에게 협조 중인 수백 개의 문파에 쫓겼다.
그들은 서로 간의 정보망도 대단해서 섬서에서 목격되면 그 소식이 산동까지 가는 데 열흘이 안 걸렸다.
중원 전체가 초운을 잡기 위한 천라지망 같았다.
검귀라는 별호는 그때 생긴 거였다.
그 1년간 그는 피의 길을 걸었다.
그 와중에 자신을 쫓던 무인들을 수십, 아니, 수백은 죽였다.
그로 인해 정사를 막론하고 검귀라는 이름은 마인만큼 잔혹한 인물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후 기련산맥에 틀어박혀 이 년을 보냈다.
일 년간의 처절한 실전 경험을 통해 얻은 것들을 정리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힘이 필요했다.
초운은 스스로 어깨 위에 짊어진 짐이 많았다.
그가 원해서 짊어진 것이 아니라 남들이 떠맡긴 것이었다.
그러나 그 짐이 무겁다 여긴 적은 없었다. 그에게 있어선 아주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기련산에서의 이 년간,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보았다.
그리고 사부에게 배웠던 모든 것들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실전에서 얻은 것들을 갈고닦기 위해선 그것이 최선이었다.
어설프기만 하던 절정경의 경지는 이제 완숙해졌고, 이제 그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게다가 그가 적오에게 배웠던 수련법의 특성상, 같은 경지 같은 수준의 무인들보다 더 강력한 힘을 낼 수 있었다.
절정고수를 이길 수 있는 일류고수와 절대고수에 근접한 절정고수. 그것이 사부인 적오가 초운에게 원하던 것.
그래서 초운은 사부의 가르침대로 행하고 결국 이루었다.
강해진 것도 강해진 것이었지만 초운의 성품에도 변화가 생겼다.
황현을 잃고 난 후 깨달은 것으로, 망설임이 없어졌다.
적이라 인지한 이에게 검을 휘두를 땐 철저하리만치 정을 두지 않았다.
3년 전의 그가 아직 어린 도사였다면, 지금의 그는 철저한 무인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지금의 그는 강했다.
육체적으로도, 그리고 정신적으로도…….
하지만 그것이 진정 초운이 원하는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 * *
검의 목소리는 여전히 들리지 않았다.
처로라 이름 붙인 그의 친구는 몇 해가 지나도 대답이 없었다.
그것이 본래 자기 마음의 소리라는 것을 이젠 안다.
그리고 그 같은 경지는 진작 뛰어넘었음을 알고 있었다.
검명(劍鳴)은 신검합일에 이르고 절정경에 무사히 진입하면 사라진다.
어디까지나 절정경에 이르는 과정 중에 생겨나는 현상인 것이다.
그러니 그것을 다시 불러오기란 다시 수준을 낮추라는 뜻밖에 되지 않는다.
그것을 알면서도 그리워하는 이유는 외롭기 때문이다.
과거엔 검을 들고 있으면 전혀 외롭지 않았다.
혼자라는 게 전혀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 좋아하는 검을 들어도 공허하기만 했다.
세상 한복판에 홀로 팽개쳐진 듯한 기분이었다.
‘후…….’
옅은 미소가 흘러나왔다.
쓸데없는 감상은 마음을 약하게 만든다.
마음이 약해지면 망설임이 생기고 망설임이 생기면 후회를 남기게 된다.
초운은 눈을 길게 감았다 떴다.
약해진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서였다.
이 석 달여간 표국의 사람들과 부대끼며 지내다 보니 영향을 받은 것이리라.
“하루 빨리 떠나야겠군.”
표국과 약속한 곳은 초운의 애초 목적지였던 귀주성(貴州省) 귀양(貴陽).
귀주성에 들어선 이상 이 긴 여정도 앞으로 열흘 정도 남았을 뿐이다.
그때가 되면 두말없이 돌아설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저 여인을 참을 수 있을는지 의문이다.
“이봐요, 어리바리. 지금 뭐하고 있는 거죠?”
“……그렇게 부르는 거 그만둘 수 없는 겁니까?”
“에이~ ‘너’라고 안 부르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해요. 그러고 보니 당신 나보다 연하잖아. 반말해도 돼요?”
“안 됩니다.”
초운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신분패고 뭐고 그냥 떠나는 게 나았을지도…….’
해고령에서의 사건 이후로 그녀가 조금은 얌전해질 거라 생각했었는데 잘못된 판단이었다.
그때 이후로 그녀는 초운을 더 귀찮게 했다.
그가 검귀라는 게 알려진 이후 표두와 표사들, 심지어 살갑게 대해 주던 쟁자수들의 장(長) 명우까지 그를 멀리했다.
검귀라는 이름이 가져다준 두려움 때문이리라.
초운의 입장에선 편했다.
아무도 친해지려 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녀와 호무영만은 달랐다.
호무영이야 자신을 통해 절정경의 실마리를 잡으려 한다는 목적이 있으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그저 호기심.
검귀라 불리는 이에 대한 호기심이 전부였다.
특히 그녀는 그의 과거에 대해 캐물었는데 당연한 얘기지만 한 번도 말해준 적이 없었다.
오늘도 그녀는 그에게 물었다.
“왜 그리 항상 침울한 거죠? 웃으면 귀여울 텐데.”
초운은 그녀의 말에 하마터면 거울을 찾을 뻔했다.
차가운 표정을 유지하려 늘 노력하는데 그게 그녀에겐 침울해 보였던 것일까.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를 보니 이 역시 장난임을 알았다. 왠지 그녀의 눈빛에는 여유가 가득했다.
친딸처럼 아껴 주던 숙부가 자신을 배신하고 비참하게 죽었음에도 저런 눈빛을 지을 수 있다니.
초운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표국의 임시국주답게 체통을 지키는 게 어떻습니까.”
“체통이 밥 먹여 주나요? 저희 아버지는 표행나가실 때마다 표사와 쟁자수들이랑 풍찬노숙하셨어요. 운송업이란 게 체통 지켜가며 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요.”
그녀가 서로의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에서 정색하며 열변을 토하자 초운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지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정색하던 그녀가 씩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미안할 것까지야. 그냥 놀린 거예요, 놀린 거.”
초운은 몰랐지만 그녀는 남동생이라도 생긴 것처럼 그를 대했다.
해고령의 사건 이전엔 그를 볼 땐 물가에 내놓은 아이 같았지만, 그가 검귀임을 알게 된 후부터는 얼굴을 볼 때마다 피식피식 웃음부터 나왔다.
무서워해야 정상이건만 귀여운 면만 보였다.
거기엔 무시무시한 별호와는 어울리지 않는 어리바리하고 순진한 외모도 한몫했다.
“그런데 ‘운’이 진짜 이름은 아닐 테고……. 이름이 뭐예요?”
“이미 무림맹에서 공표했습니다만.”
“나는 모른단 말이에요. 가르쳐 줘요~”
그때 구원자가 나타났다. 호무영이었다.
“이보게, 운이.”
초운이 벌떡 일어나며 대답했다.
“네.”
“자네가 말했던 심기합일(心氣合一)에 대해 생각해 보았네만 의문점이 생겨서…….”
초운은 호무영의 등을 밀며 얘기했다.
“훼방꾼이 있으니 다른 곳에서 얘기하지요.”
“알겠네. 그러니 그만 밀게나.”
두 사내가 자리를 뜨자 홀로 남은 그녀는 볼을 부풀리더니 발끝으로 땅을 파며 심통을 부렸다.
“바보.”
* * *
경국지색이란 단어가 아까울 만한 미녀가 귀양에 나타난 뒤로 모든 것이 변했다.
겨우 한 달여 만에 수많은 사내들이 타락하였고 미쳐 갔다.
귀양 인근의 마을에선 모든 사내들이 정기가 다 빨린 채 죽어 있는 게 발견되기도 하였다.
뒤늦게 귀양 최고의 방파이면서 반천련 소속인 용검문이 나섰지만 흉수는 쉽사리 찾을 수 없었다.
사내들은 집 밖으로 나서는 걸 삼갔고 거리는 텅텅 비었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그녀를 의심하는 이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사람 같지 않은 외모는 경외심을 불러일으켰다.
그 요염하면서도 성스러운 아름다움이 그녀의 잔혹함을 가려 주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녀의 위치가 문제였다.
그녀는 현 용검문주의 애첩이니 귀양 땅에서 그녀를 건드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시비인 백희는 분명 보았다. 그녀가 밤늦게 하얀 소복 바람으로 나가서 옷을 시뻘건 혈화로 물들이고 돌아오는 것을.
그때부터 백희는 그녀를 의심했다.
생각해 보니 그녀가 귀양에 흘러 들어온 후부터 괴사가 끊이지 않았다.
문주의 건강이 나빠진 것도 그녀가 들어오고 난 후부터였다.
게다가 하인들 사이에 퍼진 소문에 따르면 그녀는 문주의 장남과도 관계를 맺고 있다고 했다.
이후 백희가 알아낸 바로는 그런 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장남뿐만이 아니라 차남, 용검문의 검룡대주와 부대주를 지내고 있는 두 명의 사위들도 그녀와 관계를 맺었다는 것이다.
백희가 그녀에 대해 꽤 많은 것을 알아냈을 때에는 더 큰 괴사들이 벌어졌다.
검룡대가 그녀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만 것이다.
그것뿐이라면 괴사라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정말 충격적이었던 것은 용검문의 사내들 중 어느 누구 하나 그것에 의문을 둔 이가 없었다는 데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백희는 충격적인 진실과 대면하게 되었다.
여느 때와 같이 아침에 그녀를 깨우기 위해 들어간 전각 안. 그녀의 방 안이 들여다보이는 문틈 사이에서 그녀의 실체를 보고 만 것이었다.
간밤에 용검문주가 그녀의 방에 들렀다는 소리는 들어 알고 있었다.
새하얀 나신의 그녀가 문주의 몸에 올라타 허리를 흔드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문주의 애첩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녀가 그의 입에서 하얀 기운을 뽑아 코로 흡수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건, 이건…… 아무리 봐도 어린 시절 자주 듣던 이야기 속의…….
“요…… 요괴!”
백희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리다 깜짝 놀랐는지 양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한참 허리를 흔들던 그녀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녀의 차가운 눈빛이 방문 틈 사이로 흘러나왔다.
“히…… 히이이익!”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백희는 걸음아 나 살려라 하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채 세 번째 발자국을 떼기도 전에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다.
어느새 그녀가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새하얀 눈으로 빚은 듯한 나신은 같은 여인이 보아도 아름다웠다.
하지만 백희는 그 아름다움에 취해 있을 수 없었다.
급히 무릎을 꿇으며 목숨을 구걸했다.
“아, 아씨, 사요(賜謠) 아씨, 사…… 살려…… 주세요.”
사요라 불린 여인은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앞으로 했다.
그녀는 콧김이 맞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까지 얼굴을 마주하더니 부드러운 손으로 백희의 볼을 매만졌다.
한참 볼을 매만지던 그녀의 손이 백희의 긴 목을 지나 가슴으로 향했다.
“아…… 아씨.”
백희가 놀라 얼굴을 붉혔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손길은 백희가 아직 남에게 한 번도 허락하지 않은 비궁에까지 이르렀다.
백희는 공포심과 수치심에 얼굴이 벌게졌으나 반항할 수 없었다. 사요의 눈은 그 이름에 걸맞게 뱀과 같아서 사람을 자주 주눅 들게 했다. 특히 지금은 그 정도가 더 심했다.
탐색을 마쳤는지 백희의 몸에서 손을 뗀 사요는 백희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갔다.
백희는 그녀의 차가운 입김이 귀에 닿자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사요가 뱀처럼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직 처녀구나.”
백희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다시 물었다.
“다 봤지?”
“아뇨. 안 봤어요. 아무것도 못 봤어요. 아씨! 믿어주세요!”
공포에 질린 백희가 외쳤다. 사요가 다시 웃었다.
“그래, 그럼 다행이지만. 만약 이번 일이 누군가의 귀에 들어간다면…….”
백희가 양손과 고개를 함께 저었다.
“절대 그런 일은 없어요, 아씨. 절대! 절대, 절대로!”
“그래, 그렇다면 한번 믿어 보마. 단.”
사요는 뱀처럼 미소 지었다. 복도를 타고 뻗어 오는 햇빛을 등지고 선 그녀의 얼굴 그림자 속에서 새하얀 치아가 번뜩였다.
“오늘부터 너는 내 부탁을 들어줘야 할 것 같구나.”
백희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 정신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일주일도 안 되어 후회했다.
그때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았을걸 하는 생각에 절규했고 오열했다.
요괴와는 거래를 하는 게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