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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향-80화 (80/217)

검향 80화

물론 모든 것을 파악할 순 없다. 하지만 자신의 무공에 적용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이는 그가 천재라서가 아니라, 이미 개인 수련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전을 통한 수련은 많은 무인들이 애용하는 것인데 초운은 오히려 남들보다 늦은 감이 있었다.

“하여간 이만 찢어졌으면 하는데 너는 어때? 난 수라사인공을 완성할 때까진 너와 맞서고 싶지 않거든. 게다가 의뢰인도 우리들의 싸움에 휘말려 토막 나 버렸으니.”

“저도 당신과 싸우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당신의 진짜 별호는 뭐죠?”

“검귀같이 촌스러운 별호보다는 훨씬 멋있는 별호다.”

“그냥…… 안 들을래요.”

그는 초운의 말을 무시하며 말했다.

“좋아! 그렇게 알고 싶어 하니 가르쳐 주마. 내 별호는 혈월(血月). 이래봬도 아주 유명한 이름이니 알고 있겠지?”

“혈월…… ?”

“뭐야, 모르는 거야?”

“처음 듣습니다.”

“…….”

어색해진 혈월은 머리를 긁적였다.

“휴. 하여튼 난 갈 거야. 혹시 잡지는 않겠지?”

“안 잡습니다.”

“쩝. 혈월이라는 이름을 모를 정도로 강호 경험이 적은데다 나보다 연하인 녀석이랑 동수를 이루다니. 사부께서 아시면 혼 좀 나겠는걸. 뭐, 언제 또 한 번 붙어 보자고.”

“원하신다면.”

그가 그렇게 훌쩍 떠나 버리자 초운은 비로소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긴장이 풀린 탓이었다.

상대와 편히 대화하는 듯했지만 사실 호흡마다 빈틈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것은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조금이라도 빈틈이 보였다면 그 즉시 검이 날아왔어도 이상할 것이 없을 만큼 서로 간의 보이지 않는 견제는 대단한 것이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던 초운이 구름 사이로 누군가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세상은 참 넓어요, 할아버지.”

표국의 일행들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 * *

스스로를 혈월이라 소개한 사내는 봉두난발의 머리를 말 꼬랑지처럼 묶었다.

그러자 그의 준수한 얼굴이 드러났다. 서른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얼굴은 피에 굶주린 자답지 않은 순수함이 엿보였다.

결코 살인자답지 않은 얼굴이랄까?

특히 눈빛이 아주 맑아서 한 번이라도 그와 눈을 마주친 자라면 결코 잊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우. 정말 무서운 꼬마로군. 세상엔 괴물이 참 많아.”

“그렇습니다, 소주(少主).”

언제 나타난 것일까.

전신을 붉은색의 장포로 감춘 정체불명의 인물이 그의 등 뒤에서 나타났다.

혈월이 미간을 찌푸리며 그에게 말했다.

“그렇게 갑자기 나타나지 말아 줄래, 염제(炎帝).”

“왜 그냥 봐주신 겁니까. 소신이었다면 싹을 잘라 버렸을 겁니다.”

“아까 한 얘기 못 들었어? 그대로 계속했다면 둘 중 하난 죽었을 거야.”

그의 말에 혈의장포의 사내는 믿기 힘들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 리가. 소주께선 수라사인공의 사인(四忍)에 이르셨지 않습니까.”

“사부께서 말씀하셨듯 세상은 넓어. 아직 내가 먹어 치워야 할 것들이 많다는 뜻이겠지.”

“으음…….”

혈월이 그런 그의 등을 툭 치며 말했다.

“하여튼 이만 가자고. 살인광 놀이는 이제 끝이야. 성으로 돌아가야겠어.”

“아직 수련 중이지 않습니까.”

“오늘따라 말이 많네. 돌아가서 사부께 배워야 할 게 많아. 훗날 저 괴물을 잡아먹으려면 말이야.”

그 말을 남기고 그는 경공을 펼쳐 사라졌다.

“과연 백월성의 후계자다운 생각이십니다.”

낮게 중얼거리던 염제가 서둘러 그의 뒤를 따랐다.

* * *

혈월은 적아를 구분하지 않고 많은 표사들을 죽였다.

그가 건드리지 않은 것은 표물과 계약직인 표행무사들 뿐이었다.

유석운의 편에 서서 추연희를 해하려 했던 표두와 표사들은 그녀 앞에 무릎 꿇고 용서를 빌었다.

이미 진짜 검귀임이 밝혀진 초운이 떡 하고 버티고 있으니 그들로선 반항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녀는 그들을 용서해 주는 대신 모두 해고하고 떠나보냈다.

그러고 나니 그녀에게 남은 것은 표두 두 명에 표사 일곱, 표행무사 다섯과 열두 명의 쟁자수들뿐이었다.

혈월은 다행히도 쟁자수들에겐 흥미가 없었는지 수레 밑에 있던 쟁자수들 중에 다친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이튿날 초운은 모두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무림공적이라는 정체가 밝혀졌으니 어쩔 수 없었다.

“……해서 이만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 그를 추연희가 붙잡았다.

“이, 이봐요. 당신 그냥 갈 거예요?”

“저는 검귀입니다.”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당신은 분명 우리 상운표국과 계약한 표행무사예요! 목적지까진 데려다 줘야 할 의무가 있다고요.”

“…….”

그녀는 아직은 초운을 잃어선 안 된다는 생각에 필사적으로 잡았다.

무림공적을 감싸다간 안 좋은 일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번 표행을 성공시키지 못하면 어차피 표국은 끝이었다.

표두와 표사들을 대부분 해고시킨 데다, 부국주인 유석운까지 죽었다.

표행까지 실패해 버린다면 신용이 떨어지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표국이 망하는 건 시간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초운이 필요했다.

그가 표국과 계약한 목적지는 해남도가 아닌 귀주성이었지만, 그곳까지만이라도 함께해준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거리상으로 보았을 때 귀주성이면 목적지까지 반 이상은 간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초운을 향해 호무영이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자네가 표행에 참여한 건 신분 보장을 위해서겠지? 표국의 표행에 묻어간다면 반천련의 검문에도 걸리지 않을 테니까.”

어느 무림방파든 간에 자신이 장악하고 있는 지역에서 검문을 하는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위에서 공문이 내려오면 검문을 시작하는데, 그땐 한 명 한 명 꼼꼼히 하는 편이다.

하지만 예외인 경우가 있었으니 바로 표국이나 상단의 행렬이다.

표국이든 상단이든 일단 물품을 옮기는 일이고 둘 다 시간과의 싸움이다. 때문에 이름 있는 표국이나 상단들은 예전부터 검문 시에 특혜가 있었다.

방파 측에서 벌인 검문으로 인해 잡아먹은 시간을 일일이 다 보상해 줬다간 재정이 거덜 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만들어진 특혜였다.

그것은 바로 신분 보증.

상단이나 표국에 속한 표사나 상인들은 표국의 보증이 확실하다면, 그리고 확실히 등록된 상단이나 표국이라면 그냥 통과시켜 주는 것이다.

그래서 신분이 불확실한 초운의 입장에서는 표국의 행렬에 묻어가야 했다.

만약 지금 표국에서 벗어난다면 제아무리 초운이 날고 긴다 해도 언젠가는 발각될 게 분명했다.

호무영이 간파한 것도 바로 그 점이었다.

“만약 애초에 계약대로 귀주까지만 가 준다면 신분패를 주겠네.”

“……신분패?”

“그래, 그것만 있어도 앞으로 여행에 검문 걱정은 안 해도 될 걸세.”

“음…….”

초운은 그가 자신을 속이는 건 아닌지 의심했다. 신분패를 정말 줄 수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을 눈치챈 호무영이 품에서 세 개의 신분패를 꺼내며 말했다.

“어제 죽은 아우들의 것이지.”

“아…….”

처음 이 표행에 동행한 표행무사는 초운까지 여덟이었다.

하지만 유석운 측 표사들과의 싸움으로 세 명의 표행무사가 죽고 말았다.

호무영은 그 표행무사들의 신분패 중 하나를 넘기려 하는 것이다.

“어차피 그저 나뭇조각일 뿐일세. 아우들의 고향에 보낼 머리카락은 다 준비해 뒀으니 이것들은 필요가 없지. 세 개나 되니 도망 다니기 편할 걸세.”

물건이 확실하니 믿을 수 있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당장에라도 힘으로 빼앗을 수 있지만 초운은 그렇게까지 타락하지 않았다.

이제 자신을 도사라 여기지는 않지만 그래도 악인이나 할 짓을 서슴없이 저지를 만큼 타락한 것은 아니었다.

“조건을…… 받아들이겠습니다.”

그의 결정에 추연희와 호무영이 서로를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 * *

과거 화산파라 불렸으나 지금은 천상련의 지부로 더 유명한 곳이 있다.

전각 하나하나에는 아직도 화산의 숨결이 가득하건만 그 속에는 화산의 제자가 아닌 천상련의 무인들과 마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심처에는 지금 한 사내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는데, 그는 천상련의 구대호법신장의 제 일위장이자 천하무림으로부터 새로이 흑마(黑魔)라는 별호로 불리고 있는 곽호였다.

그는 과거와는 달리 상당히 초췌해 보였다. 이는 그가 사용하는 한 가지 대법 때문이었다.

천인금신법(天人禁身法).

그가 얼마 전에 창안한 이 대법은 시전자가 스스로의 가능성을 봉인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힘을 봉인한다기보다는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가는 것을 막는 것이 이 대법의 진정한 목적이었다.

곽호는 자타공인 절대고수다.

그런 그가 지금보다 더 높은 경지에 이른다면 천하에서 그를 막을 수 있는 자는 없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어찌하여 자신의 가능성을 막아버리는 것인가.

본인이 아닌 이상 그 마음을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곽호의 그 같은 선택을 궁금해 하는 사내가 지금 그의 곁에 있었다.

그는 옥으로 빚은 듯한 하얀색의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오른팔 소매 부근이 헐렁한 것이 외팔이인 듯 보였다.

문득 곽호가 그를 향해 말했다.

“감숙에서 초운의 흔적이 발견되었다는구나.”

가면의 사내가 답했다.

“흥미롭군요. 나타나지 않기에 어디 심산유곡에서 은거라도 하는 줄 알았더니.”

가면 사내의 대답에 곽호가 희미하게 웃었다.

“결코 포기를 모르는 녀석이지. 너도 잘 알고 있지 않느냐, 황현.”

가면의 사내, 황현이 대답했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릅니다. 제게 있어서 과거의 나는 저 자신이면서도 타인이나 다름없으니 일부러 떠올리지 않는 이상 그 아이의 장점 같은 세세한 기억은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런가…….”

곽호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가 다시 말했다.

“누굴 보내면 좋겠느냐.”

“데려오실 생각입니까?”

“그렇지. 녀석은 번천계를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존재, 이미 삼 년 전의 시험도 다 통과했으니 자격 또한 충분하다.”

그는 육대세가와 구파를 움직여 생사불문을 조건으로 그를 사냥하게 했고, 초운은 그들의 사냥에서 결국 살아남았다.

곽호는 역천을 꿈꾸면서도 하늘에 그 뜻을 묻고자 했다. 그래서 육대세가와 구파의 힘을 약화시키는 한편, 초운을 시험했다.

만약 초운이 그때 죽었다면 하늘의 뜻으로 알고 계획을 미루었을 것이다.

그러나 초운은 죽지 않았다.

곽호는 하늘의 오만함을 비웃었다.

초운을 제거하지 않고도 자신을 막아 낼 자신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초운을 대적자로 여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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