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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향-76화 (76/217)

검향 76화

수석 대표두인 유석운은 상운표국이 처음 깃대를 올린 순간부터 함께해 왔다.

상운표국이 오늘날 감숙에서 이름 높은 표국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그와 그의 대형인 표국주 추운백이 청춘을 다 바쳐 가며 노력해 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추연희에게 있어서 그는 자상한 숙부이자 늘 바쁘기만 하던 아비를 대신한 또 다른 아비이기도 했다.

그녀의 아버지 추운백이 병상에 누운 후로는 더욱 더 그를 의지하고 있었다.

그녀가 아비를 대신해 무모하다 할 수 있는 의뢰를 받아들이고 지금의 커다란 표행을 준비할 때도 그는 묵묵히 지지해 주었다.

“이틀 뒤면 해고령이구나.”

“네…….”

“걱정되느냐?”

추연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검귀라니까요.”

유석운은 자상한 미소로 말했다.

“너무 걱정 말거라. 분명 헛소문일 테니. 게다가 호 대협께서도 따라오셨고.”

유석운이 호무영을 띄워 주긴 했지만 그 역시 호무영에 필적할 만한 고수로 감숙에서 이름이 높았다.

“하긴 해남도(海南島)까지 갈 길도 먼데 소문 하나에 일희일비하면 너무 머리 아프겠죠? 아저씨나 아버지나 이런 일을 어떻게 견뎌 오신 거예요?”

그녀가 미간을 찌푸리며 하는 말에 유석운은 대답 대신 씁쓸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가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네가 웬 떠돌이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는 소문이더구나.”

“뭐요?!”

추연희가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하지만 혼자가 아님을 깨닫고 주변의 눈치를 보며 낮은 목소리로 그에게 다시 말했다.

“무슨 소리예요, 아저씨!”

“왜 그, 이번에 함께한 표행무사들 중에…….”

“절대! 절대! 절대! 그런 거 아니에요! 관심이라뇨! 제가 그런 떠돌이 낭인에게 무슨 관심을 가져요! 약해 빠진 데다 어리바리해서 표사들은 물론이고 쟁자수들한테까지 만만하게 보이는 사람을!”

낮은 목소리였지만 침을 튀기며 열변을 토하는 그녀의 기세에 유석운은 자기도 모르게 상체를 뒤로 해야 했다.

“아니면 아닌 거지, 그렇게 화낼 거까지야……. 미안하구나.”

“하여튼 아니니까 그런 줄 아세요! 아저씨는 절 대체 뭘로 보구!”

그녀는 씩씩거리며 말고삐를 움직이더니 행렬의 뒤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홀로 남은 유석운은 멋쩍은 미소와 함께 중얼거렸다.

“관심 없는 것치고는 꽤 많이 알고 있구먼, 뭐.”

행렬의 뒤편으로 말을 몰고 온 추연희는 누군가를 찾는 듯 고개를 두리번거리다, 곧 눈을 빛냈다.

그녀는 말에서 내리더니 고삐를 쥐고 그 ‘누군가’를 향해 다가갔다.

“이봐요.”

“……네.”

“또 왔냐 하는 표정이네요. 내가 온 게 싫어요?”

“…….”

내심 아니라는 말을 기대했건만 이 ‘운’이라는 이름의 표행무사는 무언으로 긍정을 표했다.

초운은 남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외자인 운으로만 소개했다.

어차피 표행의 끝까지 함께할 것도 아니었고 중간에 헤어질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초운이라는 이름은 너무 많이 알려져 있기도 했다.

“그건 그렇고, 내일 모레면 해고령이에요.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예전의 그 어설픈 무공으로 남들 방해나 하지 말아 줬음 해요.”

“네?”

“당신은 약하니까 쟁자수들이랑 함께 어디 숨어 있으란 얘기예요.”

“하지만 전 표행무사입니다.”

“그러면 뭐해요? 검객이면서 허리에 찬 검 하나 제대로 다루지 못하잖아요. 그나마 당신이 뽑힌 건 경공 때문이었다는 거 몰라요?”

초운은 표행무사로서 남들과 경합을 벌일 때 어느 정도 해야 무공이 어설퍼 보이는 건지 몰라 헤맸다. 어려서부터 뭔가 감추는 법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결국 너무 실력을 숨긴 나머지 경합에서 떨어질 위기였는데 다행히도 경공에서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 합격할 수 있었다.

경공이 뛰어난 사람이 한둘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위에서 판단한 것이다.

그런데 초운은 이 같은 사실을 그녀에게 듣고 처음 알았다.

표행에 묻어가는 것이 목적일 뿐, 왜 합격했는지에 대해선 알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신은 혹시나 표물에 불상사가 생기거나 표행에 지장이 생기면 의뢰인이나 상운표국에 알리는 역할이에요. 그러니 위험한 일에 끼어들 필욘 없다는 거죠.”

초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임무라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 그래요. 그리고 당신 때문에 표사들 사이에서 헛소문이 돌고 있어요. 좀 조심해 줘요.”

사실 초운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고, 그녀의 이유 모를 괴롭힘 때문에 퍼진 소문이었지만.

초운은 따지지 않았다. 어차피 평생 볼 것도 아니고 그저 길동무에 불과했으니까.

단지 지금의 그녀나 조금 전에 일부러 찾아와 자신을 걱정해 주던 쟁자수들의 장(長) 명우도 그러했듯, 왜 자신에게 그리 신경을 써 주는 건지 의아할 뿐이었다.

그러다 궁금해졌다.

그들이 자신의 진실된 정체를 알고서도 지금과 같이 대해 줄지를 말이다.

* * *

촤하하학!

새빨간 검기가 경맥을 끊는 것도 모자라 살과 근육을 파헤쳤다.

검기에 당한 이의 몸에서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검기를 날린 이는 입 주변에 묻은 타인의 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혀로 입술을 핥았다.

그 모습에 지켜보던 이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네놈은 대체 뭐냐! 산적이냐?”

한 표사의 절규 섞인 외침에 그가 답했다.

“……이 몸을 산적 따위와 비교하다니. 네놈은 가장 잔인하게 죽여주마. 그래도 영광으로 알거라. 검귀(劍鬼)의 손에 죽는 것을.”

“거, 검귀!”

표사들의 목소리가 절규로 변했다.

다시 한 번 유형화 된 검기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검기를 유형화시킬 수 있다는 것은 그가 절정의 고수임을 뜻했다.

“크하하하하! 다 죽어라!”

수라사인공(修羅四忍功).

탐혈검기(貪血劍氣)!

쇠톱과도 같은 검기의 파도가 표사들을 절단하기 시작했다.

한동안 굶주려 있던 살인에 대한 욕망.

그리고 공포에 질린 인간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에 대한 쾌감이 일시에 터져 나왔다. 질리지 않았다.

아직 죽일 자는 많았고 자신은 아직도 굶주려 있었다.

정보를 제공한 자의 소식에 따르면 앞으로 이틀 뒤면 또 하나의 표행이 도착할 것이고, 그땐 지금보다 더 많은 이들을 죽일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오늘의 이 살육은 그날을 위한 예행연습에 불과했다.

얼마간 해고령엔 비명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자칭 검귀라 주장하는 사내의 입꼬리가 귀밑까지 찢어지듯 늘어나며 불길한 미소로 변했다.

二章

“해고령이 이렇게 조용했던가…… ?”

쟁자수들의 장(長)인 명우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의 기억으로 낮 시간 때의 해고령은 상당히 붐볐다.

아니, 붐빈다기보다는 워낙 넘으려는 이들이 많았다.

해고령을 넘고 반나절만 가면 쉴 수 있는 마을이 나오기 때문이었다.

헌데 지금 이 해고령을 건너는 이들은 자신들뿐이었다.

이틀에 걸친 강행군 덕분에 표사든 쟁자수든 다들 지쳐 있었다.

그래서인지 다들 명우가 느낀 것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아니, 느꼈더라도 무시하고 있다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들 모두는 어서 빨리 해고령 너머의 마을에 도착해 지겨운 노숙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명우가 비록 쟁자수들의 장(長)이라고는 하나, 표두나 수석 대표두에게 조언을 할 만큼 직위가 높은 것이 아니었다.

표사나 표두들에게 존중을 받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특혜라 할 수 있었다.

명우는 자신의 분수를 알았다. 크다고도 할 수 없는 특혜를 믿고 나설 만큼 담이 큰 편이 아니었다.

대신 쟁자수들에게 은밀히 눈치를 주었다.

만약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평소처럼 대처하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그래 봤자 재빨리 수레 밑으로 숨는 것뿐이었지만…….

“저건…… ?”

유석운이 말고삐를 잡아 멈추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옆에서 함께 나란히 말을 몰던 추연희가 그에게 물었다.

“왜 그러세요, 아저씨?”

“저길 보거라. 사람이구나.”

그의 대답에 추연희 또한 안력을 돋아 전방을 보았다. 과연 길목의 끄트머리에 누군가의 인영이 서 있었다.

“누굴까요?”

“글쎄…….”

유석운은 굳은 얼굴로 뒤편의 행렬에서 표사 두 명을 불러 명했다.

“왜 길 한가운데 서 있는지 알아 보거라.”

두 명의 표사는 곧바로 뛰어가 그자의 앞에 섰다. 약 팔 장 정도의 거리였기에 유석운이나 추연희는 상황을 잘 살필 수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표사 둘의 목이 순식간에 몸과 분리되어 떨어지는 것을 목격해야 했다.

대경실색한 유석운이 표사들을 향해 외쳤다.

“모두 방어다!”

표사들은 표물을 지키는 게 우선이다. 때문에 그들은 수레를 보호하는 형국으로 진을 짰다.

표물을 노리는 적들은 보통 홀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따로 등장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두 표사의 목을 벤 사내는 어느새 유석운의 앞에 다가왔다.

“네놈은 무엇인데, 죄 없는 표사의 목숨을 빼앗은 것이냐.”

사내는 대답 대신 살의 가득한 미소로 화답했다.

그리고…….

붉은색의 검기가 추연희의 목덜미에 이르렀다.

쾅---!

“꺄악!”

검기는 다행히도 누군가의 권풍이 튀어나와 쳐냈다. 하지만 그 여파로 그녀는 말 위에서 굴러떨어져야 했다.

“웬 놈이냐!”

표행무사인 호무영이었다.

그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표사들의 방진에 참여하지 않고 곧바로 앞 열로 다가와 낯선 사내의 검기를 막아 낸 것이다.

하지만 붉은색의 검기에 실린 힘이 보통이 아님을 느낀 터라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그의 뒤편으로 표행무사들 일곱과 표두 넷이 더 합류했다.

그중에는 초운도 있었다.

표행을 홀로 막은 사내는 날카로운 눈매 속에 번뜩이는 살의를 숨기지 않고 뿜어내는 중이었다.

오른손에는 시뻘건 검기가 일렁이는 검을 들고 있었는데 그 기세가 심상치 않아 보였다.

그는 호무영이나 유석운이 아닌 말에서 떨어진 추연희에게 눈길을 주며 말했다.

“킥! 운이 좋구나. 계집.”

“당신이 바로 해고령의 검…… 귀?”

“나를 알고 있다니 소문이 잘 흘러들어갔나 보군.”

그가 부정하지 않자 표사들 사이에서 동요가 일어났다.

검귀에 대한 무서운 소문들을 많이 접했던 탓이다.

하지만 초운은 처음 들었는지 아니면 관심이 없는 건지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대신 그는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분명 그의 감각에 걸리는 이는 저 검귀라는 사내 외엔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위화감이 느껴졌다.

그때 호무영이 그 사내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노옴!”

칠성현종권의 절기인 파군(破軍)이 검귀의 몸을 부술 듯 맹렬히 튀어 나갔다.

그러나 검귀의 붉은색 검기를 뚫지는 못했다.

오히려 호무영의 전신에 무려 일곱 곳의 상흔이 생기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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