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향 75화
초운이 잠시나마 몸을 의탁 중인 이 표국의 행로는 감숙의 평량(平凉)에서 시작되었다.
표국의 이름은 상운표국으로 감숙성에서 제법 규모가 크기로 유명했는데 이번 호송은 아주 큰 의뢰였던 터라 초운과 같은 무사들을 임시 표사로 고용한 것이었다.
초운은 무림맹을 비롯한 수많은 단체들로부터 쫓기는 신세였던지라 기련산을 내려온 직후 흔적을 남기지 않고 다른 지역으로 넘어가기 위해 표국의 표행에 동행하게 된 것이다.
혼자 움직이면 아무래도 주목을 받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사람과 섞이는 걸 꺼리는 그로서는 약간의 후회가 뒤따랐다.
무엇보다 후회되는 것은 이 표행을 책임진 한 사람 때문이었다.
“이봐요, 거기! 거기 모자란 사람! 당신! 내 말 안 들려요?”
조금 전부터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애써 무시하다, 결국 한숨을 쉬며 돌아본 초운이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가씨.”
“아가씨? 대표두라고 부르세요!”
보통 규모가 작은 표행이라면 일반 표두 한두 명 정도가 표사들을 이끌고 표행을 나선다.
하지만 표사가 칠십 명이나 되는 대행로엔 표두들의 최고참이 대표두가 되어 표두와 표사들을 이끌고 움직이게 마련이다.
헌데 눈앞의 아가씨는 대표두라고 하기엔 너무 어렸다. 스무 살이 넘은데다 시집갈 나이도 한참 지났다. 하지만 표국의 큰 의뢰를 책임질 만한 나이는 아니었다. 그것도 여인의 몸으로.
그렇기 때문에 그녀가 숙부라 부르는 수석 대표두가 표행을 책임지고 있고 그녀는 표국을 이을 이로서 경험 삼아 나서게 된 것이다.
버릇처럼 볼을 잔뜩 부풀린 채 초운을 바라보는 이 여인의 이름은 추연희. 상운표국의 무남독녀이다.
그녀는 한 달 전 초운이 상운표국의 행로에 동행하게 되었을 때부터 귀찮게 했다.
처음엔 어디서 왔냐는 둥 이름이 뭐냐는 둥 귀찮게 굴다가 그가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이자, 심통을 부리며 쟁자수들이나 할 일들을 시키거나 심부름 등을 시켰다.
표사 경험이 없는 초운은 그걸 또 군말 없이 다 받아주었고.
아무리 괴롭혀도 기분 나빠 하긴커녕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는 초운이었으니 그녀 입장에선 심통이 날 수밖에 없었다.
표사들의 안쓰러워하는 눈빛을 보고 나서야 자신이 괴롭힘을 당하고 있음을 알게 된 초운은 이해할 수 없는 그녀의 행동이 점점 더 귀찮았다.
“내 말 듣고 있는 거예요?”
“네.”
다시 한숨을 내쉬자 그녀가 말했다.
“좀 전부터 그 한숨은 뭐예요, 대체?”
“…….”
“일어났으면 빨리 쟁자수들 도와서 짐 정리하세요. 말과 소들 먹이도 좀 주시고요.”
초운은 이번만큼은 좀 따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저는 표사로 고용되었습니다만…….”
그녀가 씩 하고 웃으며 말했다.
“이봐요. 표. 사. 님! 나는 표두예요. 그것도 대표두. 표사는 표두의 말에 무조건 따라야 하는 거 몰라요?”
“…….”
결국 말로는 이길 수 없음을 깨달은 초운은 쟁자수들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한 초운과 추연희를 지켜보던 표사들 몇몇이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여자들이란…….”
“……!”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그녀도 무공을 배운 터라 귀가 어느 정도 트여 있었다.
아니,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 하더라도 겨우 반 장여 거리에서 중얼거리는 소리는 들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표사들 또한 들리는 걸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들을 꾸짖진 않았다.
여인의 몸으로 표국을 이어받기로 한 순간부터 그런 무시는 익숙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불만에 일일이 대응했다간 철딱서니 없는 아가씨 취급만 더 심해질 뿐이다.
“어이 거기, 똑바로 좀 도우라고.”
쟁자수의 잔소리에 초운이 머리를 수그리며 대답했다.
“아, 예.”
그저 자기보다 나이가 많기 때문에 예를 갖춘 것이었다. 그렇지만 쟁자수는 더 다그쳤다.
늘 표사들에게 주눅 들어 살아 왔는데 검을 찬 무인이 고개를 숙이자 기분이 들떴던 것이다.
보통 이 정도에서 멈춰야 하지만 그는 초운을 만만히 보았다.
“일 하나를 제대로 못하는군. 흥.”
짐 나르는 쟁자수가 이 정도이니 표사들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그들 대부분이 초운을 무시했다. 너무 비굴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추연희는 그게 늘 답답했다. 자신의 모습을 보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당신 무인 맞아요?”
“네?”
“검을 찬 무인 맞냐고요. 왜 그렇게 아무 말도 못해요?”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겁니까?”
추연희는 답답한 듯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화도 안 나냐는 거예요! 무인으로서 자존심도 없어요?”
“자존심이 상해야 하는 일인가요?”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녀는 머리를 흔들며 등을 돌렸다.
더 말을 섞었다간 답답해 미칠 것만 같았다.
초운은 멀어져 가는 그녀의 등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어릴 때부터 뭔가에 화를 내는 것이 어색했다.
타고난 인내심 때문일 수도, 세속의 인간사에 둔해서일 수도 있다.
화산에 있을 때가 좋았다…….
하고 생각하는 순간 그는 머리를 저었다.
이젠 되찾을 수 없는 과거일 뿐. 미련을 둬선 안 된다.
미련은 곧 망설임. 망설임은 언제나 후회를 남기게 된다.
그는…… 초운은 다신 후회를 남기지 않기로 맹세했었다. 때문에 그저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 * *
감숙에서 사천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위치한 구채구(九寨溝)에는 해고령이라는 언덕이 존재했다.
그곳에는 요 몇 달 사이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었는데 겁 많은 쟁자수들 사이에선 그 흉흉한 소문이 화제였다.
“……요즘 해고령에 검귀(劍鬼)가 출몰한다면서?”
“검귀?”
“피에 미친 살인귀의 별호라네. 왜 그 있잖은가. 무림공적…….”
“헉! 마인을 옹호한 그 말종 말인가?”
“옹호뿐인가 공적이 되어 쫓기는 기간 동안에도 자신을 쫓는 반천련의 무인들을 잔혹하게 죽였다고 하네.”
“쯧쯧, 화산파 출신이 어쩌다가…….”
“그러게 말이네.”
그때 표사 하나가 쟁자수들의 말을 끊었다.
“자자, 쓸데없는 소문 가지고 떠벌리지들 마시게. 검귀가 나타나지 않은 게 벌써 이 년째이네. 그가 왜 해고령에 나타난단 말인가. 더구나 그가 정말 나타났다면 무림맹…… 아니, 반천련에서 가만히 있겠는가?”
쟁자수들이 서로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검귀라면 반천련이 공표한 무림공적이다. 그런 그가 홀로 해고령에 나타나 패악을 저지른다면 반천련이 가만있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까지 오는 동안 반천련의 무인들을 보았다는 소문은 듣지 못했다.
결국 헛소문이라 결론 내린 쟁자수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표사들이야 제 몸 하나 지킬 무공을 익혔지만 쟁자수들은 양민에 불과하다.
애초에 쟁자수 일이란 것이 보수는 많아도 목숨을 내놓고 하는 일인지라 정보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특히 이번처럼 먼 길을 가야 할 땐 더욱 그러했다.
새벽에 초운을 깨웠던 중년의 쟁자수 명우는 검귀에 대해 의견을 나누던 동료들의 무리에서 조용히 빠져나와 초운에게로 향했다.
작은 염려 때문이었다. 워낙 말수도 적고 어리바리한 것이, 어려서 죽은 동생이 생각났던 것이다.
표사들의 대표가 표두이듯 명우는 쟁자수들의 장(長)이었다.
그가 장이 된 데에는 경험도 경험이지만 사람들을 잘 다독이고 챙겨 왔기 때문이기도 했다.
덕분에 쟁자수를 하인 정도로 여기는 표사들조차 그를 존중하는 편이었다.
초운은 다른 표사들과 조금 떨어진 채로 수레 옆을 걸으며 육포를 우물거리고 있었다.
표행의 여정이 꽤 늦어진 터라 다들 아침도 거르고 움직이는 중이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에 익숙해지지 않는가?”
명우가 묻자 초운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하지만 대답까지 하지는 않았다.
“…….”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없는 법이네. 다른 표사들에게 먼저 웃으며 말을 걸어 보게나.”
초운은 살짝 고개를 끄덕일 뿐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껄끄러웠다. 다정하게 말을 걸지 않아 줬으면 했다.
자신을 가만두기를 원했다. 그저 이렇게 가다 목적지에 도착하고 헤어지는 것이 좋다.
“곧 해고령일세. 신빙성은 없네만 무서운 악인이 패악을 저지르고 있다는 소문이 있더군. 혹시 감당 못하겠거든 도망치게나. 자넨 정규표사도 아니고, 그저 동행하는 표행무사일 뿐이지 않은가.”
“아저씨는…….”
초운은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나 같은 쟁자수야 무공을 모르니 별수 있겠는가. 수레 밑에 숨어 있다 싸움 끝나길 기다려야지.”
표국에 정식으로 고용된 쟁자수가 표물을 버리고 도망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랬다간 어느 표국에서도 그 쟁자수를 받아주지 않게 된다.
도망을 쳐도 표사들과 함께 도망쳐야 하고 죽어도 같이 죽어야 그나마 그런 불이익을 덜 받게 되는 것이다.
그때였다.
옆에서 걷던 한 표사가 둘의 이야기를 들었는지 끼어들었다.
“그래, 장(長)의 말씀대로 도망가는 게 낫겠군. 괜히 옆에 있다가 남들에게 방해되지 않게. 하하하.”
그의 말에 다른 표사들도 함께 웃었다.
초운은 별 반응이 없었다. 화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리 비웃는 이유도 어느 정도 이해는 갔다.
표행무사를 뽑는 과정에서 뽑힌 게 이상하다 할 수 있을 만큼 아주 어리바리한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운 좋게 최저의 보수로 동행할 수 있게 되었지만 경험 많은 표사들의 눈빛이 좋을 리 없었다.
명우는 혀를 차며 그들을 향해 말했다.
“자네들 그만 놀리게. 어린애도 아니고…….”
“하하. 이런 재미라도 없으면 표행길이 심심해서 어찌합니까? 저희도 악의는 없습니다.”
“음.”
명우는 못마땅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며 초운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는 늘 그렇듯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놈 참 말 없다. 어린놈이 뭐 그리 사연이 많다고. 쯧.”
또 다른 이가 끼어들었다.
표행길의 지루함이 다른 이에게도 번진 듯했다.
“엇, 호 대협.”
표사들이 그를 보고 아는 척을 했다.
이 칠 척의 장한은 유달리 긴 팔다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마른 체형이기까지 해서 멀리서 보면 고목나무에 팔다리가 붙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초운과 같은 표행무사였다.
하지만 대우는 천지 차이였는데 그 이유는 그가 감숙에서 꽤 이름을 날린 무인이기 때문이다.
그는 바로 칠성현종권(七星鉉宗拳) 호무영으로, 별호에 무공 이름이 붙어 있을 만큼 권(拳)의 달인이었다.
스스로도 고조부 때부터 전해 내려오는 칠성현종권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하지만 그런 그가 이런 표행에 동참하게 된 이유는 안타깝게도 병에 걸린 아내의 약값을 벌기 위해서였다.
무림의 고수일지라도 가족의 건강과 돈 앞에서는 자존심을 버려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그가 깊은 눈으로 초운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뭐하던 놈이냐?”
“……지금은 무인입니다.”
초운은 무겁던 입을 열었다.
“지금은 무인이다?”
호무영이 되묻자 주변에서 웃음소리가 다시 터져 나왔다. 표사들이었다. 그러자 호무영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을 한 번 쭉 바라보았다. 그러자 웃음이 그쳤다.
그가 고개를 돌려 다시 물었다.
“그럼 예전엔 뭐하던 놈이냐?”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흠. 이상한 놈이군. 근본이 없지는 않을진대…….”
“근본은 있었으나 잊었습니다.”
호무영이 씩 웃으며 말했다.
“말이 꽤 많은 놈이었군. 이렇게나 말을 잘하는데 그동안 왜 입을 꾹 다물고 있었지?”
“…….”
초운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호무영이란 자의 성품이 괴이한 것을 알고 귀찮음을 피하기 위해 대답해 주었던 것뿐이다.
그것을 오히려 놀리는 데 사용하니 껄끄러워졌다.
호무영은 그를 조금 더 관찰하는 듯하다가 흥미를 잃었는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표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쟁자수의 장인 명우도 돌아갔다.
초운은 다시 혼자가 되었다.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제자리로 돌아온 호무영은 예리한 눈으로 초운을 살피며 생각했다.
‘분명 뭔가 있는데……. 뭔지 모르겠군.’
수상했다. 표사들은 썩은 동태눈이라 발견 못하고 있지만 분명 뭔가 숨기고 있었다.
하지만 감은 오나 명확하지 않았다.
호무영은 밥값을 하기 위해서라도 일단 녀석을 지켜보기로 했다.
표행길의 불상사는 사소한 것을 놓치는 데에서 시작되는 것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